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

초경

알파카개틀링 2014. 6. 22. 03:36



 어른이 된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성인식이라는 것은 찾아왔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영영 찾아오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가 좋았지, 어릴 때가 좋은거지, 어렸을 때로 돌아갔으면. 사람들은 누구나 시간을 뒤로 돌리고 싶어했다. 어른은 학생을 그리워하고 학생은 아이를 그리워하고 아이는 아기를 그리워했다. 아기는 말을 하지 못 하기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라키타는 아마 갓난아기들도 엄마 뱃 속을 그리워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따지자면 그런 거다.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하나의 과정이다. 아이는 자라면서 말을 하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되고, 자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구실을 하려면 어른이 되어야 한다. 몸도 마음도 죽순이 껍질을 벗듯이 여러 개의 굴을 통과하면서 벗고 입고 버리고를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키타는 자신은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이불을 걷어올리고 시트를 확인하면 아라키타의 마음 속에는 안도와 불안감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열 여덟, 나이로만 따지자면 아라키타는 이미 성인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그 중간터널, 남들은 이미 다 빠져나가 어른의 껍질을 뒤집어 쓰게 되는 그 어두운 곳을 아라키타는 절반도 채 달리지 못 하고 어정쩡하게 말라가고만 있다.


 아라키타는 자신의 손짓이 신카이에게 나비처럼 날아간다는 것을 안다. 자신이 신카이의 손에 깍지를 끼면, 신카이는 가끔씩 입술을 깨물고 한숨을 내쉬고는 했다. 몇 걸음 채 걷지 못 하고 주저앉아버리면서도, 아라키타는 신카이의 손을 놓지 않았다. 신카이가 자신의 신발코를 바라보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주워삼을 때에도 아라키타가 그를 추궁하는 일은 없었다. 아라키타는 생리적인 반응이라는 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저 그 뿐이다. 생리적인 현상도, 과학적인 이론도, 아라키타에게 가슴 깊이 감정적으로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아라키타의 교실에는 때때로 생리통이 심해 엎드려있는 여자아이들이 많았다. 울고, 신음하고, 지쳐 늘어진 모습들을 보며 아라키타는 신카이를 상상했다. 신카이의 손가락이 자신의 다리 사이를 시원하게 긁어줬으면 하는 기대에서 연유하는 일그러진 착란. 아라키타는 단 한 번도 속옷에 무언가를 붙여본 적이 없었다. 아라키타에게는 아직도 초경이 찾아오지 않았다.


 가슴이 나오고 아랫배에 살이 붙었다. 한 줌에 채 잡히지 않는 가슴인데도 젖꼭지는 동그랗게 모양이 잡힌다. 속옷은 무조건 순면이어야 했다. 아라키타는 팬티를 손가락으로 들어올려봤다가 다시 놓는다. 민둥산이었던 아랫배 밑에는 언제부터인가 숱 적은 털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라키타는 어린 날, 브래지어를 사러 갔을 때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처음으로 아라키타의 등 뒤에 팔을 둘렀고, 늑골 위에 얇은 줄자가 자리잡았다. 꼬마아가씨가 많이 말랐네요. 셔츠 밑에 부드러운 천을 처음으로 덧대보았던 날이었다. 등에 땀이 차는 갑갑함에 숨이 막혀왔어도 더이상 밋밋하지 않은 젖꼭지가 못내 부끄러워 참던 숨을 한 번 더 참았었다. 그러니까 너는 이제 여자라고, 아이가 아니라 여자니까. 아라키타가 중학교 교복을 입게 되던 날 어머니가 말했었다. 스스로의 몸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단다. 너는 이제 여자니까. 아라키타는 못내 묻지 못 했던 말을 아직도 속으로 주워삼키고 있었다. 엄마, 나는 단 한 번도 욕실선반 맨 위로 손을 뻗지 못 했는데, 그런 나도 여자인 거에요?


