스킨

옷장

알파카개틀링 2014. 7. 21. 21:14


 나 방금 강간당했어.

 전화가 아니었다. 양치를 할 겸 가방을 뒤지다가 메일을 발견했다. 피임약 먹고 있으니까 어차피 임신은 안 하겠지만, 야스토모, 나 배가 너무 아파. 아라키타는 핸드폰 폴더를 접었다가 다시 열었다. 글씨가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번 달이 4월이었던가. 아니면 오늘이 할로윈이었나 소름끼치게. 이 거지같은 계집애는 이게 무슨 뜻인 줄 알고 보낸걸까. 농담도 정도가 있지 지금 이걸 농담이라고 한 건가. 아라키타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신카이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너 어디야. 2층 화장실 둘째 칸. 거기 가만히 있어, 움직일 생각 꿈도 꾸지 마.  


 화장실은 좀약냄새로 가득했다. 배려심 넘치는 청소부는 여자 화장실에 칸마다 나프탈렌을 잔뜩 걸어두었다. 적으면 두 개, 많으면 세 개. 신카이가 강간당한 장소에서 고작해야 생각한다는 것이 옷장 속 눅눅한 좀약이라니. 아라키타는 둘째칸을 두드렸다. 그러자 신카이가 코맹맹이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어와, 열려 있어. 문을 열자 팬티를 내린 채 엉거주춤하게 변기에 앉아있는 신카이가 보인다. 미안한데 야스토모, 혹시 생리대 있어? 자꾸 피가 나. 신카이는 발 끝으로 화장실 문을 밀어 닫았다. 아라키타가 그 문을 중간에 받아 걸어잠궜다. 사진을 찍는 것처럼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아라키타는 티슈와 물티슈를 한 손에 쥐어든 채였다. 신카이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 상상 속 남근의 대리만족으로 다른 반 남자애에게 강간당할 만큼. 


 아라키타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신카이가 엉엉 울면서 정액묻은 속옷을 휴지통에 쑤셔 박았던 날을 생각해보았다. 어떤 새낀데. 그 날은 아라키타가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신카이의 양 무릎을 만졌던 날이었다. 1반? 3반? 5반? 7반? 아라키타의 추궁에 신카이는 고개만 내저었다. 그럼 뭐야. 좀 말을 해. 네가 지껄여야 내가 사정을 알 거 아냐. 신카이는 생리대를 빌려달라고만 이야기 했고, 아라키타는 계속 캐물어냈다. 그럼 이거만 말해. 그 새끼가 널 강간친거야 아니면 네가 그 새끼를 강간친거야. 말 안 하면 양호실 안 데려가 줘. 신카이는 대답했고, 아라키타는 신카이에게 세례의 여지조차 남겨주지 않기로 했다. 그 새끼가 너 강간 친 거 맞아? 

 "내가 한 거야."

 "누가 뭘 했다고?"

 "걔가 나 강간한 거 아니야. 내가 걔를 강간했어."

 "근데 멍청아 왜 네가 울어."

 신카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너는 가해자잖아. 네가 그 새끼 강간친 거라면서. 그럼 네가 잘못한 거잖아.

 "걔한테 미안해서 그래." 

 "그럼 미안해야지 안 미안해? 네가 먼저 꼬셨다면서."

 "그건 안 미안해. 걔랑 섹스하면서 네 생각해서, 그게 미안해."

 이 미친년. 그게 어떻게 섹스야 강간이지. 

 신카이는 아라키타가 교실에 들러서 같은 반 아이에게 생리대를 빌려올 때까지 헛숨을 잔뜩 먹으면서 울어댔다. 저 계집애는 뭐가 그리 겁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남의 성기가 두려운건지 시큼한 화장실 냄새가 두려운건지. 아라키타는 신카이의 속옷에 생리대를 붙여주고 체육복 바지를 빌려주었다. 신카이는 조금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양호실에 내려간 뒤, 그 날은 내내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눈물을 쥐어짜내놓고도 신카이는 다음 날 두려운 기색도 없이 둘째칸 문을 열었다. 아라키타는 칸막이 밖에서 등을 기댔다. 병원은 갔냐. 아니, 병원 안 가고 그냥 씻었어. 왜 안 가. 씻으면 괜찮아. 청결제로 소독은 했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물에 개어서 쓰는 것인지 젤처럼 된 것인지 하다못해 청결제를 쓰기는 하는 건지. 그 새끼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 새끼한테 병이라도 있었으면 어떡하냐고, 너 에이즈 걸리게 되는 거면 어떡할 거길래 왜 병원도 안 가고 있냐고. 그러나 아라키타는 입을 다물었다. 은밀한 것이어서 그렇다고 애써 생각해봐도 자꾸 토할 것처럼 속이 뒤집어진다. 자신은 신카이의 어느 것 하나 알 자격이 없었다. 정확히 한 달 전이었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신카이가 웃으면서 아라키타에게 피임약을 내밀었던 날이 있었다. 야스토모, 생리통 심하지? 이거 새로 나온 건데 약사님이 이거 먹으면 생리통이 없어진대. 먹을래? 피임약을 왜 먹어, 남자랑 잘 일도 없는데. 이상하게 그 말에 조금 기뻐하더라. 네가 왜 좋아하는지 그 땐 몰랐는데 이젠 알 것 같아.


