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서린 : 안녕, 리림. ...어어, 나도 리림이지만. 음.
서린 : 네가 얼마만에 태어난 리림인지 알고 있어? 고든이나 우리 어머니나 또는 네 운명이나. 생후 22개월의 라이칸스로프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엔 또 너무 귀찮은데. 어차피 내 기억을 가져가게 된다면 다 알게 되는 거기도 하고...
서린 : 그래도 심심하니 이야기해볼까! 네 이름이...오, ---구나. 이름을 알았으면 통성명을 해야지, 나는 서린이야.
(아붑, 부부부, 부부 하는 어린 아이의 옹알이가 들린다)
서린 : 역시 아직 말을 못 하는걸까? 하긴, 내가 애를 키워봤어야 알지...
서린 : ---, ---, ---... 어감이 비슷하네, 우리 형이랑. 너는 외동이구나? 형도 없고 동생도 없고 쌍둥이도 아니고, 외롭겠다.
(서린은 아기와 노는 도중에도 가끔 고개를 돌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고급스러운 수트에 주름이 가는 것도 신경쓰지 않는 서린은 아기를 안고 만지고 만지는 손길에 서스럼이 없다.)
(아기는 서린이 안아주자 잠시 진정했다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서린은 인상을 찌푸리고 작게 외친다.)
베이런 : 우리는 서린의 의식과 마음을 이해했지만, 이해를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였어요.
베이런 : 서린은 살고 싶어 했죠. 그건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어려운 과제를 앞두고도 서린은 차분하게 모든 걸 해결하고, 또 적절한 방법으로 흡혈귀들을 지배했죠. 서린은, 좋은 왕이었어요. 낙천적이고, 부드럽고, 그러나 결코 부러지지 않는, 진정으로 살고 싶어하는 왕.
(베이런이 뒤를 돌자 서린은 아기를 내려놓는다. 제자리에 똑바로 서 있는 아기, 키가 조금 컸다.)
(베이런이 넥타이를 풀자 서린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서린은 그 자리에서 비녀를 빼고 긴 머리를 짧게 쳐버린다. 바닥에 흩어지는 서린의 머리카락.)
서린 : 성장이 끝났어도 머리카락은 기는구나.
(베이런은 주머니에서 붉은 넥타이를 꺼내 맨다. 역시나 촌스럽다.)
베이런 : 서린이 왕이 된 지 50년 만에 비스트가 죽었어요.
(베이런은 비통하게 읊조린다.)
베이런 : 서린이 왕이 된 지, 정확히 50년 만이었죠.
(서린은 가만히 서있고, 베이런은 고개를 숙인다. 서린의 뒤로 아이가 책을 가져와 읽는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지 않는 서린.)
아이 : 옛날옛날 한 옛날에......
(서린은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런 서린에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 전래동화책을 읽는 아이. 서린의 곁에 베이런이 다가온다.)
서린 : 아이러니해요, 베이런. 세건 형이 죽었는데, 그런 세건 형이 죽기 사흘 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는 게. 예지라는 건 무섭네요.
(베이런은 허리를 굽히고 서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야기한다.)
베이런 : 테트라 아낙스의 무게지.
서린 : 그래요, 테트라 아낙스의 무게. 안다는 건 끔찍해요. 알고 있는데, 알고 있어서 더 끔찍해. 테트라 아낙스는 신이 아니라는 것, 테트라 아낙스의 무게라는 것...
베이런 : 서린, 너는 할 수 있는 걸 모두 했어. 이건 그저...
(베이런은 머뭇거린다. 동화를 읽는 아이의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아이 : 마녀는 말했습니다. 오, 공주님! 저는 당신이 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베이런 :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진마들이 비스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어요.
서린 : 당연하죠, 세건 형은 멋진 사람이었으니까. 세건 형은...
(조명이 모두 꺼진다. 잠시 암전.)
서린 : 세건 형이니까.
(커튼이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간다. 하얗게 바뀐 무대.)