 신카이와 아라키타의 사이에는 내 어디가 좋아? 하는 뻔한 질문이 놓여있다. 신카이는 아라키타에게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이야기 했고, 아라키타는 가끔 토할 것처럼 울렁거리던 위장의 움직임을 호감이라고 명명했다. 아라키타가 고개를 끄덕였던 순간부터, 아라키타와 신카이 사이에는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어느샌가부터 그 긴장감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과는 결코 만들 수 없는 희귀한 공기 속에서 말을 하고 손을 잡고 같은 곳에서 같은 풍경을 보게 되었다. 아라키타는 금방이라도 끝날 것처럼 질질 늘어지는 운동장 위를 굼벵이처럼 걸었다. 신발 뒤축이 소리를 내며 모래를 파고드는 것은 결코 아라키타가 체중을 뒤로 실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신카이는 삼 초에 한 번씩 걸음을 옮기면서, 아라키타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왜 좋아하냐고? 야스토모, 듣고 싶어? 아라키타는 매번 고개를 흔든다.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맞지만, 사실은 들을 필요가 없는 거라고 억지로 생각한다. 숨통을 쥐고 흔드는 이 긴장감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았다.


 아라키타의 어머니는 부쩍 석류를 많이 먹기 시작했다. 석류에서는 물에 젖은 고무공같은 소리가 흘러나온다고 했다. 알알이 발라내는 것이 힘들어 그저 쪼개서 한 입 깨문다고. 어머니의 안부전화 너머로는 가끔씩 폐경기의 여성들을 위한 교양프로그램의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그는 필요한 건 없냐고 물으면서도 끊임없이 석류를 씹었고, 마치 손톱을 씹는 듯한 그 빠득거리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아라키타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용돈은 충분해요. 더 살 것도 없으니까. 새하얀 침대 위에 드러눕고 나니 구름처럼 하얘 얼룩조차 없는 이불이 못내 서럽다. 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군가는 끝을 준비하는 게 무척이나 억울하다. 시작하지도 못 한 사람이 결승선으로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알 리가 없으니 아라키타에게는 서러워할 자격이 충분했다. 아라키타는 전화를 끊고 베개를 때린다. 베개를 때리다 속이 터져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신카이에게서 메일이 왔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그게 신카이를 부실 뒤로 불러낸 이유였다. 아라키타는 매니저들의 입에 자신이 오르내리는 걸 알고 있다. 쟤는 힘들지도 않나봐, 하루도 안 쉬어, 자기 남자친구가 선수라서 그런거야? 걔는 쟤의 어디가 좋대? 쟤는 화장도 안 하는데. 시답잖은 소리였지만, 시답잖은 소리는 시답잖은 소리라서 의미가 있었다. 아라키타는 자기 자신을 여성이지만 여자가 아닌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너는 내 어디가 좋냐?"


 뻔한 질문이다. 여태까지 매번 학교가 파하면 물어오던 질문. 애정을 확인하기 가장 쉬운 한 마디. 신카이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창문 너머에서 부원들의 수다가 들려온다. 야, 야. 조용히 해. 쟤네 지금 사랑싸움한다. 우와, 정말요? 신카이는 눈을 깜빡였고, 아가미가 베인 물고기처럼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아라키타를 시야에 넣었다. 아라키타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애정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라키타가 표현하려 하지 않아도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그러했고, 답지 않게 치맛자락을 꽉 쥐어 통통하게 솟아오른 그의 힘줄이 그러했다. 눈을 마주할 때마다 홍채를 스쳐지나가던 이질감, 좋아하는 사람의 두려움. 아라키타의 모든 몸이 말하고 있었다. 너, 내 어디가 좋아?


 "응, 야스토모."


 어디라고 딱 정하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그냥 네 전부가 좋아.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어깨 너머로 소란스러워지는 부실을 바라보았다. 연애는 토도 선배가 제일 자신있는 분야 아니었어요? 너는 쟤가 여자로 보이냐? 선배 그거 성희롱이에요. 아라키타는 새빨개진 얼굴로, 그렇지만 절대 부끄러운 표정은 짓지 않았다. 아라키타에게는 항상 미묘한 당당함이 있었다. 아라키타는 가끔씩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의 기준은 신카이가 가지고 있었던 상식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낯선 것들이어서,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모든 사고를 좋아했다.


 "야스토모?"

 "……."

 "야스토모?"

 "……."


 아라키타는 복잡한 눈초리로 마른 입술을 몇 번 핥았다. 신카이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으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래야만 했다. 아라키타의 고개가 위로 들어올려졌고,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입술과 눈을 마주했다. 아라키타가 물었다.


 "네 눈엔."

