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에 관하여
"아르곤, 몇 살이에요?"
"글쎄, 최소한 몇 백 년은 넘었지."
"그럼 어른이네요?"
"어른일까?"
"어른이죠."
"우리 테트라 아낙스 님께서 어른이라면 어른인 거겠지. 그런데 나이는 왜 물어봐? 새삼스럽다."
"저도 어른이거든요."
"흐음."
"우리 형 기억해요?"
"형?"
"서현이요. 이사카 베르게네프."
"음, 기억해. 아, 기억나. 회색 머리에 파란 눈?"
"붉은 눈도요."
"음음, 기억이 나. 몇 번 부딪혔던 기억은 나는데."
"얼마 전에 예지를 봤거든요."
"앗, 대박주식 가르쳐주려고?"
"아뇨, 그런 거 아니고. 아 진짜 자꾸 그렇게 돈 좀 밝히지 좀 마요. 어쨌거나 예지를 봤는데."
"어."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요, 형이. 형이 언제 죽었었나 싶어서."
"어차피 오래 못 살 운명이긴 했지."
"제가 그 말 진짜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굳이 또 찝어서 말하네요?"
"감춰봤자 뭐 더 좋아지는 게 아니니까."
"되게 얄밉다."
"그 이사카 베르게네프가 왜?"
"기왕이면 서현이라고 불러줄래요? 그 편이 듣기 좋으니까."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서현이 왜?"
"서현 형이 언제 죽었던가 가물가물해져서 눈을 감고 기억을 뒤져봤는데."
"……."
"죽은 건 알겠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 거에요."
"어떻게 죽었는지?"
"아뇨, 언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억이 나는데."
"언제, 아니 어떻게, 아니 언제, 아, 아 어쨌든 자세한 게 기억이 안 나요."
"이상하죠, 세건 형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억이 나는데."
"뭐,그럴 수도 있지. 너무 충격이 크면 잊어버릴 수도 있다고 하잖아."
"잊을 리가 없잖아요, 저는 흡혈귀인데."
"반은 라이칸스로프고."
"……."
"그렇지?"
"그렇죠."
"응, 계속 해 봐."
"기억을 더듬다가 제가 어렸을 때까지 갔거든요."
"……."
"어렸을 때 엄마가 밀어주는 그네도 탔고, 이사카가 엄마를 죽이는 장면도 기억이 나고, 이사카가 내 머리에 손을 얹어서 기억을 지운 뒤 한국으로 보낸 것도 기억이 나고."
"제 이름이 서 린이잖아요. 서 씨 성에 이름이 린. 한문은 저도 모르겠네요, 물어본 적이 없어서. 한자 이름이 맞는 걸까. 아니면 순우리말 이름일까."
"어쨌든 저한테 서린이라고 한국 이름을 붙여준 아버지도 기억이 나고, 아침마다 신문배달을 했다던가 가난해서 야한 잡지 하나도 못 사고 못 봤다던가, 세건 형이 구해준 일이라던가, 팔다리가 잘려서 죽을 뻔 했다던가, 제 친구를 제 손으로 죽였다던가."
"이사카, 엄마, 아버지, 영은이, 혁진이, 세건 형……."
"답지 않게 오늘 감성적이네, 서린."
"사춘기니까요."
"성인이 된 지는 한참이 지났는데도?"
"저는 언제나 감수성 풍부한 소년이거든요, 몸도 마음도."
"그래, 그렇다고 해 주지. 내 클랜에도 너처럼 혈기왕성한 클랜원들이 몇몇 있거든."
"어제 제 삶을 책처럼 한 번 읽어봤는데."
"흐음."
"재밌더라구요. 출생의 비밀, 굴곡진 삶, 쟁취한 부귀공명. 제가 학교 다닐 때 있던 대여점 이런 곳에 한 권 쯤은 있을 법한 판타지 소설 같고."
"글쎄, 지금 네가 가진 게 부귀공명일까?"
"글쎄요, 부귀공명일까요?"
"뭐, 난 지금 내 위치가 좋아서 딱히 테트라 아낙스가 얼마나 더 좋은지 모르겠어."
"저도 지금의 제 위치가 좋긴 하지만 딱히 테트라 아낙스가 뭐가 더 좋은지 모르겠어요."
"재미있네."
"재미있죠."
"오래오래 살려면 사소한 것도 재미있어야죠, 그래야죠."
"그렇지, 맞아. 맞는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은 다 제가 사랑한, 사랑했던 사람들인 거잖아요?"
"흠."
"그러니까 제 기억과 인생……."
"……."
"……."
"인생이라고 말해도 돼."
"고마워요. 어쨌거나 제 기억과 인생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니까."
"그 시간이 얼마나 흘렀건 간에?"
"맞아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건 간에."
"아르곤,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해 본 적 있어요?"
"나? 나는 딱히 그런 거에 흥미가 없어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요?"