 생각해보면 신카이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신카이는 때때로 사람같지 않은 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피력했다. 신카이가 끊임없이 속삭이는 말은  별 특별한 게 아니었는데도, 마치 동물원에 간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구질구질한 것도 사랑이래.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사람이 된대.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야스토모도 나를 사람취급 해줘. 쌍욕을 듣느니만 못 한 말이다. 똥통에 처 박힌 것처럼 가슴이 조여오고 속이 울렁거리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네가 내 몸 속에 또아리를 틀었나보다. 어느 막연한 감정이 살을 파고드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숨이 꽉꽉 막혀오는데 하물며 본 적도 없는 남성기란. 

 살아남는 방법이 모두 이렇게 짐승같지 않다는 것을 않다. 그런데 왜 이리도 자처해서 짐승만도 못 한 이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강제건 강제가 아니건 무언가를 속에 쑤셔넣는다는 건 올가미같은 일이고, 그 무언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몸통 어딘가가 아프고 쓰라린데 불편해서 뒤척이면 자꾸 깊이 파고 들었다. 발목을 자르라면 발목을 자를테고 손목을 자르라면 손목을 자를텐데 잘라낼 것도 없어 벗어날 수가 없다고. 보이지 않으니 도망칠 수 없고 쥘 수조차 없어 떼어내지 못 하는데 이러고서 내가 도대체 어떻게 살겠어. 이러고서 내가 너를 어떻게 좋아해. 차라리 지금 나 동정하는 거냐고 욕을 하지, 강간당해서 더러워보이냐고 말을 하지. 네가 뭔데 나를 좋아해, 내가 뭔데 나를 좋아해, 내가 뭐라고 네가 나 대신 강간당해. 강간이 어떻게 섹스야 이 바보야. 간 자 들어간다고 다 섹스인 거 아니야.


 아라키타는 치마를 들어올렸다. 속옷 하나만 입은 다리 사이에 찬 바람이 들이닥친다. 너랑 자고 싶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라키타가 얌전히 문에 등을 기댄 이유는 신카이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라키타에게 신카이는 야만인이었다. 성이라는 엄숙주의를 부끄러움도 없이 박살을 낸 작자다. 내가 죽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내가 받은 만큼 너에게 쏟아내고 싶은데 나는 너한테 받지를 못 했다고. 뻔하고 자기만 속편한 변명을 듣느니 이깟 레즈비언 섹스.

 내가 그걸 먹었으면 내가 신카이의 대신이었을까. 아라키타는 신카이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칸막이 너머로 전구빛이 보였다. 속옷 아래가 가차없이 후벼 파여진다. 마치 뚜껑처럼 시야가 어두워졌고, 고개가 흔들릴 때마다 뺨이 잔뜩 눅눅해졌다. 화장실에 너와 나만 있는 것 같아. 세상에서 너랑 나만 섹스하는 것 같아. 내가 너무 깨끗해서 어떡하지, 내가 너무 더러워서 어떡하지. 신카이는 울고 있다. 목욕이라도 하고 싶다고 자꾸 눈물을 닦아냈다. 아라키타의 가랑이 사이는 여전히 축축했다. 뻘 같은 소리와 함께 허벅지에 무언가가 흘러내린다. 눈물인지 한숨인지 도무지 모를 것이 눈을 자꾸 가리고, 아, 옷장 냄새, 코가 너무 아프다. 

 아라키타는 엉거주춤 양 발의 보폭을 벌렸다. 그러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신카이의 손가락은 아직도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