(하얗게 바뀐 무대 위에는 서 있는 서린과, 서린을 똑 닮은 남자 하나가 앉아 있다. 판초 우의를 두른 채 앉아 있는 남자는 새까만 시체를 하나 끌어 안고 있다. 남자의 무릎 위에 시체의 초록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다.)
서린 : 이사카.
이사카 : 롯시니.
(바람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린다. 이사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서린은 자리에 앉지 않는다. 수트를 입은 서린과 우의를 두른 이사카의 복장이 대조된다.)
이사카 : 나는 알고 있었어.
서린 : 형...
이사카 : 50년이면 오래 버텼지. 억지로 온갖 비술이 쑤셔박혀진 이 테러리스트나, 민간인처럼 살면서 억지로 수명줄을 길게 뽑아낸 나나.
(거친 말과는 다르게 시체를 쓰다듬는 이사카의 손짓은 조심스럽다. 서린이 손을 뻗고 다가오려 하자 이사카가 소리친다.)
이사카 : 오 분!
(이사카는 고개를 숙인다.)
이사카 : 죽을 때 죽더라도 네 앞에서 죽고 싶지 않아, 롯시니. 아니, 테트라 아낙스.
서린 : ...
이사카 : 너는 내가 너에게 가진 이 감정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겠지. 너나 나나, 결국은 체스판의 말이었지만 그래서 너는 더 살고 싶어 했어. 인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몰랐던 때에도, 그리고 테트라 아낙스가 되고 난 후에도.
서린 : ...
이사카 : 그리고 네가 살고 싶어 하는, 네가 삶에 대해 열망하고 있던 그만큼.
이사카 : 나는 죽고 싶었다.
(서린은 입술을 깨문다. 이사카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다.)
이사카 : 나는 너를 증오할 수 없어. 그 증오가 나를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고 해도, 나는 너를 비스트처럼 증오할 수 없어! 나는, 나는 이제 더이상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아...삶이란, 삶이라는 건, 살아간다는 건...
(서린은 울음을 터뜨리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이사카가 기침을 하는 순간 바닥에 핏덩어리가 떨어진다. 무대조명이 빨갛게 번지다가 꺼진다.)
(다시 켜진 조명. 여전히 무대 위에 핏덩어리가 떨어져있다. 이사카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한세건의 시체와 핏덩어리 하나만이 남았다. 무대 위에 홀로 남아있는 베이런. 은색 넥타이를 맸다.)
베이런 : 서린은 그 후 삼 일 동안 예지를 닫았어요. 잠들지도 않았죠. 물도, 음식도, 피도,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어요. 그저 서린은 인화해두었던 사진들만을 가만히 지켜보았죠.
(베이런은 품 속에서 사진 여러 장을 꺼낸다.)
베이런 : ...
(베이런은 한 장을 뺀 나머지 사진들을 다시 품 속으로 집어넣는다.)
베이런 : 서린의 여동생은 비스트가 죽기 10년 전에 이미 죽었어요. 서린은 그걸 막을 수 없었죠.
(베이런은 손에 쥐고 있던 사진을 찢어 떨어뜨렸다.)
베이런 :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어요. 그건 어쩔 수 없었던 거죠. 딱 거기까지가 그녀의 수명이었으니까.
(베이런은 품 속의 사진들을 꺼내 하나씩 모두 찢었다.)
베이런 : 아버지, 여동생......그리고 비스트와 이사카.
(베이런은 찢어진 사진조각들을 오른발로 치운다.)
베이런 : 비스트와 이사카는 서린에게도 각별했어요. 비스트는 서린이 군림하는 이유였고, 이사카는 그런 비스트가 그토록......
(쿵! 허고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진 서린이 비춰진다.)
베이런 : .......한 존재였으니까요.
(베이런은 쓰러진 서린을 침대 위로 옮긴다. 부지런히 침대 맡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가 무언가를 적어두는 베이런과, 누워서 잠을 자는 서린의 옆에 다섯 살쯤 된 것처럼 보이는 아이가 타이어 그네를 타고 있다. 누군가 밀어주지 않아도 혼자 그네를 잘 타고 있는 아이.)
서린 : ...
