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연성 정리
"이상하게 네가 운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라이칸스로프도 우는 걸 왜 너는 못 우냐?"
"인간도 못 우는데 라이칸스로프가 우는 건 안 이상하고?"
"질문에 질문으로 받아치는 거 너무한 거 아니야? 난 아직 한국말이 서투르다고."
"억양만 들어보면 아주 그냥 한국인인데."
"이건 꾸준한 훈련을 통해 얻은 언어능력이야. 이래뵈도 왕자니까."
"그래 네 살에 지 애미를 죽인 그 잘난 왕자 말이지."
"너 가끔 보면 정도를 모른다?"
"정도를 알았으면 애초에 여기 있지도 않았어, 개자식아."
"하긴, 그건 그래. 제정신이었다면 여기서 못 버티지."
"……."
"야, 나 궁금한 거 있는데."
"그냥 궁금한 채로 있어."
"아니 별 건 아니고."
"뭐."
"너 사랑니 빼 본 적 있어?"
"……."
"있어?"
"대답해주기 싫어."
"그러지 말고. 우리 섹스했잖아."
"항문성교한 게 자랑이야?"
"사랑니 뺀 것도 자랑이고?"
"……."
"그래서 뺐어?"
"뺐어."
"그냥 뺐다고 하면 되지 왜 대답을 안 하냐. 너 가끔 보면 진짜 이상해."
"네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주기 싫은데?"
"와 성격 진짜 저질."
"빼 준 여자가."
"응."
"러시아 사람이라."
"……."
"……."
"배고프다."
"……."
"너 사랑니 뺄 때 울었냐?"
"마취해서 몰라."
"비스트는……낭만이라는 걸……모른다……."
"일기장에 쓰는 척 하지 마라."
"섬세한 사춘기 소년의 감성을 무시하지 마."
"언제는 왕자라며?"
"왕자도 사춘기 소년이거든? 아주 섬세하고 유리같은."
"지랄떠네."
"야."
"왜."
"우리 다음부턴."
"어."
"좀 더 거칠게 섹스해보자. 아주 펑펑 울도록."
"싫어."
"왜?"
"개새끼 우는 거 꼴보기 싫어서."
다른 사람이랑 손 잡아본 적 있냐고? 드디어 나에 대해 궁금해진 건가 당신? 아, 농담. 한 5퍼센트는 진담.
손, 손이라……. 어렸을 땐 많이 잡았지. 이제 겨우 허리에나 올 법한 어린 애가 손을 잡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이 약해지거든. 특히 신참 병사들은 더 그래. 갓 전장에 투입된 햇병아리같은 놈들은, 훈련도 책과 인형으로만 받고 군기에 바싹 쫄아서 이도저도 못 하는 놈들이 대부분이거든. 그런 놈들한테 손을 뻗어서 '아저씨, 살려주세요.' 하고 혀 짧은 소리만 내면 대부분은 그 뻣뻣한 긴장을 살짝 풀더군. 그럼 그 때 콱. 배가 고플 때 많이 이용했지.왜, 내가 당신도 먹을 것 같아서? 한 번 먹은 거 두 번 안 먹는다는 보장이 없어서? 사실 나도 그렇긴 한데, 당신 맛있으니까. 내가 당신을 언제 한 입 더 먹을지 모르기는 한데, 음, 그래도 섹스 중에 왜 깍지를 꼈냐고 설명해주는 건 나로서도 좀…….
세건은 방수포 위에 혼자 누울 때면 가끔 시베리아를 떠올렸다. 흡혈귀보단 더위가 낫고, 더위보다는 추위가 낫고, 추위보다는 차라리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낫고, 온 세상이 비에 잔뜩 젖는 것보다 자기 자신만 젖는 것이 훨씬 나았다. 주제에 호불호도 가린다며 세건은 허하게 웃었다. 살갗을 에던 살벌한 추위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러시아의 그 건조함, 풀포기 대신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은 침엽수, 그리고 창백하게 질린 것 같은 공기 속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것처럼 파랗게 녹아내리는 달. 마약이 빚어낸 끔찍한 시야 속에서도 시베리아의 새하얀 벌판은 그렇게도 이뻤다.
잠을 자야지. 잠을 자야 내일 움직이지. 세건이 뒤척이며 눈을 감자 어두운 시야 속에서 서현의 눈동자가 깜빡였다.이미 알고 있잖아? 이르쿠츠크.
세건의 눈 속에서, 세건의 어둠 속에서, 눈동자와 속눈썹밖에 없는 서현이 속삭였다.
우리 집에는 눈이 많이 왔거든. 그래도 미적인 면에서는 좋아했어, 그 집. 고작해야 4년 살았지만. 눈이 오면 예뻤거든. 하얗고 까맣게.
서현의 새하얀 속눈썹 위에 눈이 쌓였다. 서현의 눈 위에 눈이 쌓인다.
너는?
서현이 눈꺼풀을 깜빡여 눈을 털어냈다.
너는, 니네 집 좋아했어?
세건은 어둠 속에서 속삭였다.
어……. 좋아했어…….
생각을 해 봐, 이 멍청아. 삶의 진화에는 대부분 커다란 계기가 있었어.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던가, 더운 지방에서 오래 살게 되었다던가, 말보다 염소가 쓸모있어졌다던가, 양의 털을 깎아서 실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던가, 술을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다던가. 그리고 계기가 있으면 규칙도 있었지. 따뜻한 옷을 입을 것, 햇빛을 가리는 긴 옷을 입을 것, 염소를 지킬 개를 키울 것, 양의 털을 규칙적으로 깎아줄 것, 식량을 모두 술로 만들지 말 것. 그러니까 너랑 나 사이에도 규칙이 필요한 거야. 내가 널 좋아하는 것이 계기라면, 너는 날 모르는 척 하고 꾸준히 살해협박을 해야 하는 게 규칙이라는 거지. 알아듣겠어, 한세건?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개인적으로 나 그 능력, 되게 좋아해."