"그닥? 나는, 그러니까, 책도 좋아하긴 하는데……음……."
"무식하다고 놀리지 않을게요."
"야."
"농담이에요."
"나야 뭐, 책도 좋아하긴 하는데 기왕이면 나는 책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편이 더 좋아."
"칼이라거나."
"격투기라거나."
"잘 아네."
"오래 봤잖아요? 우리."
"그렇지, 오래 봤지."
"그리고 전 아카식 레코드와 여전히."
"연결되어있으니까."
"아르곤 취향 같은 건 뻔하죠. 굳이 레코드에 접속할 필요도 없이 저는 알 수 있어요, 잊지 않으니까. 우리 이번에 사업 확장하고 식품부에서 신제품 개발 중인데 씹어볼래요? 딸기맛이에요."
"아, 딸기맛 말고 다른 건 없어?"
"소다맛?"
"키스맛."
"웃기는 얘기네요."
"그렇지? 회심의 개그였어."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그런 개그 치지 마세요, 신고당하겠다."
"국적이 있어야 처벌을 받지."
"국적이 있어야 출국도 하구요."
"음. 내가 졌어. 계속해."
"그래요. 아카식 레코드라는 게, 사실 그렇게 대단한 존재는 아니더라구요."
"이를테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라던가."
"아, 옛날 옛적에 불탔지 그거."
"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에요."
"고물이라고?"
"하나도 쓸모없는."
"어떤 의미에서?"
"굳이 비유하자면."
"그 어떤 자연재해도."
"선천적인 장애아는 구원해주지 못 한다는 점이."
"……."
"……."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 것 같은데 일어나도 돼?"
"아뇨, 안 돼요."
"왜?"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르곤 당신한테 비즈니스적 측면에서 사업 상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서거든요."
"나한테 칼자루를 쥐여주시주겠다?"
"그런 셈이에요."
"못 믿겠는데."
"정말요?"
"못 믿겠어."
"왜요?"
"테트라 아낙스가 자기 자신의 약점같은 걸 공개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저는 가능해요."
"네가 테트라 아낙스잖아?"
"그리고 서린이죠."
"……."
"저는, 아마 얼마 전에도 당신한테 제 약점을 알려줬었던 것 같은데요."
"얼마 전이 아니야, 한참이 지났지."
"어쨌든간에요. 저한테는 얼마 전이에요."
"기억나지 않는다며?"
"제가 했던 사랑들에 관해서만."
"그러고보니 한국에 간 지 오래됐네요, 아버지 산소에도 들러야 하는데."
"……."
"들을래요?"
"그러지."
"기분이 좋지는 않아보여요."
"말 돌리지 마."
"원래 협상에는 가벼운 농담과 웃음이 필요한 법이잖아요."
"웃어요."
"……."
"제가 요즘 괴로운, 아. 이런 표현 이해해주실거죠?"
"제가 괴로워봤자 중증 우울증 환자들보다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괴로운 건 괴로운 거라구요."
"……."
"있죠, 아르곤."
"그래, 서린."
"저, 사실 되게 다정한 사람이거든요."
"맞아, 넌 정이 많아."
"다정하고, 다감하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강하고, 똑똑하고, 돈도 많아, 몸도 좋아, 잘생겼어, 능력있어, 아메리칸, 음, 코리안 스윗하트. 저한테 딱 어울리는 말이잖아요?"
"……."
"엄마는 저를 강하게 낳으셨대요. 몇 백 년, 몇 천 년을 살아도 정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대단한 여자야."
"대단한 여자죠."
"마저 얘기 해 봐."
"그러니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여기, 여기에 정신에 금이 갈 건덕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무슨 뜻이야?"
"저는 절대, 절대, 절대."
"무너질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
"슬픔, 외로움, 괴로움, 절망, 좌절, 우울, 비하……. 이런 것들은 제게 영향을 끼칠 수가 없어요."
"말하자면, 거세가 된 채 태어난 거죠."
"정신적인, 뭐라고 해야 할까, 정신적인 고통들을 마음 깊이 누릴……."
"권리?"
"네, 권리. 권리. 권리란 말이 딱이네요."
"마음에 들어요, 권리. 마음에 드는 말이에요."
"그렇죠. 정신적인 고통들을 마음 깊이 진심으로 누릴 권리와 자격이, 저는 아예 없는 거에요 태생부터."
"과장이 아닐까."
"저는 알아요."
"남들은 몰라도."
"저는 알아요."
"저니까."
"그런데 너는 지금 괴로워하고 있잖아?"
"그게 문제에요."
"제가 괴로워하는 것 같아 보여요?"
"무척."
"근데 아니거든요."
"저는 괴로워야 하는데, 괴롭지가 않아요."
"……."
"도서관에서 책을, 책을 한 권 뽑아서 무덤덤하게 읽는 것 같아요."
