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

디에고 리베라

알파카개틀링 2014. 12. 8. 03:24

 




 아웃팅을 당했다.

 시작은 손편지였다. 2학년 신카이 하야코가 같은 반 아라키타 야스토모와 섹스를 합니다. 얼기설기 서툴게 쓴 분홍색 손편지는 믿음직스럽지 못 했는데도 온 학교를 뒤집어 놓았다. 어린 애가 쓴 것처럼 삐뚤어진 글씨가 손바닥만한 편지지에 가득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와 신카이의 책상에만 편지가 올라와 있어서 그랬는지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2학년 신카이 하야코가 같은 반 아라키타 야스토모와 섹스를 합니다. 그 둘은 레즈비언입니다. 2학년 신카이 하야코가 같은 반 아라키타 야스토모와 섹스를 합니다. 그 둘은 레즈비언입니다. 2학년 신카이 하야코가 같은 반 아라키타 야스토모와 섹스를 합니다…….

 나는 교무실에 다녀오자마자 그 편지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악질적인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악질만도 못 한 장난이기도 했다. 내가 되려 찔려 여기서 화를 낸다면 이 더러운 스캔들이 모든 아이들에게 알려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의연한 척 할 수 있었던 나와 달리 하야코는 편지를 펼치고 읽자마자 바로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무릎이 까지는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하고 있던 하야코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내게 쏟아지는 낯선 시선들은 순식간에 나를 총알받이로 만들었다. 야스토모, 나더러 레즈비언이래. 나 레즈비언이래 야스토모. 어떡해, 나 어떡해. 

 나는 그 날 부로 레즈비언이 되었다. 정확히는 하야코를 좋아해서 레즈비언인 레즈비언이 되었다.


 

 나와 하야코의 책상에만 올라오던 분홍색 편지지는 점점 갯수가 늘어났다. 두 개에서 세 개로 세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나던 편지는 학기의 마지막 날, 드디어 우리 반의 모든 책상 위에 올라왔다. 직접 써서 삐뚤빼뚤하고 분홍색 스티커로 밀봉되어 있던 손편지는 봉투도 없이 깔끔하게 프린트 용지로 바뀌어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가정통신문같이 느껴져서, 나는 교실 문을 열자 마자 우리 반 담임이 미리 통신문을 돌려 놓은 줄로만 알았다. 창문이 모두 열린 텅 빈 교실 속에 하얀 종이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 낯선 풍경. 말 한 마디 나눠본 적 없었던 옆 자리 계집애가 멀찌감치 책상을 떼어놓는 것을 시작으로 나와 하야코는 투명인간이 되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나와 하야코를 따돌리기 시작한 후에는 일말의 목적을 달성한 듯 편지가 잠시 주춤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너, 진짜 레즈비언이야? 아니지? 하고 용기있게 물은 바로 그 다음 날 고발편지는 다시 매일같이 학교로 날아들었다. 



 하야코는 편지가 오는 날에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거든 덩달아 자리를 박차고 나를 따라다녔을 뿐이다. 하야코는 차마 내 옆에 설 자신이 없어 안절부절한 모양으로, 그러나 나에게서 멀어지지는 않았다. 야스토모, 야스토모 어디 가? 야스토모, 같이 가, 야스토모.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없으면 무서워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모르는 척 하는 내가 무서워서 말을 걸지 못 한다는 것은 일찌감치 눈치챘다. 

 나는 그런 하야코가 얄미웠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야코는 꾸준히 내게 눈으로 말을 걸었다. 하야코가 불안해 하는 것이 나에게까지 전해져왔지만, 나는 그런 하야코를 모르는 척 자리를 피했다. 하야코에게 미안한 마음보다도, 감정에 못 이겨 나와 자기 자신을 수렁에 빠뜨린 하야코에 대한 원망이 조금 더 컸기 때문이다.



  2학년을 마치고 3학년이 되어서 나와 하야코는 반이 바뀌었다. 그러나 나나 하야코 둘 중 하나가 교실을 비우는 날에는 어김없이 한 쌍의 편지가 찾아왔다. 까끌까끌한 재질의 편지봉투와 분홍색 하트스티커. 나는 굳이 책상이 보일 때까지 다가가지 않아도 편지의 유무 정도는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하야코는 3학년에 올라와서 예전보다 더 많이 자주 울기 시작했다. 홀로 유리된 학교생활이 많이 힘든 모양이었다. 하야코는 내가 보이지 않아도 울고 내가 보여도 울었다. 불안했다거나, 답답하다거나, 잘 모르겠다거나, 하다못해 배가 아프다거나. 온갖 사소한 이유를 들어가며 서러움을 정당화하는 하야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미안해, 야스토모까지 끌어들여서 미안해. 내가 널 좋아해서 그래. 내가 너 좋아하는 거 티를 내서 그랬나봐. 그런데 도대체 누군지 모르겠어, 누가 나한테 이러는지 모르겠어, 미안해, 미안해 야스토모. 