"나랑 당신이 처음 만났을 때 당신 뒤에 있던 거.""유다였나."
"그게 마음에 들더라고, 까맣고 단단하고 길고 살짝 성스럽기까지 한……."
"야 총 내려. 음담패설 아니거든?"
"나를 도대체 뭘로 보는 거야? 당신이 좀 이상한 거 아니야? 20대 성인남성이 팔팔한 건 알겠는데 자꾸 그런 식으로 사고가 튀면 나로서도 감당이 좀 힘들!"
"……."
"……."
"이젠 재생하는데도 시간이 좀 걸리네. 당신 지금 내가 재생하는 거 재미있어하고 있지?"
"매번 느끼는 건데 성격 진짜 나쁘다니까."
"나도 쓸 수는 있어. 근데 굳이 지금 당장 담배를 피울 필요성은 못 느끼겠거든?"
"걔는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차륵차륵 시끄럽기만 하고."
"……."
"너 그거 알아?"
"너 옛날 얘기 잘 하지도 않는데, 옛날 얘기 할 때마다 이상한 눈 해. 기분나빠."
"난 우리 엄마 죽인 거 별로 신경 안 쓰는데."
"아, 그랬지 참."
"……."
"……."
"야."
"섹스할래?"
"아니면 대딸?"
"나 가끔 네가 인간인 거 느낄 때마다 네가 진짜 섹시하게 느껴지더라."
"나는 그런 거에 안 매여있는데 너는 진짜 지긋지긋할 정도로 매여있어서."
"주제에 인간이구나 싶은 게 가끔 진짜 섹시해."
처음 엄마를 핥아보았던 건 태어난 직후였다. 사실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잇몸에 씹히는 것이 젖꼭지가 맞는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한 기억 뿐이다.
그 다음으로 핥았던 것은 손가락이었다. 나는 두 살까지 내 엄지손가락을 빨았고, 롯시니는 그런 나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빨기 시작했다.롯시니는 여섯 살까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었다. 정확히는 태어난 지 만 6년하고도 삼 개월 정도였다. 어느 날 눈을 감았을 때, 손가락을 빨지 않고 있는 롯시니의 모습이 보인 것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 때 손가락 대신 다른 사람의 살을 빨았고, 가끔 그것을 씹은 적도 있었다.
일곱 살 때 이갈이를 시작했던가. 옴폭하게 파여 있던 앞니 구멍은 다소 어색했지만 익숙해지기도 전에 금방 속이 채워졌다. 나는 이갈이에 두 시간을 소모했고, 롯시니는 모든 유치를 빼는 것에 일 년이 걸렸다.
"너도 그런 거 했었어? 막 이빨요정 같은 거."
한세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기억 안 나는데. 세건이 다시 고개를 가까이 하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궁금해. 너도 유치가 있던 시절이 있었나?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치며 세건은 답했다.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하던 거나 마저 하자고, 너저분하게 질질 끌지 말고.
나는 한세건과 입을 맞췄다. 그의 혀가 내 입술을 핥다가 가르고 다시 뱉은 다음 이내 내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 파고 들어왔다.
나는 구역질을 하며 그를 뱉어내는 대신, 나도 한세건의 고른 치열을 내 살로 더듬었다. 한세건에게도 구멍이 났던 적이 있을 것이다. 한세건도 젖꼭지를 물고, 젖꼭지에서 엄지손가락으로 넘어갔던 시절이 있었겠지. 손가락 대신 블럭을 빨게 되고, 이내 아무 것도 빨지 않게 되었을 때 잇몸이 딱딱한 것을 내보냈을 적이면, 한세건은 이가 다시 날 때까지 며칠이고 입 속의 구멍을 빨았을 것이다.
나는 키스가 끝나자 지퍼를 내리는 세건에게 말했다. 야, 그거 알아? 나도 이갈이 했었다?
어쩌라고.
한세건은 나를 비웃었지만, 나는 그런 그를 비웃지 않았다.
서현이 강가를 걷고 있었다. 이제 막 눈이 녹기 시작하는 봄에는 곰들이 먹이를 찾으러 강에 나왔다. 서린은 새끼가 딸린 곰이 무서워 서현을 졸라 함께 강에 나왔다. 얼음이 녹고 강이 사는 러시아의 봄, 시베리아의 여름.
서현은 물에 닳아 동글동글해진 돌멩이들을 발로 걷어차고 서린을 향해 뛰어갔다. 이샤! 나 물고기 잡았어! 조약돌만한 두 손을 모은 서린은 쥐똥만한 잡어를 양 손에 가두고 있었다. 이샤! 물고기! 작아! 서린은 물방울이 튀도록 까르르 웃다가, 저멀리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물고기를 팽개치고 뒤뚱뒤뚱 뛰어간다. 이샤! 저기 엄마야! 이샤!
서현이 세건의 팔뚝을 잡아챘다. 세건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감추지 않고 있다. 뭐야. 왜 또.
"야 한세건 우리, 여름되면."
지금이 여름이야. 세건이 이불을 밀어내며 마저 움직였다. 서현은 시야가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온 몸을 감쌌던 건조한 공기가 급하게 달아오르고, 눈이 녹은 촘촘한 침엽수림에 불이 붙었다. 아, 뜨거워, 아, 너무 좋아, 아, 따뜻해, 아, 아.
서현은 세건의 어깨에 코를 박았다.그리고 입술을 살갗에 비벼대며 세건이 뿜어대는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뜨겁고, 눅눅하고, 축축하고, 끈적하게 가라앉는 물기. 세건의 살에서 살비린내가 풍긴다.
응, 여름이야, 으응, 여름이야, 흐, 여름, 아, 여름. 어떡해, 너무 좋아. 오늘이 몇 월인지 기억도 안 날만큼 너무 좋아.
아, 여름. 그 옛날 시베리아의 봄. 내 동생이 건져올린 그 한 줌의 냄새. 한세건에게서 한여름의 냄새가 났다.