베이런 : 아, 깼어? 충격이 컸나보군.
서린 : 베이런.
베이런 : 그래.
서린 : ......이사카에 대해 봐 줘요.
(눈을 감는 베이런. 서린은 협탁 위에 올려져있는 비녀를 바라본다. 긴 머리의 서린.)
베이런 : ...
서린 : ...
베이런 : ...
서린 : ...바보같아.
(서린은 양 팔로 얼굴을 가렸다. 희미하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소매도 베개도 젖지 않는다.)
서린 : 끝까지...끝까지 그런 짓을 하고 갔어요...
베이런 : 서린.
서린 : 저는...이제 세건 형의 시체도, 이사카의 시체도 평생 볼 수 없어...천 년이라도, 만 년이라도...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을 잇는 서린. 괴로워보인다.)
서린 : 모두 내게 잔인해요. 엄마도, 아빠도, 영은이도, 세건 형도, 이사카마저도...다들 너무 잔인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다른 사람 다 그랬어도, 세건 형하고 이사카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베이런 : ...
서린 : 나는 그 둘이 그렇게 살았어도 아무 짓도 안 했어, 저는 정말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착하고 얌전한 서린으로 있었어요, 그 두 사람에게는, 그 둘에게는, 형들에게는...
베이런 : ...
서린 : 베이런, 저 어떡해요. 저 이제 어떡해요. 나는, 나는 이제 시간이 무서워. 시간이 이렇게나 무서운데, 그래도 살아가고 싶은 내가 시간보다 더 무서워...
(울먹이는 서린의 목소리 뒤로 타이어 그네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림. 아이의 웃는 소리와, 타이어 그네 소리가 교차되어 들리다가 암전. 그러나 타이어 그네 소리는 3초정도 더 들려온다.)
(조명이 켜지자 22개월쯤 된 아기를 긴 머리의 서린이 안고 있다. 서툴러보이는 폼이지만 아기는 용케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 있다. 서린은 어설픈 손길로 아이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서린 : 차, 착하지...? 울지 말자...? 울면 엄마가 깨니까...?
(넥타이를 매지 않은 베이런이 아기를 대신 받아든다. 베이런이 아기를 토닥이며 아기침대에 눕히러 가자, 서린이 앞을 바라본다. 긴 머리의 서린에게 스포트라이트.)
서린 : 시간이 무서운 건 잠시였어요.
(스포트라이트가 꺼졌다 켜진다. 짧은 갈색 머리의 서린.)
서린 : 시간에 대해서는 곧 무뎌졌죠. 하지만.
(스포트라이트가 꺼졌다 켜진다. 조금 긴 암갈색 머리의 서린.)
서린 : 시간에 무뎌지는 제 무딘 성정에는 무뎌질 수 없었어요.
(스포트라이트가 꺼졌다 켜진다. 날개뼈까지 오는 검은 머리의 서린.)
서린 : 제가 죽기 전까지 저는 제가 아끼는 두 사람의 죽음조차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아니, 아마 죽고 나서도 영영 알 수 없겠죠. 하지만
서린 : 저는 그 고통에도 점점 무뎌졌어요. 시간이란, 이 얼마나 끔찍하고 친절한지.
(스포트라이트가 꺼졌다 켜진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의 서린. 서린은 긴 머리를 틀어올려 비녀를 꽂는다.)
서린 : 구백 오십 년. 테트라 아낙스로 살아온 구백 오십 년 동안, 저는 차근차근 깎여나갔어요.
(비녀를 꽂은 서린이 허탈하게 웃는다.)
서린 : 빨랐죠, 릴리쓰의 예상보다.
(암전. 베이런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베이런 : 비스트가 죽은 지 구백 오십 년 후, 새 리림이 태어났어요. 점점 정신이 깎여나가고 있는 테트라 아낙스인 서린을 쓰러뜨리고, 새로이 완전해질 흡혈귀의 왕이.
(켜지지 않는 조명. 무대 위로 누군가 걸어나온다. 딱딱한 구두소리. 툭툭 수트를 터는 소리. 이내 아기용 장난감인 딸랑이 소리가 들리고, 아기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무대 위에 홀로 있는 갓난아기. 아기에게 스포트라이트. 나레이션이 들린다.)