 나는 하야코가 혼자만 괴롭힘을 받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미웠다. 실제로 나와 하야코가 받은 편지는 두 개였다. 내 몫의 편지와 하야코 몫의 편지. 나는 하야코의 책상 위에 올라와있는 편지에 어떤 내용이 적혀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하는 말로 미루어봐서 나와 별반 다른 내용이 적혀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혼자만 죄를 지은 듯이, 마치 혼자서 잘못한 것인양, 나와 걔가 서로 좋아하는 것이 자기 자신만의 범죄인 양 우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하야코가 자책하는 모습보다 울다 지쳐 숨을 헐떡이는 하야코의 모습이 내 살을 더 저몄기에 차마 싫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편지를 받기 시작하고 나서 그리고 3학년이 되고 나서 하야코는 스킨쉽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우리는 편지가 오는 날엔 무조건 키스를 했고, 편지가 오지 않은 날에도 가끔 키스를 했다. 키스를 하고 숨이 너무 차면 손을 잡았고, 손을 잡다가 땀이 차면 서로를 끌어안았다. 하야코는 어떤 식으로든 나와 살이 닿아있어야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손가락 하나라도 팔뚝 살갗 하나라도 닿아있지 않으면 하야코의 안색은 금방이라도 거품을 물 것처럼 창백해졌다. 

 하야코가 내 눈 앞에서 편지를 보고 공황장애를 일으켰던 전적이 있었기에 나는 일부러 스킨쉽을 더 늘렸다. 대신 최후의 마지노선으로, 남들 눈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하야코를 끌고 들어갔을 뿐이다. 우리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둘만 더 자주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허벅지를 만지고, 그러고도 견딜 수 없어 정말 괴롭고 힘든 날에 섹스를 했다. 서로가 서로를 만지는 시간에는 하야코도 나도 학교에 관한 것은 모두 잊을 수 있었다. 하야코의 체육복이 찢어진 채 발견되어 내 것을 빌려 입어도, 이미 에이즈에 걸린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어도, 사정이 그렇게 되었으니 기숙사에 더 있긴 힘들지 않겠냐고 기숙사 사감이 회유한 날에도, 어쨌거나 섹스를 하고 나면 날이 바뀌어 있었고 그게 좋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통학을 시작한 나는 하야코와 줄지어 걷는 대신 어깨를 붙이고 걷기 시작했다. 앉을 일이 생기면 하야코의 옆자리에 허벅지를 붙이고 앉게 되었다. 하야코는 예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의연하게 외로움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없어도 가만히 교실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하야코는 이제서야, 어쩔 수 없이 해소할 수 없는 외로움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나는 쓰레기통에 버린 첫 편지를 제외한 나머지 편지들은 모두 모으고 있었다. 하야코는 내가 수집하는 분홍편지들을 단 한 번도 직접 만지는 일이 없었다. 다만 조용히, 그리도 억울한 눈빛으로 나와 편지를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고 숨을 참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야코가 편지들을 무서워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야코는 편지를 펼쳐보고 주저앉을지언정 편지를 집어 들고 내다버릴 강심장이 못되었다. 하야코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대응하기에 서툴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지 몰라서 수습을 못 하는 애였다. 하야코는 누군가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저 무서워하기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하야코는 악의가 무서워 울음을 터뜨렸을 뿐,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했다. 

 나는 아마 책상 위에 올라가있는 것이 편지가 아니었어도 하야코는 그걸 버리지 못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바라보는 하야코는 멍청하고 순진해서 가끔 짜증나는 애일뿐이지만, 나는 하야코가 어느 누구보다도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느 날 하야코의 가방이 망가진 채 소각장에 버려진 것을 목격했을 때, 그리고 그 속에 분홍편지가 한가득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조용히 가방을 도로 닫았다.