"야 한세건. 내가 여덟 살 때 뭐 했는지 아냐?"
"나, 몰래몰래 정교회 건물에 들어가서 예배를 봤어.""그 땐 신을 사랑했거든."
"근데 모자이크를 보고 아 내가 신을 사랑하는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신이 너무 징그러워졌어."
"야훼는 사람에게 빚을 주는 사채업자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빚을 떠넘기고 저주를 퍼붓지. 너희는 모두 죄인이다. 내가 너희를 사하여 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리라."
"사랑이란 게 그런 거더라고. 상대방한테 저주를 퍼붓는 거."
"그러니까 신하고 나는 쌍방연애 중인거야. 나도 신을 저주하고, 신도 나를 저주하지. 나는 네가 아니라 신하고 연애를 한 거라니까?"
"야."
"나 너한테 빚지웠다? 기억하지?"
"그리고 너한테 저주도 할거야 지금."
"넌 내가 죽고 나서도 날 절대 잊지 못 할걸. 지옥에 떨어져서도 날 절대 잊지 못 할 거야."
"왜냐면 넌 빚 갚으러 나한테 다시 와야 하니까."
"내가 지금, 너 사채썼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나 지금 죽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 너한테 빚지운거야."
"그리고 저주도 한 거야."
"빚 갚으러 와라 꼭?"
아빠, 엄마, 형, 잔다르크.
다 뒈졌어. 한세건은 컴퓨터를 조립하다 말고 뒤돌아 말을 이었다. 이런 거 왜 물어보는데? 사진? 개새끼야 언제 그걸 또 꺼내봤는데? 뭐? 어제? 아, 젠장. 잊어라. 그건 실수였어. 나도 실수를 하는데 그게 뭐 어쨌다고.서현은 그런 세건을 내려다보았다. 세건의 눈 속에는 장작없이도 타오르는 시퍼런 불이 있다. 그것은 때때로 세건을 좀먹기도 하고, 세건의 껍데기에 달라붙어 세건을 빛내기도 한다. 서현은 세건을 내려다보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미친 새끼야 얌전히 안 앉아? 먼지날려! 신경질적인 고함이 그 뒤를 이었지만 서현은 세건의 앞까지 엉덩이를 끌고 갔다.
나.
서현은 입술을 한 번 핥고 입을 열었다.
롯시니.
푸틴.
뭐?
그리즐리베어야. 내가 이름을 푸틴이라고 지어줬어.
이런 미친 새끼 어렸을 때부터 상또라이였구만.
나름대로 귀여웠어, 암컷이었거든. 가끔 우리 집에 찾아와서 음식물쓰레기를 뒤지고 갔는데, 푸틴이 나를 참 잘 따랐어. 내가 네 살 때 같이 찢어죽였지만.
하!
푸틴의 가죽은 따뜻했지...
개소리할꺼면 제발 좀 꺼져라.
아냐 중요한 얘기라니까? 봐봐, 나도 내 가족들을 읊고 있다고.
나, 롯시니, 푸틴, 그리고.
릴리쓰?
아니, 너.
서현은 세건의 무릎에 손을 올리고 가슴을 가까이 댔다.
너.
아, 한세건이랑 영화봤어.
재밌는 줄 모르겠더라. 어차피 그 놈이나 나나 액션영화같은 거, 차라리 우리가 찍는 게 더 재밌을 것 같던데.요즘 누가 촌스럽게 은행을 털어? 신작영화라더니 지금이 이천 년대야? 이쯤되면 지겹지도 않나? 자극적인 것도 잘봐줘야 삼세판이지 여기서도 은행털리고 저기서도 은행털리면 한국조폐공사는 뭐 먹고 살아?
뭐 어쨌든 영화보고 밥 먹고 아르쥬나에 잠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키스했어.
진부하게 ATM기 앞에서.
알고 보니까 주인공 커플이 거기서 키스를 했더라고.
그걸 또 똑같이 재현해내는 한세건도 병신같은데,
그거, ATM기에서 나오는 소리 있잖아. 시각장애인께서는 소지하고 계신 이어폰을 기계에 꽂아주십시오 하는 거.
그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눈 돌아갔던 게 돌아온 나도 병신같아.
걔가 키스만 하면 너무 좋아.
솔직히 걔가 잘하는 건 아닌데.
그냥 좋아.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ATM기 앞에서 그 지랄을 했겠지.
이사카는 걸음마를 떼자마자 가끔 집 주변의 숲을 싸돌아다녔다. 야생짐승들은 이사카가 맨발로 뛰쳐나오는 날이면 가끔 그를 등에 태웠다. 맨발가락 사이로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간지러워 이사카는 자기도 모르게 깔깔거리며 뒤로 넘어간 적이 자주 있었다.
이사카를 태우는 동물들은 여러 마리였다. 그 지역 일대를 돌아다니는 늑대들도 이사카를 태웠고, 겨울잠을 자던 곰들이 이사카의 웃음소리에 깨어나기도 했다. 여우들은 마을에 내려가 딱딱한 빵을 물어왔고, 순록들은 이사카의 뺨에 뿔을 비볐다.이사카는 늑대의 등에서 피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곰들의 목덜미에선 생선비린내를 느꼈다. 여우들의 코 끝은 빵냄새가 나고, 순록들의 뿔 끝에선 물냄새가 났다. 그리고 자신에게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서현은 가끔 이사카의 꿈을 꾼다.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지듯 잠에 들면 암컷늑대가 이사카의 티셔츠를 물고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사카는 늑대의 등을 타고 롯시니에게 줄 나뭇잎들을 꺾어보다가, 나무를 타고 있는 날다람쥐의 아몬드를 뺏었다. 그리고 새끼늑대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날다람쥐의 뒷발을 낚아챘다.
늑대도 어미는 새끼를 챙겼다. 이사카를 태워주던 암컷늑대는 자신의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며 이사카가 들고 온 날다람쥐를 씹어삼켰다. 이사카는 가공된 것이 분명한 달달한 아몬드를 손에 쥐고, 암컷늑대가 코끝으로 밀어준 날다람쥐의 허벅지살을 같이 물었다.