베이런 : 우린 수 차례 리림을 죽이려고 시도했어요.
서린 : 테트라 아낙스는 저를 좋아했죠.
베이런 : 서린 이전에, 고든이 자주 했던 일이었으니까요. 익숙했어요, 리림살해.
(아기가 뒤척인다)
서린 : 알았지만 제지하지 않았어요.
베이런 : 서린은 모르는 척 했죠. 그러나 서린이 모르는 척 하는 만큼, 우리도 서린을 모르는 척 했죠.
서린 : 저는 실제로도 관심이 없었어요. 리림이나, 릴리쓰나. 그런 것들. 모두 의미 없게 되었으니까.
(뒤집기를 시도하는 아기.)
베이런 : 하지만 우리들은 리림을 죽이지 못 했어요.
서린 :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어요.
베이런 : 점점 자라나는 새 리림과 , 리림의 얼굴 위로 겹쳐지는 우리들의 왕.
서린 : 저는 저의 후계자가 될 리림을 보호했어요. 그들 몰래, 독단적으로.
(아기가 뒤집기를 성공하자, 환호와 박수소리가 들린다.)
베이런 : 그리고 우린 그때서야 깨달았죠. 역사상 가장 짧은 임기를 가질 흡혈귀의 왕, 월야의 지배자.
베이런 : 서린의 깊숙한 곳, 그의 자살충동을.
(암전)
(조명이 켜진다. 비어있는 서린의 침대와, 서린의 침대 옆에서 타이어 그네를 타고 있는 아이. 제법 큰 아이는 혼자 발을 구르며 그네를 타고 있다. 그런 아이의 뒤로 다가오는 짧은 검은 머리의 서린. 아이의 등을 몰래 밀어준다.)
아이 : 어?
서린 : 하하하!
아이 : 씨이, 깜짝 놀랐잖아!
서린 : 씨이? 형한테 씨이?
아이 : 떨어질 뻔 했단 말이야!
서린 : 떨어지면 형이 잡아주면 되지!
아이 : 형은 무슨 운동선수야? 앞으로 넘어지는데 그걸 어떻게 형이 잡아!
서린 : 형은 가능해. 이 형아는 전지전능하거든? 서린 형님~ 하고 부르면, 이 형이 뭐든지 다 이루어줄게.
아이 : 안 믿거든? 거짓말 좀 그만 할래?
서린 : 어어, 진짜라니까? 왜 형 말을 못 믿어 읏차!
아이 : 어, 어, 어, 형 너무 높아!
(떨어지는 아이를 받아드는 서린. 구김없이 웃는다. 양쪽 눈 색깔이 달라서 놀랄 법 한데도 아이는 서린의 붉은 눈을 피하지 않는다. 나레이션.)
서린 : 릴리쓰고 리림이고, 그런 건 이제 저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어요. 제가 사랑했던 사람들, 제가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랑하고 미워했던 두 사람이 릴리쓰였고, 리림이었으니까. 그런 게 이제와서 무슨 의미인가 싶어졌어요.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어요. 그저 제가 바라는 건, 이 아이가 15년, 아니 10년, 그것도 아니면 5년...가까운 미래에 제게 줄 깊은 잠이, 제발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이었으면 하는 거죠.
(아이가 서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고개를 흔들며 아이의 손길에서 벗어난 서린이 웃으며 아이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비쥬와 같은 소리가 촉, 촉 울려퍼진다.)
아이 : 형, 어디 가?
서린 : 아니, 어디 안 가.
아이 : 근데 오늘 왜 그래?
서린 : 어디 안 가는데, 할 일이 있어서 이제 잘 못 올 것 같거든.
아이 : 그래? 무슨 할 일?
서린 : 음... 형이랑 친한 다른 형들이랑 같이 살기로 했는데, 집 구하는 게 좀 어려워서.