"친형의 죽음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몹시 괴롭고 힘들어야 할 일이잖아요?"
"친형의 죽음이 기억나지 않는 주인공은 괴롭고 슬프고 힘들어야 하죠, 그토록 아꼈는데."
"아꼈어?"
"아꼈어요."
"혈육이니까요, 저와 오래 있어준."
"하긴, 인간의 생은 짧으니까."
"그 한세건도 오래가지 못 했지."
"그렇죠."
"……."
"그런데 갑자기, 죽음들이 되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다가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는데."
"……."
"뭐라고 해야 할까요."
"뭐라고 해야 하죠……?"
"이걸 뭐라고 해야 해요?"
"굳이 정의하지 않아도 괜찮잖아."
"아뇨, 저는 정의해야 해요. 저는 테트라 아낙스니까."
"저는 테트라 아낙스잖아요."
"저는 세계의 정보와 생명의 감각을 전산처리 해야 하는 테트라 아낙스잖아요."
"정의하지 않으면 전산할 수 없어요."
"정의되지 않으면 전산될 수 없고요."
"저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는 법을 알아야 해요."
"이름이 붙여진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요."
"그게 테트라 아낙스에요."
"어렵네."
"어려워요."
"어려워서 미칠 것 같아요."
"너무너무 어려워서, 가끔 울고 싶어요."
"눈물이 안 나오지."
"눈물이 안 나와요."
"아르곤, 생각해봐요. 인간의 언어는, 너무 작고 얕아. 인간의 언어는 너무 작고, 얕고, 가늘고, 마르고, 나약해."
"당신은, 아르곤은 필요에 의한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난 그렇게 어려운 거 몰라."
"그럼 필요에 의한 사랑과 욕구에 의한 사랑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동등하게 불려야 한다는 언어의 약속에는 동의할 수 있어요?"
"어려운걸."
"필요에 의한 사랑과 욕구에 의한 사랑과 어쩔 수 없는 사랑도 언어라는 명목 하에 동등하게 사랑이라 이름붙이는 인류와 정신과 도덕과 역사의 약속에는 동의할 수 있어요?"
"……."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해요. 어머니는 저를 사랑했죠, 필요에 의한 사랑이어도. 저는 그걸 따뜻하게 느꼈고요."
"이사카도 저를 사랑했어요, 혈육을 아끼고자 하는 욕구에 의한 사랑으로."
"흡혈귀들이 저를 사랑했죠, 굴종하는 본능을 이기지 못 해 어찌할 수 없는 사랑으로."
"저는 다정한……."
"사람."
"사람이죠."
"다감하고."
"사랑스러워요."
"귀엽기도 하고."
"강하죠."
"많이."
"똑똑하기도 해."
"돈도 많지, 테트라 아낙스 님."
"몸도 좋아요."
"아직 어린 애 몸이지만."
"그리고 전 잘생겼어요."
"능력도 있어."
"하하, 민망해."
"코리안 스윗하트, 왜, 좋잖아?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그래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
"그래서 당신을 불렀어요, 사람이었던 서린을 아는 사람."
"성기가 거세된 사람도 성욕은 느끼잖아요."
"우울이 거세된 사람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도,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고통을 누리는 법을 몰라."
"저는 아무런 일이 없어도 행복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행복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도와달라는 거에요, 비즈니스."
"비즈니스?"
"비즈니스."
"구체적으로 뭘 할 건데?"
"가끔 손을 잡아줘요."
"차가운데?"
"차가워도요."
"그리고 가끔 눈을 마주쳐줘요."
"음, 나는 좋아해, 오드아이."
"저도 좋아해요 제 눈."
"그리고?"
"비쥬해줄래요?"
"나쁘지 않지."
"이마를 마주해줘요, 우리 형처럼."
"음."
"세건 형이랑 스파링했을 때처럼 나랑 가끔 대련해요."
"재밌겠네."
"지루하진 않게 해줄게요."
"가끔 와서 술상대도 해줄래요?"
"피도 탈 거야?"
"당신 거에는 안 탈게요."
"그럼 좋아."
"그리고 하룻밤 자고 가요."
"내 방에서."
"……."
"싫어요?"
"그게 어떤 의민데?"
"비즈니스는 사업이잖아요."
"그렇지."
"비즈니스는 어른들의 일이죠."
"근데 내 눈에 지금의 테트라 아낙스는 아직 한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라."
"개는 한 살만 되어도 어른인데요."
"아 방금 농담, 그거 내 취향 아니었어."
"미안해요."
"그리고 오해하지 말아요."
"농담 아니었어요."
"나도 절반은 개니까."
"어른끼리만 할 수 있는 일을 같이 하자고 했잖아요?"
"……."
"협력요청을 하는 거에요, 비즈니스, 사업 상의 협력요청을."
"그러니까 저랑 해요, 아르곤."
"뭐를?"
"개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