늑대도 어미는 새끼의 먹이를 챙긴다. 오늘 밤은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이사카가 새끼늑대들을 품에 안는다. 이제 갓 젖을 뗄까 말까한 새끼들은 젖묻은 주둥이를 이사카의 티셔츠에 비벼댔다. 암컷늑대가 이사카를 품고, 이사카가 암컷늑대의 새끼들을 품은 채 동굴에서 잠드는 침엽수림의 달이 지는 새벽. 이사카는 그 암컷늑대의 이름을 릴리쓰라고 붙여주었다.
아. 또 어린 시절 꿈이다. 서현은 졸린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서현의 옆에서 잠들었던 세건이 서현의 두 눈을 손으로 덮었다. 마저 자라, 귀찮게 하지 말고. 세건의 손바닥이 동굴처럼 어둡다.
서현은 잠버릇이 없었다. 대신 잠에 쉽사리 들지도 않았다.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안광을 내뿜고 있자면, 세건은 서현이 악몽에 나올 것만 같아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려주었다. 자라, 제발. 세건이 피곤한 목소리로 가슴을 몇 번 토닥이고 나서야 서현은 눈짓조차 않고 숨을 가라앉혔다.
"한세건, 너 진짜 신기한 거 알아?"다만 서현은 섹스가 끝나면 이불을 덮지 않았다. 차오른 숨을 가라앉히며, 이불을 엉망으로 다리에 휘감을 뿐이다. 세건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있다가 그런 서현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섹스를 하고 난 뒤의 서현은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고, 묘하게 들뜬다.
"뭐가."
"네 눈, 사진찍으면 그냥 까만 거."
실제로 보면 눈 속에 불이 붙어있는데, 사진을 찍으면 그냥 까매보이더라고. 방수포 위로 미끄러진 서현은 몸을 다시 뒤집고 세건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이렇게나 불이 형형한데, 사진으론 볼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지. 세건은 자신을 응시하는 서현의 두 눈을 바라보다가, 왼손으로 그 위를 덮어버렸다.
"사진으로 남겨서 뭐에 쓰려고."
"딸감?"
"그런 지저분한 말 네 똘마니가 알려주는거냐?"
아니, 이건 공부한 거. 지저분한 말 더 말해줄까? 아니 필요없어. 닥치고 씻어. 왜. 한국남자들 더티 토크 좋아한다던데? 서현이 밑이 간지러워요 이런 거. 한 번만 더 개소리하면 너랑 섹스 안 해.
됐고, 우리 나중에 섹스비디오 찍자. 사진 그런 종이쪼가리 말고.
서현은 세건이 진저리치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나 뜨개질 배웠어."
"담배 한 개비 피고?""아니, 인터넷에서 찾아본 건데?"
"하, 참 나..."
"인터넷 좋더라. 혼자서 시간 때울 만한 것들을 찾아보니까 많이 나왔다고. 빼또쥬가 추천해줬는데, 뜨개질."
"그래서 지금 바늘에 내 도폭선 걸어다가 목도리를 짜고 있는 거냐, 이 또라이 새끼야?"
"아니, 실이 없잖아?"
서현은 촘촘하게 짜인 목도리를 들어 올려 보이며 대답했다.
"가느다란 실보다는 낫지 왜 그래."
이사카가 처음으로 성욕을 느낀 것은 열 두 살이었다. 처음으로 성욕을 해소한 나이이기도 했다.
열 두 살의 이사카는 꽃을 파는 민간인 여자아이와 만났다. 가난한 건지 부유한 건지, 제법 따뜻해보이는 옷을 입고 잘 관리된 머리카락을 묶고 지하철 역에서 꽃을 팔고 있었다.사실 이사카는 그 여자아이가 왜 꽃을 파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옷을 입고서 지하철에서 구걸과 다름없는 행위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굳이 행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 했다. 다만 잘 관리된 갈색 머리가 마음에 들어서, 이사카는 자신보다 한참은 더 큰 키의 그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10루블을 쥐여주었다. 그 여자아이는 10루블을 받고 봉긋한 젖가슴 옆에 낀 꽃바구니 속을 뒤져 새하얀 꽃 한 주먹을 집었다. 무릎꿇어 꽃 한 송이를 이사카의 귀에 꽂아준 여자아이는, 답지 않게 맑은 얼굴로 이사카에게 축복을 빌어주었다. 고마워요, 꼬마 친구.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길. 그리고 그 날 오후 이사카는 여자 하나를 강간하고 먹어치웠다. 싸구려 맛이었다.
"사실 사람 맛에, 싸구려며 고급이며 하는 말을 붙이는 건 기만이지."
굳이 따지자면 맛이 있다, 없다 정도로 나눌 수 있으려나. 서현은 티셔츠를 벗으며 이야기했다. 나는 강간을 하면, 꼭 다 먹어치웠거든? 근데 화대를 냈으면 그런 것도 강간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러자 세건은 서현의 뒷목덜미를 깨물며 이야기했다. 콩까는데 초치는 소리 좀 지껄이지 마라. 아니, 난 지금 진지해. 지금 막 열 두 살 때 먹었던 어떤 여자애가 생각나서. 세건은 서현의 뒷목덜미와 팔뚝, 날개뼈, 척추에까지 입을 맞추다가 물었다.
"맛있었냐?"
"아니, 별로."
이상하게 짰어. 안 씻었나 보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피가 짰어. 왜 그랬을까. 서현은 꼬리뼈까지 입을 맞췄다가 다시 올라와 자신을 끌어안는 세건의 뒤통수를 감쌌다.
내가 그 때 울었어서 그런가.
뭐 키워본 적? ...개 정도?
아니, 없어. 흡혈귀가 된 그 놈을 내가 죽였지.아니, 암컷이었는데?