아이 : 형 돈 많잖아
서린 : 돈으로는~ 구할 수 없는~ 그런 거라서요~
(서린은 아이를 고쳐 안고 아이의 얼굴에 뺨을 비빈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서로 비벼지고 ,이내 서린은 아이를 내려 놓는다. 타이어 그네를 뒤로 하고 바닥에 내러 선 아이가 서린을 올려다보자 서린은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아이와 시선을 맞춘다.)
아이 : 그럼 형 언제 와?
서린 : 한...십 년 뒤?
아이 : 십 년 씩이나?
서린 : 형이 할 일이 많으니까, 오래 살아야 할 집이니까 꼼꼼하게 봐야겠지?
아이 : 으응...
서린 : 형이 인심썼다, 5년!
아이 : 5년?
서린 : 형이 5년 뒤에 여기 올께. 형이 먼저 ---에게 안 찾아오면, 네가 5년 뒤에 형한테 먼저 찾아와야 돼?
아이 : 응!
서린 : 우리 ---는 착하기도 하지.
서린 : 형이 꼭 먼저 여기 올게.
서린 : 형이 먼저 안 오면...
서린 : 네가 꼭 형 찾아줘야 해?
서린 : 5년이야, 알았지?
서린 : 5년이야...
서린 : 5년...
서린 : ...
서린 : ...
(암전)
(커튼이 올라가자 비어있는 아기침대가 보인다. 아기침대 밑에 중학교 과정 교과서와 볼펜, 테이프 등이 쏟아져있다. 비어있는 아기침대를 향해 딸랑이를 집어들고 흔드는 서린의 짧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서린의 옆에서 베이런이 걸어나온다. 서린은 딸랑이를 내려놓고 교과서와 테이프 볼펜 등을 줍기 시작한다. 베이런이 그런 서린을 가만히 바라보다 앞을 향한다. 베이런의 검은 정장, 검은 넥타이.)
베이런 : 정확히 5년이었어요.
(조명이 꺼졌다가 베이런에게 스포트라이트. 긴 머리카락의 서린이 아기침대 옆에 쓰러져있다.)
베이런 : 그 약속을 한 정확히 바로 5년 뒤에 서린은 자살했어요. 새 리림의 앞, 자신의 후계자 앞에서, 그에게 모든 지식과 기억을 건네주기 위해.
(베이런은 서린의 시체를 돌아본다. 서린이 잘랐던 머리카락들처럼 흐트러져있는 긴 머리카락.)
베이런 : 과정이야 어떻든, 그의 마지막은 테트라 아낙스였어요. 죽어가며 자신의 지식을 전해주는 그 집착, 그 오기... 새 리림은 자신이 테트라 아낙스가 되었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지했어요. 그런 점은 꼭 서린과 닮았었죠.
(베이런은 입술을 깨문다.)
베이런 : 그렇지만 그는, 새로운 테트라 아낙스는 비스트와 이사카의 존재에 대한 지식 자체가 없었어요. 비스트와 이사카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유일한 흡혈귀가 사라졌으니, 그 둘에 대한 이야기나 소식, 소문들은 결국 완전히 마모되고 잊혀지고 사라져가겠죠.
베이런 : ...
베이런 : 서린이, 서린은, 서린은 이런 걸 원했을까요?
베이런 : 그 둘의 삶과 죽음, 그라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삶과 죽음 자체도 잊혀지기를?
베이런 : ...
베이런 : ...
베이런 : ...
베이런 : ...
베이런 : ...
베이런 : 서린은, 구백 오십 년을 버텼어요. 그 둘에 대한 분노와,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로. 어떤 의미로, 증오는 진정으로 삶을 잇고 끊는 감정이라 하겠죠. 비스트가 그랬고, 이사카가 그랬듯이. 서린 또한 증오로 매듭을 지었어요.
베이런 : ...
베이런 : ...
베이런 : ...
베이런 : 이제 다시 가보겠습니다, ---. 아니, 테트라 아낙스. 이게 바로 당신이 태어난 이유. 그리고 당신이 태어나기 전, 천 년의 이야기예요.
(암전. 베이런이 구둣발 소리와 함께 퇴장하고 커튼이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