 "응."

 "내가 여자같아?"


 수군거리는 부원들의 수다가 신카이의 귓바퀴에서 달팽이처럼 휘몰아쳤다가, 엉금엉금 기다가, 이내 봄바람처럼 훅 사라졌다. 파도같은 정적이다. 신카이는 눈을 크게 뜨고서, 항상 생각해오던 것을 속삭였다.

 "내 눈엔 야스토모가 제일 예뻐."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어깨 너머로 슬쩍 창문을 바라보았다. 부실 안에서는 토도가 베어물던 파워바를 손에 들고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아악, 짜증나! 커플 재수없어! 신카이는 후쿠토미가 연습을 나간 것에 감사했다. 마나미가 우와 선배들 닭살돋아요 하고 뒷통수를 긁는다. 신카이는 머리꼭대기에서부터 쌔한 느낌이 온 몸을 훑었다고 생각했다. 아라키타는 치맛자락을 쥐던 손으로 자신의 교복 상의 끄트머리를 움켜쥐었다. 아라키타의 시선이 신카이를 정면으로 노려본다. 신카이는 아라키타에게 되물었다.


 "그걸 묻고 싶었던 거야?"


  아라키타의 질문은 항상 일방적이다. 아라키타는 상대방에게서 성실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체면치레, 인사치레라기엔 다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상의 본분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잠은 잤냐, 밥은 먹었냐, 다친 곳은 없냐. 아라키타는 항상 인사대용으로 쓸만한 질문만을 할 뿐이다. 상대방에게서 돌아오는 대답 따위에는 항상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그래서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질문을 두려워했다. 아라키타의 질문은 상대방과의 장벽을 쌓기 위한 벽돌이었다. 신카이와의 관계에서도 그러했다. 아라키타가 신카이에게 던지는 질문은 유일하게 하나였다. 너, 내 어디가 좋아? 일종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일과 비슷할 정도로 자주 가볍게 별 일 아닌 것처럼 던져졌지만,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이 질문을 제일 두려워했다.

 전부 좋아, 네 자체로 좋아. 가장 스테디셀러인 답변을 고르자니 자신의 마음이 너무 벅차다. 신카이는 항상 아라키타의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그의 질문을 가볍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백 배는 더 길었기 때문이다. 까만 머리카락도 좋고, 긴 눈도 좋고, 좋은 냄새가 나는 피부도 좋다고. 팔뚝에 스치는 네 손 끝이 좋고, 사각사각 소리를 내면서 훈련내용을 기록하는 네 팔꿈치도 좋고, 잔물결처럼 흔들리는 네 셔츠소매가 좋고, 신카이 라고 내 이름을 부를 때 온 세계가 흔들리는 것처럼 울리는 네 목소리 마저도 너무 좋다고. 손쉽게 말하기에 좋다는 말은 너무 짧았다. 가볍게 말하자니 자신의 마음이 통조림으로 취급당하는 것 같다. 네 머리카락, 네 숨소리, 네 손톱, 가끔 네가 분수대에 동전을 던지듯 건네어 말하는 내 이름은 내 가슴에 못처럼 사랑으로 처박히는데.

 아라키타는 눈을 깜빡였다. 이마에 식은땀이 슬쩍 맺혔지만 애써 팔뚝으로 닦아냈다.


 "아니."

 "그러면?"

 "너."


 아라키타는 조용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머리 위의 창문에서는 토도가 마나미에게 좀 떼줄까?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라키타는 지금 이 말을 함으로써 신카이와의 관계가 극적으로 변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뒤집어지던가, 뒤집어지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구십도 정도 옆으로 굴러갈 수는 있을 것이다. 입 안에서 왠지 모를 쇠냄새가 났고, 코 끝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어느샌가 후덥지근하고 불쾌했다. 신카이와 자신만의 긴장감있는 공기 속에, 어느샌가 계절감이 도둑처럼 들어와있었다. 그래도 아라키타는 말해야했다. 이 말이 오늘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그전처럼 그저 소리낼 뿐만인 질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목적이 담긴 질문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아라키타는 입을 뗐다.


 "내가 떡치자고 하면 떡칠 수 있냐?"