왜, 같은 개과라서? 소개시켜줄까, 저승에서? 둘이 붙어먹어서 새끼쳐도 나는 책임 안 진다.
식물같은 거 난 안 키웠어. 너 같으면 학교 공부하고 바이크 타러 다니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집 안에 처박혀서 화분에 물이나 줄 새가 있었겠냐.
...별로.
별로 안 키우고 싶어.
지금도.
안 예쁘잖아?
네놈 뭐가 예쁘다고.
아, 미친 새끼야 징그러워. 꺼져. 떨어져. 죽여버린다.
네가 죽을 때까지 쏴버리면 되지.
뭐?
...그래.
한 번 가져와보던가. 눈 위에서 구르던 짐승새끼가 풀떼기 생겨 먹은 거 알긴 하겠냐? 산삼도 잡초처럼 뽑아버릴 새끼.
이야기 중 집을 나선 서현은 이틀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세건은 서현의 손에 들린 뱀딸기를 보면서, 어이없게 웃었다.
어렸을 땐 그런 거, 별로 안 타고 싶었어. 타이어 그네나, 커다란 개나. 롯시니가 좋아했거든 뭐 타는 거. 엄마가 타이어 그네를 밀어주면 롯시니가 제일 좋아했고. 나? ...... 대답 안 할래. 왜, 꼬워? 뭐가 불만인데, 이야기 안 해주는 거? 너는 이야기 다 해줬는데 나는 안 해줘서 삐졌어? 너 그런 점 되게 쪼잔해보여. 한국 남자들이 이런 말 진짜 싫어한다며, 쪼잔하다, 소심하다, 답답하다, 졸렬하다. 와, 그깟 개 나이 가지고 나랑 딜을 하려는 거야? 한세건 생각보다 훨씬 더 좀...간이 작은데? 귀여우니까 봐줄게. 그냥, 타면 안 될 것 같았어. 엄마는 릴리쓰잖아? 그 여자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 ...그래도 유혹에 빠져서 몇 번 탔어. 한, 두 번? ...세 번. ...알았어, 다섯 번. 아 다섯 번이면 됐지 왜 또 그래! 여섯 번 탔다, 여섯 번! 엄마는 어렸을 때 한 번 밀어주고, 그 다음엔 내가 다섯 번. 가끔 생각날 땐 내가 만들어서 탔다 왜. 웃겨? 단순한 그네여도 나름대로 재밌거든 그거? 타이어 그네 무시하지 마라?
...나중에 네 것도 만들어줄게. 한 5M짜리로. 그러니까 너무 질투하지 마. 롯시니는 제대로 기억도 못 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함부로 쏘다니지 좀 마. 내가 뭐랬어. 너 그러다가 갑자기 뒤로 고꾸라져서 훅 간다고 했지. 네가 나보다 약하다는 게 그렇게 억울해? 솔직히 너하고 싸우고자 하면, 나도 내일 당장 죽을 거 각오하고 널 죽일 수도 있거든? 네 몸 안쪽부터 구석구석 불에 그을려 줄 수도 있고, 당장에 그 거추장스러운 머리통 속의 뇌부터 얼려줄 수 있어. 네가 어떤 공격을 할 지 알 수도 있고, 지금 당장 네 내장과 고막이 진탕 될 만한 쇼크를 줄 수도 있지. 까짓거 내일 당장 죽는다고 생각하면 못 할 게 뭐야? 너 죽이고 나 죽는 거, 그런 거 할 수 있다고. 그런데 내가 지금 왜 나보다 약한 너 때문에 이러고 있는지 아직도 모르는 건가? 넌 지금 라이칸스로프의 왕자를 복종시킨거야. 내 욕망이 널 뒤집어엎어서 갈기갈기 찢지 못 하도록 네가 내 마음을 자근자근 밟고, 으깨고, 불에 태우면서 나를 지켜주는 거지. 이해하겠어? 너는 지금 나한테 하나밖에 없는 핵우산인 거나 마찬가지인 거라고.
언젠가 커다란 미술관에 들렀던 적이 있다. 잉카 문명이었는지, 이집트 문명이었는지. 세건은 그 곳에서 색색깔의 염료들이 음각되어 있는 황금조각상을 보았다. 그리고 세건의 옆에 서 있던 서현이, 세건의 허리춤에 두른 팔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멋지지.
세건은 서현을 바라봤다가 다시 황금상을 올려다보았다. 반사광이 눈부셨다. 사람을 고양시키는 황금과, 시각적 흥분을 부채질하는 화려한 염료들. 세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타들어가는 것처럼 시야가 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서현은 조각상 앞에 붙어있는 팻말을 읽고 해석해주었다.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여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용도의 조각상이라는군.
저런 걸 조각해 바칠 정도라면 굳이 풍요를 기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배는 불러도 불러도 모자란 거지.
서현은 말을 이었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법이잖아? 인간은 변하는 법이 없지.
하긴. 세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떴다. 아, 그런 기억이 있었지.
서현은 미술관을 좋아했다. 박물관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미술관이라고 했다. 예술을 사랑할 수도 있지. 그게 그렇게 이상해? 서현의 목소리가 세건의 의식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인간도 사랑하는 판에, 인간의 예술을 사랑하는 게 어디가 어때서. 질투나? 걱정하지 마. 빗살무늬 토기 이런 걸 보면서 자위하지는 않으니까. 널 생각하면서 자위하는 일은 있어도.
세건은 오른손으로 뜨거워지는 눈을 덮었다. 지난 일이고,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강제로 살이 깎여나가고 그 자리를 색색의 문신으로 채운 황금조각상처럼, 세건의 가슴 속엔 아직도 깊은 흔적이 남아있다.
서현은 잠들지 못 한 날을 꼬박 세어보았다. 오늘로 하루, 이틀, 사흘. 벌써 세 달 째였다. 베이런의 이야기인지 고든의 이야기인지, 테트라 일족은 잠들지 않는다지. 수면하지 않는 테트라 아낙스의 생을 받아들이면서도, 꼬박 잠들지 못 한 세 달의 시간 동안 서현은 수도 없이 악몽에 시달렸다.
