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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야 전력 60분 - 책

알파카개틀링 2015. 5. 23. 01:57



 

 나는 밀수업자였고, 세건은 말을 하지 못 했다. 내가 코카인을 내밀면 세건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을 뿐이다. 누가 염색해주었는지 목덜미까지 얼룩덜룩하게 초록물이 들어서는, 말도 하지 못 하는 그 이가 반편이인지 벙어리인지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 했다. 나는 그와 같은 선실을 썼기에 꼬박꼬박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세건이 반편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그저 풍랑이 몰아칠 적 갑판을 하얗게 두드리는 파도에 머무르는 그 눈빛을 보고서야 아, 반편이는 반편이인데 정신이 없고 몸만 있어 반편이구나 싶었을 뿐이다.

 해경을 피해 꼬박 돌고 돈 일주일 중에 나흘 정도가 풍랑이 쳤다. 풍랑이 몰아쳤던 첫 날, 나는 세건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었다. 세건은 말을 하지 않았고, 내가 내민 싸구려 다이어리조차 받아들지 않았는데, 둘쨋날인가 내지를 북 찢어 한구석에 무언가를 썼다. How old are you? 혹시나 싶어 러시아 이름과 한국 이름을 모두 알려준 나는 무안해졌다.

 그리고 셋째날, 역시 풍랑이 쳤던 날이었다. 세건은 피투성이가 되어 선실 안으로 던져졌다. 파랗게 피멍이 든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던 나는 입술의 딱지를 쥐어뜯던 세건에게 그의 몫이 될 통행료를 쥐여주었다. 정신이 죽어도 몸은 살 수 있지만, 몸통이 죽으면 아무 것도 안 남아. 나는 몸만 남은 반편이를 그렇게 얼렀다. 가서 이거 주고 와. 그리고 이즈비니쩨, 하고 말하고 와. 세건은 돈을 내러 나가서는 그 날 밤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그의 이불까지 덮고서는 깊은 꿈을 꿨다.

 세건이 일그러진 이지로도 흠잡을 데 없이 통행료를 내고 돌아왔다는 것은 바로 다다음 날 알 수 있었다. 그 날 저녁, 비는 그쳤지만 선실은 여전히 격동하고 있었고, 나는 밀항선에 들어앉아 멀미도 질병도 아닐 터인 울렁거림을 하루종일 호소했었다. 

 침대에 누운 내가 앓는 소리를 내자, 주변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던 세건이 거리낌없이 내게 입을 맞춰왔다. 건조하고 빳빳한 입술이었는데, 전쟁터 특유의 화약냄새가 세건에게서 났다. 세건은 엔진만큼이나 뜨거운 혀로 나를 훑었다 금세 빠져나갔고, 나는 바다를 송곳으로 긁는 듯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세건을 강간했다.

 그래서 정의하자면, 나의 기억은 한 권의 책이다. 나는 세건을 강간한 뒤 내 항문을 씻어내며 먼 옛날 그 언젠가 내가 이와 유사한 일을 겪었던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내가 강간한 세건은 내가 강간하기도 전에 이미 내게 강간당해있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세건의 머리맡에 놓여져있던 책의 첫 번째 단원을 펼쳤다. 그 곳에서 나는 잔악무도한 레드마피아였고, 세건은 내게 신념의 별을 새겨주었던 문신사였다. 내가 세건을 강간하고 이 년이 지났을 때, 세건의 집은 항쟁에 휘말려 건물 채로 무너져내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 기절한 세건을 보았다. 그의 오른발엔 엄지발가락을 이어붙여 꿰맨 듯한 흉터가 있었다. 나는 잔해에 깔려 곤죽이 된 세건의 시체에 엄지발가락이 없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두 번째 단원은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나는 직장인이었고, 세건은 대학생이었다. 아파트 같은 라인 바로 옆 집에 살아 우리는 오며가며 인사를 자주 나눴다. 나는 가끔 월차를 내 세건과 데이트를 했고, 세건은 맥주를 들고 나의 집에 찾아와 나와 밤새 섹스를 했다. 그를 강간할 때 저절로 눈이 가던 턱 밑의 흉터가 이제야 눈에 띈다. 세건의 부모는 사업을 하느라 보증을 서는 일이 잦았는데, 세건이 대학교 3학년이 되던 바로 그 해에 집이 파산했다. 턱의 흔적을 보아하니 채권자들에게 쫓겨 행방불명 되었던 세건은 어딘가에서 목을 매었나 보다.

 세 번째 단원은 전쟁터가 배경이었다. 나와 그는 같은 반군부대에 속해있던 일종의 게릴라성 전우였는데, 세건은 수류탄을 투척하는 것을 싫어해서 자주 위기에 빠지곤 했다. 그러면 나는 세건의 몫인 수류탄까지 나의 것과 함께 던지고 그를 엄폐물 뒤에서 끌어냈다. 기나긴 전쟁의 끄트머리, 우리로서는 끄트머리였지만 아마 전체적으로는 중간의 어드메쯤 되었을 때, 우리 부대에서 우리 둘을 빼고 드디어 모두가 죽어버렸다. 나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적들의 군홧발 소리를 듣다가, 텅 빈 참호 속에서 세건에게 깊게 키스하고 권총으로 그를 쏴 죽인 뒤 자살했다. 세건의 이지가 어설픈 까닭은 아마 이때문일 것이다.

 나는 쉭쉭 숨을 내쉬는 세건의 머리맡에 앉아 책을 팔랑팔랑 넘겼다. 레드마피아, 직장인, 군인 그 외에도 수많은 직업과 삶을 살아온 나와 세건의 시간이 그 곳에 기록되어 있었다. 개중 몇 가지는 무척 평화롭거나 행복하거나 그저 그런 삶들이었지만 과정이 무난할 지언정 모두 결말은 좋지 않았다. 세건은 사람이나 자연, 가끔 스스로에게 살해당하기 일쑤였고 나는 그런 세건을 살해하거나 살해당하도록 방치하는 입장이었다.

 나는 책의 중간쯤을 펼쳐 밀수업자인 나의 삶을 읽어보았다. 내 삶이 적힌 기록들을 읽은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책에는 족히 이백 개는 되는 수많은 직업들의 내가 적혀 있었다. 이 책이 채워지다 말았다는 것은 내가 죽고 나서도 나는 또다시 태어나 세건과 만나고 그를 죽일 거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리고 세건은 앞으로도 차오르다 만 이지와, 수많은 살해의 흔적과, 그보다도 얼기설기 기워진 정신으로 억겁의 시간을 살아가겠지. 나는 책의 맨 끝을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아마 이 책을 만들면서 적었을 메모가 남아있었다. 죽여, 다시 태어나게. 어떠한 서명도 흔적도 없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최초의 내가 남긴 전언이고, 나는 그 당시와 이후의 생명 모두를 깎아 세건의 삶을 되살렸다는 것을. 이 수많은 기록들은 그의 업보이다. 그리고 이 수많은 살인들의 한구석에 내 이름이 적혀있는 까닭은, 아마도 나 또한 그의 업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절한 세건을 안아들었다. 그리고 그의 몸을 갑판 밖으로 내던졌다. 한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