 날이 추워지자 하야코가 나 없이도 혼자 다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나와 하야코가 어두운 곳을 찾아 숨는 일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물을 채운 콘돔에 맞거나 비눗물이 끼얹어지는 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지메는 오히려 더 깊숙이, 성적인 영역에서 심해졌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들과 싸웠고, 하야코는 내 앞에서만 세 번 강제로 팬티가 벗겨졌다.

 괴롭힘이 심해져서인지 편지를 가방에 집어넣고 다니는 하야코의 이상한 습관은 바뀌지 않았다. 하야코의 이상한 강박관념이 편지를 두려워하는 행위인 건지 박제를 하는 행위인 건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야코의 새 가방에서 떨어지는 분홍색 편지를 두 어 개 주워 그것들을 내 책장에 따로 꽂아두는 일 뿐이었다. 

 하야코는 내가 허벅지에 그려진 낙서들을 지워주자 많이 울었다. 너 지금 누군지도 모를 년한테 시위하냐? 나는 눈물로 투명해진 하야코의 소맷자락을 걷어주며 이야기했다. 네가 울어봤자 너만 손해고, 네가 그렇게 무서워해봤자 너만 손해라고. 나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 그 년도 그냥 포기하고 잊을 거 아니야. 울지 좀 마. 왜 자꾸 울어. 그냥 잊게 하면 되는 건데 네가 자꾸 울면 그게 힘들어지잖아. 하야코는 여전히 새빨개진 눈가로 내게 웃어 보였다. 아니야, 야스토모. 내가 안 울어도 걔는 포기 안 할 거야. 걔는 그냥 내가 싫은 거야. 내가 싫어서 너를 괴롭히는 거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네가 아니라 우리인 거고, 그 년은 그냥 우리가 싫은 거고. 차마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범인이 우리를 싫어하는 것 정도는 당연했다. 우리를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다면, 이렇게나 꾸준히 일 년도 넘는 시간에 걸쳐 나와 하야코를 철저히 고립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하야코가 두려워하는 것은 범인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하야코는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이 무서운 것이다.

 하야코는 맨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내가 말아준 대로 오른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붙인 하야코는 내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5교시를 조퇴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저녁까지 하야코를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두 달 동안 하야코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 달의 첫주를 실연당한 사람처럼 내내 울었다. 그리고 두 번째 주는 엄마를 잃은 사람처럼 문득 울었다. 혹시라도 장난처럼 다른 반에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하야코마저 나를 괴롭히려는 건지, 실마리조차 찾을 수가 없어서 오히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하야코가 사실 나를 싫어했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원래 하야코는 내 상상 속의 인물이었나? 아니면 내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악몽을 한 달 동안 꾸고 있는 건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핸드폰을 확인해도 발신내역과 발신메일만 잔뜩 쌓일 뿐, 하야코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전화 한 통화 메일 한 통 받지도 못 한 핸드폰에 충전기를 꽂는 것이 그렇게나 억울한 일인 것을 난생처음 알았다. 

 나는 그렇게 한 달 동안 복도를 걸었다. 곧 죽을 사람처럼 셋째 주를 지내고 피라도 대신 내어 울고 싶은 사람처럼 울지도 못 하고 한 달을 채웠다. 마치 태어나지 못 한 사람같은 끈적끈적한 시간이었다.

  하야코가 홀연히 사라진지 한 달 만에 학교는 통째로 뒤집어졌다.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회의실에 호출된 나는 내가 모아온 편지들을 모두 가져갔다. 책상 위로 쏟아지는 편지들은 하나같이 신선하고, 꿈틀거리고, 갓 잡은 돼지고기처럼 분홍색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없는 하야코를 대신해 하야코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든 일을 말했다. 물이 담긴 콘돔을 맞았던 일, 비눗물을 맞고 미끄러져 손목이 부러졌던 일, 강제로 치마가 찢어졌던 일, 남자애들 앞에서 팬티가 벗겨졌던 일, 허벅지에 AIDS 라고 잔뜩 낙서당한 일. 낙서는 남아있지 않지만 어디에 적혔는지 보여줄 수 있다며 치마를 걷어 올리자, 교실 맨 뒷자리에서 일어나던 모든 일들을 모르는 척 방임하던 담임선생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징계를 받았다. 