그래서 서현은 아직도 자신의 기억과 지식에 대해 정확한 출처를 캐내려 애쓰지 않았다. 이 기억이 원래부터 자신이 알고 있던 기억인지, 그것도 아니면 고든이 내 정신을 잠식한 흔적의 일부인지. 서현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무수한 예지와 지식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프리카 북부에 새로 태어나는 자연발생 아웃로가 스무 명, 바다를 건너고 있는 에스프리가 둘, 파군이 운영하는 아편굴이 다음 주에 습격을 당할 테고, 아, 롯시니. 유월 모의고사 점수가 십 점은 더 떨어지겠는데.서현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시야를 돌려 무수히 빛나는 밤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인공적인 불빛들에 밀려 작은 별들이 어둠 속으로 점점 파고 들어갔지만, 서현이 눈을 깜빡이자 이내 검은 융단같은 밤하늘이 넓게 펼쳐지고, 그 위로 별빛들이 파우더처럼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서현의 창백한 손가락이 의자를 두드리자 은하수가 출렁이고, 출렁이는 은하수 너머로 또 다른 별빛들과…….
아, 그게 뭐였지. 서현은 잠깐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자신이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후각과 미각의 경계선 사이로 자신의 살냄새가 몰려들어왔다. 테트라 아낙스 사옥의 넓은 창문과 시야는 때때로 즐거웠지만, 서현이 눈을 감을 때마다 그에게 참을 수 없는 고독과 고통을 선사했다. 서현이 눈을 감으면 서현의 무의식 속 깊은 곳에 똬리틀고 있는 화약 냄새와, 뜨거운 총탄의 열기와, 그보다도 더 뜨거웠던 어떠한 하얀 살결의…….
서현은 문득 생각했다. 아, 커튼. 커튼을 사서 달아야지. 이 아름답고 끔찍한 정경을 가려버려야겠다.
태어나 바라본 첫 달을 기억한다. 서린은 이지가 없었고, 이사카는 요람에 눕혀져 있었다. 어지간한 나무 따위 꺾어서 부러뜨릴 수 있는 완력이었지만, 이사카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안아줄 때면 가만히 그 포옹을 받아들였다. 코 끝에 젖냄새가 찌르르하게 올라오고 따끈따끈한 젖꼭지가 뺨에 비벼지면, 이사카는 입 안 가득 들어찬 어머니의 젖을 빨아마셨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목조차 가누지 못 하는 롯시니가 자신처럼 어머니의 품에 포근히 안겨 젖을 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겨우 목을 가눌 정도가 되자, 어느샌가 이사카의 시각은 완성되어 있었다.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 하고 가늘게 흔들리는 동생의 두 눈동자도,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자장가를 불러주는 어머니의 머리카락도 이사카는 볼 수 있었다. 릴리쓰는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롯시니가 깊게 잠든 밤이면 이사카를 안아들고 집 밖에 나섰다. 겨울바람이 여린 볼살을 베어내듯 몰아침에도 불구하고 릴리쓰는 바싹 마른 손가락을 들어 이사카에게 달을 알려주었다. 이사카, 저건 달이야.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빛이란다. 이사카는 달을 가리키는 그 손가락을 보다가, 뒷통수를 좀 더 뒤로 젖혀 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과연, 어머니의 거짓말대로 이사카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거, 네가 산 거야?"
서현은 거친 숨을 고르며 침대에 앉았다. 세건은 콘돔을 벗겨내 묶으며 되물었다. 뭐를. 저 달 그림, 아무리 봐도 네가 하는 그 뽕 맞고 그린 그림 같은데 네가 산 거냐고. 어. 내가 샀어. 세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 깊숙한 곳에서 물티슈를 하나 꺼내왔다. 서현은 다리를 벌리고, 말없이 자신의 항문과 고환을 꼼꼼하게 닦아주는 세건을 내려다보았다. 서현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해준 말인데."
"어."
"달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빛이래."
서현의 다리 사이에서 픽 하고 비웃는 소리가 났다.
"지랄하고 앉아있네."
그 년은 햇빛을 보고도 그런 개소리를 했다던? 세건이 신랄하게 비난하자, 서현도 세건을 따라 비웃었다. 그리고 서현은, 그 개소리를 믿었던 어린 시절에 새벽 내내 달만 바라보던 날도 있었다고 세건에게 말해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 살던 곳에선 가끔 전리품으로 책이 나왔거든. 성경이라거나, 일기장이나, 가끔 꾸란. 그래서 나는 들고 다니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신기하더라. 종이를 쥐는 감촉이나 책장을 넘기는 행동이나 그런 거. 방아쇠 대신 책등을 쥐고,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는 대신 책장에서 책을 꺼낸다니 도무지 상상이 안 가더라고. 책이라는 건 무언가 모르는 게 있을 때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기록되어 있는 지식들을 꺼내보는 거잖아? 나는 다 알고 있었으니까, 아카식 레코드 덕분에. 책을 찾을 필요도, 책을 읽을 이유도 없었지. 여흥거리로도 책은 좀, 모자라잖아? 먹는 거나, 자는 거나, 가끔...흠, 어쨌든.
그런데 내가 어제 한국어사전을 찾아봤어. 내 머릿 속에 있는 그 뜻이 정말 그 뜻인가 하고 직접 종이사전을 찾아봤는데, 이렇게 적혀있더군. 사랑.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한세건, 너는 어때? 내 지식과 기억과 마음은, 내가 너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고 있다고 말하는데, 너는?