 토도가 기침하면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고, 이즈미다가 괜찮으세요? 하고 묻는 소리가 났다. 마나미가 우와, 돌직구 하고 감탄하며 웃는 소리도 들려왔다. 신카이는 눈을 깜빡이지도, 미소를 짓지도, 손을 들지도, 숨을 쉬지도 않았다. 다만 토도의 기침이 멎어갈 때 쯤, 한 발자국 아라키타를 향해 다가갔을 뿐이다. 아라키타는 부실 벽에 등을 기댄 채 치마를 다시 움켜쥐고 신카이를 올려다보았다. 


 "야스토모."

 "……."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야?"




 "못 들었냐? 내가 떡치자고 하면 떡칠 수 있냐고."

 "잠시만 기다려줘, 야스토모."

 "왜, 더럽냐? 여자애가 먼저 섹스하자고 하니까 기분나빠?"


 신카이는 아라키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아라키타의 교복 치맛단을 바라보았다. 아라키타의 목소리가 갈라져있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평소라면 하지 못 할 말을 할 것이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상당히 날 것인 단어를 선택했지만, 아라키타가 굉장히 진지하다는 것 정도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말 돌리지 마, 신카이. 너 내가."


 아라키타는 머리 위의 토도나 이즈미다, 마나미 등의 부원들을 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신카이에게 집중하고 있었고, 신카이에게 집중하고 있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감정들 중 제일 밑바닥의 것을 그대로 드러내보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카이는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고, 아라키타는 치맛단을 한 줌 더 움켜쥐었다. 바싹 마른 허벅지에 속바지 끝단이 슬금슬금 비춘다. 신카이가 순을 올리자 아라키타는 눈에 띄게 치맛단을 잡아당겼다. 신카이는 오른손으로 아라키타의 양손을 모아 잡고 부드럽게 그의 손가락을 풀었다. 회색 속바지가 교복치마에 가려진다.


 "떡치자고 하면."

 "할 수 있냐고?"


 사레들린 토도가 소리없이 기침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소리, 마나미가 끈적끈적한 파워바를 씹는 소리가 모두 들려왔다. 청각은 모든 소리를 말소리만큼 부풀렸고 촉각은 날카로워 바늘처럼 예민해졌다. 신카이는 왼손으로 부실창문을 닫았다. 고요해진 공기 속에서 신카이의 시선이 아라키타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아라키타는 고개를 들어 신카이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작은 눈동자, 촘촘한 아랫속눈썹, 창백한 흰자. 아라키타의 창백한 뺨과 도드라진 청색 핏줄을 가만히 시선으로 따라가던 신카이는 속삭였다. 못 할 게 뭐가 있어, 야스토모.

 "내가 네 남자친구인데."




 아라키타는 눈을 내리 깔았다가, 다시 신카이를 올려다봤다가, 교복 치맛단을 괜히 매만졌다가, 허벅지 옆쪽에 손바닥을 비볐다가,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은 뺨을 손등에 가져다대었다. 아라키타의 숨이 가볍고 잦았다.

 아라키타는 항상 당당했다. 신카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강하게 이야기를 하고, 남자애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을 정도로 왈가닥이고, 엄청나게 아프지는 않아도 손 끝이 사뭇 매운 그런 여자였다. 항상 치마 밑에 반바지를 받쳐입고 다녀서 남자애들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는, 당당하고 거친 여자였다. 젖내나는 어린애도 아니고, 칭얼대는 소녀도 아닌 당당한 한 사람. 아라키타는 여자였다.

 아라키타의 그런 당당함 속에는 당황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지금처럼 조금 서러워하면서 무서워할 줄도 아는 인간다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당장의 오만에 의해 나타나는 당당함도 아니었고, 타인을 깎아내리며 억지로 내세우는 당당함도 아니었다. 스스로가 사람이라는 것에서 시작하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당당함.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자존심을 높이 사면서도 절대 퇴색하지 않을 그 인간다운 섬세함을 좋아하고 사랑했다.

 아라키타의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었다.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앞머리를 손톱으로 갈랐다. 자신의 그림자에 가려져 조금 창백해보이는 이마선에 손끝을 가져다 대면서, 신카이는 아라키타를 불렀다.


 "너는."

 "……."

 "가끔 내가 너한테 먼저 반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

 "……."

 "너무하네, 아라키타 야스토모."


 아라키타는 신카이를 노려보면서 씹어삼키듯이 중얼거렸다.