 도덕과목을 담당하는 여선생은 내 양손을 붙들고 눈물을 터뜨렸다. 그 여자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진정으로 모르고 싶던 것 같았다. 도덕선생은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로 하야코보다도 많이 울었고, 마치 연기하는 것처럼 울며 실신했다. 그리고 한동안 교무실에 앉아있는 남선생들 사이에서 담배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하야코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괴롭힘을 주도했던, 나와 자주 얼굴을 마주하던 아이들 몇 명이 졸업을 앞두고 정학처분을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나머지 한 달을 차마 죽지 못 한 사람같이 도로를 걸었다. 하야코를 찾아다니느라 한 달을 통째로 출석을 빠졌다. 나는 살이 많이 빠졌고, 살이 빠진 만큼만 많이 울었다. 모든 일이 끝난 것 같았지만 하야코가 돌아오지 않았기에 모든 일이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두 달 만에 듣는 하야코의 목소리는 묘하게 가벼웠다. 그 흔한 안부인사 한 마디 없이 하야코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편지의 행방부터 물었다. 나 지금 너 보고 싶어, 너 미쳤어? 지금 장난해? 너 지금 어디야, 빨리 말해, 보고 싶어, 만지고 싶어, 다 끝났어, 빨리 말해 제발, 하야코 너 지금 어디야. 온갖 말이 입 속을 떠다녔지만 생각이 너무 많아지자 오히려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내가 뭐라도 말 한 마디 잘못 삐끗한다면 하야코가 다시 연락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

 “야스토모, 편지 다 버렸어?”

 “아니야, 안 버렸어, 나 아직 모아놨어.”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야? 너 지금 어디야?”

 “그것보다, 전에 있었던 분홍색 편지 좀 찾아줄래? 내가 지금 그 편지 때문에 죽을 거 같아서 그래.” 

 하야코가 있는 곳은 바람이 많이 부는 것 같았다. 하야코의 숨소리보다도 더 거친 바람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내게 전해졌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파악하지 못 하고 하야코가 죽는다는 소리에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숨을 참으면서, 하야코가 섣불리 끊지 못 하도록 계속 말을 걸면서, 엉망이 되어있는 책상서랍 속에서 하야코가 말한 편지들을 찾았다. 낙서된 교과서들과 찢어진 공책, 다 말라비틀어진 볼펜, 반이 통째로 부러져있는 육각연필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구석 언저리에 편지들이 담긴 종이상자가 보였다.

 “야스토모, 편지 찾았어?”

 “어, 어. 찾았어, 찾았으니까, 내가 거기 갈게, 내가 지금 가져갈게. 너 어디야? 지금 시내야?”

 “아니야 야스토모. 여기까지 안 가져와도 돼. 야스토모가 그거 읽었나, 궁금해서. 편지 읽었어?”

 하야코는 웃었다. 하야코가 웃자마자 통화가 힘들어질 정도로 바람이 크게 불었다.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아니야, 나 이거 안 읽었어. 처음 말곤 한 번도 읽어본 적 없어.

 “그러면 지금 편지 한 번만 나한테 읽어줘.”

 나는 상자 속에 가득 담겨있는 분홍색 편지들 중 맨 위에 놓여있는 편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밀봉이 되어있는 하트 스티커를 긁어 떼어내자 봉투보다 조금 옅은 색깔의 편지지가 드러났다. 나는 스피커를 켜고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양 손바닥에 식은땀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세 번 접혀있는 편지지를 펼치자, 여전히 삐뚤빼뚤하게 적혀있는 글씨가 보였다. 야스토모에게.


 “야스토모, 에게…….”

 “…….”

 “미안해…….”

 “…….”

 “이……. 편지…….”

 “내가 쓴 거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온 세상이 찌그러지는 것처럼 현기증이 느껴졌다. 

 “글씨를 너무 못 써서 좀 민망해서, 나는 못 읽겠어서.”

 야스토모에게. 

 “듣고 있어?”

 미안해.

 “내가 그냥 죽으면 야스토모는 언젠가 날 잊을 테니까, 그 편지 내가 썼다고 알려주고 싶었어.”

 레즈비언이라고 헛소문 퍼뜨려서. 

 “나 지금 야스토모네 자취방 옥상이야.”

 야스토모가 레즈비언 아닌 거 아는데, 너랑 나랑 둘만 남고 싶었어.

 “여기 너무 높아서 무서워.”

 내가 아플 때마다 네가 나를 챙겨주는 게 너무 좋았어.

 “그래도 나 죽으면.”

 내가 아플 때만 네가 내 것 같았어.

 “나 기억해줄거지?”

 이해해줄 수 있지?

 “안녕.”

 수화기 너머로 갯벌에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창문을 열지도 못 한 채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