비유하자면, 너는 내 인생에서 돌부리같은 존재야. 음, 말이 좀 이상한데 대체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군. 다이어트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아, 그렇다고 네가 짐이라거나 내 인생을 방해한다거나 하는 존재라는 건 아니야. 다만, 내가 세 살 때부터 생각해온 내 인생에 갑자기 네가 끼어든 거니까...이런 걸 뭐라고 하지? 한국말로 이런 걸 뭐라고 표현해야하나? 생각을 말로 표현한다는 건 너무 어려워. 이렇게 가끔 언어로 대체하지 못 하는 감정이 들면, 아카식 레코드가 가끔 그리워진다니까. 아카식 레코드를 통해서라면 내가 생각하는 네 존재에 대해 확실하고 명료하게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텐데. 그러니까 너는, 지금 너와 나의 관계는, 내 예지에서 벗어난 일종의 예상치 못 한 사고에 가까워. 예지라는 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길과 같은 운명이고, 그 중에서 가장 잘 닦여있고 넓은 길이 바로 현실이 되는 거거든. 내 삶은 원래 열 여덟 살 까지였고, 이렇게 스물까지 사는 것조차 내 예지엔 없었지. 빼곡하게 나누어진 길들 사이로 너는 새로운 길을 닦은 거야. 굳이 비슷한 것을 찾자면 산을 오르는 등산로 같은 느낌일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가장 많이 오르고, 가장 많이 내려오는 큰 길이 하나 있고 그것이 내가 예지한 내 삶이자 열 여덟까지의 현실이라면, 너는 나무를 베고, 풀을 뽑고, 낙엽을 불태워서 스무 살의 나라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 이어준 거지. 그래서 불만이냐고? 아니, 전혀. 불만일 리가. 그냥 그렇다는 거야. 당장 열 일곱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지. 단 한 번도 예지하지 못 했어. 바보처럼 사랑에 빠져서 마음에 몸을 맡기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마음을 고백하고, 내 동생, 내 자식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내 깊숙한 곳 바닥까지 남에게 보여주는 삶이라니…….
서현은 한세건과 섹스를 한 뒤 침대에 누워 있게 되는 날이면, 옛날의 이르쿠츠크를 생각했다. 눈발이 바람에 날리는 쨍한 냄새가 코 끝에 스치고 그보다도 더 쨍한 햇빛이 정수리에 내리쬐던 어느 누군가의 유년기. 그렇게나 평화로운 집과, 평화로운 마당과, 평화로운 땅과 하늘, 산.
서현은 이르쿠츠크를 상상하고 나면 반드시 이사카였던 시절도 이어 떠올렸다. 이사카인 그는 참호 속에서, 자갈 위에서, 잿더미에서, 때때로 영혼을 위한 설잠에 들 때 이르쿠츠크의 꿈을 꿨었다. 꿈 속의 이르쿠츠크는 실제의 기억보다 딱 두 배만큼 아름답고 정겨워서, 그야말로 영혼을 위로하는 꿈이라는 말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 공간 속에는 젖비린내나는 어린 아이와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는 어느 금발의 여인이 있었다. 어린 아이의 붉은 눈에 비친 어머니의 얼굴과, 어머니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어린 아이의 헤테로크로미아.울며 잠에서 깬 이사카는 항상 꿈 속의 그 얼굴이 자신의 것인지 동생의 것인지 궁금해했었다. 아, 수많은 기억과 지식과 예지와 죽음이 떠다녔던 의식의 홍수. 그 끔찍한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이사카가 스스로 노아가 되고, 방주가 되고, 멸망이 되기도 했던 꿈 속의 시간, 꿈 속의 공간, 꿈 속의 감정, 꿈 속의 어머니…….
서현은 얼굴을 닦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한세건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아지트 주변에 설치해놓은 CCTV들의 화면을 체크하고 있었다. 서현의 움직임에 세건은 오른손을 들어 서현의 뺨을 툭 밀었다.
"적당히 하고 자라, 꼴값떨지 말고."
"아, 눈치챘어?"
"바로 옆에 있는데 안 들리면 그게 귀병신이지 뭐야."
떡치고 나서 그렇게 넋놓은 표정으로 울지 좀 마. 사람 기분 더러우니까. 건물 주변에 아무런 위험요소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세건이 서현을 도로 눕혔다. 세건의 검고 깊은 눈동자가 서현의 얼굴을 속에 담았다. 붉고 푸른 눈동자와,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겨우 눈물이 마르기 시작한 뺨. 서현은 세건을 끌어안았다. 세건은 서현을 제지하지 않았다. 서현의 물기어린 목소리가 세건에게 속삭였다.
그거 알아?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대. 그렇다면 아마 나도, 새끼늑대였을 적엔, 기억조차 나지 않는 까마득한 어릴 적엔, 나도 눈알밖에 없지 않았을까.
서현은 처음으로 바다를 봤던 경험을 아직도 기억한다. 수많은 굴곡과 흉터로 가득찬 그의 기억 속에서, 그가 별다른 적의없이 자신의 밑을 내려봤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거무죽죽한 아스팔트 바닥이 사라지고 나면 스크래치처럼 흩어져 있는 구름들 사이로 드러나는 검푸른 물, 아마 바닷물이 탄생한 뒤 어느 누구도 그 바닥을 확인해보지 못 했을 깊은 심해. 그 풍경을 보고 난 뒤 때때로 서현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꿈을 꿨다. 잔혹하게 서현을 내리찍어대는 무거운 삶에서 도망치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에서 기인한 것일수도 있고, 밑도 끝도 없는 그 검푸른 물이 너무도 매력적이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다. 어쨌든 서현은, 가끔 자살하는 꿈을 꿨다. 무척 차갑고, 거칠고, 그의 발목을 잡아당겨 그를 살해할 바닷물이 어쩐 일인지 꿈 속에서는 굉장히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바다에 몸을 던지고 편안해지는 꿈은 대체로 무척 짧았다. 꿈에서 깨어나면 잠든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가 많았고, 해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못 해 바다처럼 푸르죽죽한 새벽공기를 보게 된 서현은 문득 세건의 아지트로 향했다. 이어지는 섹스와 폭력. 자신의 목구멍 너머로 차오르는 열기와 쾌락이 마치 질식과도 같아서, 금방이라도 목졸려 죽을 듯이 편안해서, 서현은 바다의 꿈을 꾸게 되는 날엔 습관적으로 세건을 찾아가 섹스를 하거나, 그에게 강간당했다.그래서 오늘도 서현은 세건과 섹스를 했다. 형광등조차 켜지지 않은 어두운 아지트에서, 해와 달이 희미하게 공존하는 시간에, 세건의 창백한 몸이 어둠처럼 대기에 녹아내리고 있다. 서현의 몸통 안 쪽 깊숙하고 좁은 곳에 서서히 폭력이 스며들고, 이성이 감성을 공이치기처럼 두드려댈 때, 아, 쾌락. 마치 자살과도 같이 따뜻한, 새벽같이 푸르른 바다, 이 숨막히는 육체, 자해, 사랑, 감정, 섹스.
서현은 세건을 끌어안고 허벅지를 조였다. 끌어안은 세건의 몸통에서 바다를 헤엄치는 생선과 같은, 삶의 비린내가 났다.
"사막 가 봤어?"
"내가 바다는 자주 못 봤어도, 사막은 자주 가 봤는데 말야.""나, 원래 그런 데선 어지간하면 오른쪽 눈으로 잘 안 보거든."
"왜냐면 대체로 그런 땅엔 아무 것도 없으니까. 물도 없고, 풀도 없고."
"그리고 많이들 착각하는데, 그런 곳엔 눈에 보이는 불도 없어."
"사막의 대기는 곧 눈에 보이지 않는 불이고, 그렇다고 공기에 대고 고기를 구워먹을 순 없으니까 환장할 노릇이지."
"물론 거기에서도 살아갈 놈들은 살아가고, 지배할 놈들은 지배하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잖아.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막에서 살고 있는 생물들이 얼마나 많느냐는 이론적인 지식은 둘째 치고."
"당장 내 눈에 흙밖에 안 보이는데 거기서 어떻게 생물들이 있다고 생각해."
"내가 마실 수 있는 물은 이 수통의 물이 전부고."
"내가 볼 수 있는 풍경은 샛노란 모래들 뿐이라면."
"이 곳에 나 혼자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그런데 어느 날 사막을 걷다가 문득 왼쪽 눈을 감았는데."
"내 발에서 두 발짝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도마뱀이 하나 있었어."
"이상하게……."
"그게 이상하게 슬펐어."
"나 외의 다른 생명을 찾았으면 기뻐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 넓은 곳에 고작 내 손가락만한 도마뱀 하나 달랑 있다고 하니까 슬퍼서."
"죽였거든."
"그냥, 갑자기 그게 생각났어."
"그러니까 나는 네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나랑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나랑 같이, 이 사막같은 세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네가 그냥, 평생, 네 평생이어도 좋고, 내 평생이어도 좋아."
"어차피 우리 오래 못 사는 거 아니까 그냥 이 짧은 시간 동안."
"네가 내 사막에 묻혀줬으면 좋겠어."
사람의 마음에 깊은 흉터를 남기는 것은 여러 가지다. 삶, 말, 글, 언어, 시간, 사진, 그림, 사람, 사랑. 세건은 갑자기 음악이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음악이라도 좋았다. 귓가에 울리는 심장소리를 덮어버릴 수만 있다면 시끄러운 메탈이라도, 잔잔한 클래식이어도 좋았다. 어찌됐든 어떤 음악이라도, 모르는 노래든 아는 노래든 상관이 없으니까, 그냥 음악이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아직 레코드판매점이 남아있던가.
노래 들을래?나, 축음기로 노래 듣는 거 좋아해.
콧노래를 부르며 레코드판이 잔뜩 쌓인 상자를 뒤지던 서현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서현이 꺼내든 레코드판에는 스페인어로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적혀있었다.
이곳저곳 전전할 때에도 노래는 들었지. 축음기 같은 것들은 내가 부수지 말라고 그랬거든.
서현이 레코드판을 놓고, 바늘을 올린다. 불쾌하지만은 않은 잡음과 함께 이내 서러운 듯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낯선 음악과 선율, 흐느끼는 듯한.
탱고 좋아해?
출 줄 모르면 가르쳐 줄 수도 있으니까, 출래? 춤.
세건은 고개를 내저었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그 당시엔 그와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춘다는 것 자체가 무척 껄끄러웠다. 가만히 의자에 기대앉아 총열을 정비하는 세건의 옆에서, 서현은 축음기를 바라보며 가만히 음악을 듣고 있었다. 네 계절의 포르테냐,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 여름, 가을, 가을이 지나가면 겨울, 그리고 마침내 봄, 다시 여름.
전통적인 탱고는 아니고, 춤추기엔 별로 안 좋은 노래지만.
좋은 노래야.
사 계절, 나는 잘 못 느꼈었는데.
덥거나, 춥거나. 얼음이 녹으면 봄이고, 열매가 달리면 여름이고, 썩어 떨어지면 가을이고, 하야면 겨울이지.
세건은 가만히 서현의 말을 듣고 있었다. 레코드판은 끊임없이 돌아가고, 바늘도 덩달아 떨리기 시작했다. 서현은 '여름'이 끝나자 마침내 눈을 감고 가만히 음악에 귀기울이기 시작했다.
나 사실 누구랑 같이 음악듣는 거 안 좋아해.
심장소리가 거슬리니까, 항상 혼자 들었지 음악.
근데 이상하게 당신 심장소리는 별로 안 거슬려. 신기해.
서현은 한참이나 음악을 듣다가, 세건의 정비가 끝나자 음악이 재생되는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레코드판에서 바늘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세건의 앞에 서서, 세건을 내려다보며, 한 마디 던졌다.
나, 당신 심장소리 더 듣고 싶은데,
우리 키스할래?
세건은 눈을 감으며 귀를 틀어막았다.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귓가에 심장소리가 울린다. 배워둘 걸 그랬다, 탱고, 배워둬서 나쁠 건 없었던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