 "나도 내 몸뚱아리를 모르는데 뭘 보고 남이 내 모두를 좋아한단 말을 믿냐?"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이마를 매만지던 손가락을 옆으로 쓸어내렸다. 땀에 살짝 젖어있는 앞머리가 옆으로 갈라지고, 가늘게 올라간 눈썹을 지나 보기 좋게 부드러운 관자놀이를 신카이의 손가락이 스쳐지나갔다.


 "아니지."

 "……."

 "그런 말은 지금 하면 안 되는 거지."


 신카이의 손가락은 아라키타의 귓바퀴를 훑고 귓볼을 매만졌다. 아라키타의 온 신경이 자신의 손 끝을 따라오는 걸 느끼면서, 신카이는 귓볼 뒤 움푹 패인 곳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야스토모, 내가 네 모든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의미는."


 아라키타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땀이 식어 서늘한 자신의 뺨과 턱에 신카이의 굳은 살 배긴 손바닥이 곧 덮어씌워질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나도 내 감정을 차마 갈무리하지 못한다는 뜻이야."


 아라키타는 자신의 시야가 어두워지고, 곧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가, 숨이 조금 막히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꼈다. 눈 앞에서 자신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던 신카이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라키타에게 남아있는 것은 식은 땀이 축축하게 난 단단한 손바닥이 와닿은 뺨과, 턱이 아플 정도로 들어올려진 뺨과

 신카이의 냄새 뿐이었다.




 첫째로는 그저 스치듯 맡기만 했던 신카이의 냄새가 코 끝에 잔뜩 스며들었다는 것. 둘째로는 신카이의 얼굴에 보송보송하게 나 있는 솜털을 처음으로 바라봤던 것. 셋째로는 어깨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손 끝이 바위처럼 무거워서 뺨을 쥐고 있던 신카이의 손목을 양 손으로 붙들었던 것. 입술을 떼었을 때 숨을 내쉬면 혹시 침 냄새라도 날까봐 숨을 참고 있었는데, 신카이는 그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아라키타의 양손을 떼어다가 오른손을 자신의 어깨에, 왼손은 자신의 허리에 가져다 대 주었다. 겁 먹은 자신보다도 더 흔들리던 어깨와, 옷 아래로 느껴지는 어설픈 호흡과, 울 것 같이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나는 너를 좋아해, 야스토모.'


 첫 키스가 어땠냐고 물으면 아라키타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피부만 숨을 쉬는 느낌, 물 속에 빠진 느낌, 목이 졸리는 느낌, 누군가 나를 포옹하는 느낌, 한여름 땡볕에서 한 시간 정도 서 있는 것 같은 현기증, 이불을 덮지 않고 잠들었던 다음날 아침의 찬 공기,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먼 발치에서 바라본 야구장, 불로 지지는 것 같던 팔꿈치의 통증,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모든 촉감과 냄새와 맛을 동원해봐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모습.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소리로 표현할 수 없어서, 결국 아라키타에게 남은 것은 단편적인 기억과 손 끝에 닿아왔던 체온 뿐이었다.

 섹스를 하자고 했는데 키스를 하냐고 신카이에게 면박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라키타가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아라키타의 귓가에 너를 좋아한다는 신카이의 말이 먼저 들려왔다. 아라키타는 땀이 식어 서늘해진 자신의 양 팔을 감싸 끌어당기던 신카이의 피부를 느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카이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혔고, 아라키타는 보지도 말하지도 못 하는 상태에서 이마로, 뺨으로, 눈으로, 입으로, 코로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신카이의 심장박동을 듣고 맡고 느꼈다.

 야스토모, 너는 내가 봐 왔던 사람들 중에서 제일 좋은 여자야.



 아라키타는 마치 곧 죽을 사람처럼 방으로 돌아왔다. 발로 짚는 모든 땅이 물처럼 느껴졌고,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해초처럼 부드러웠다. 머리카락과 온 몸에 신카이의 체온이 배어있는 것 같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몰라서 신카이의 손바닥이 닿아있던 뺨만 문질렀고,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서 입이 바싹 말라도 혀로 입술을 축이지 못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고함소리, 새가 날아가는 소리, 아스팔트에 부딪히는 얼얼한 배기음, 그리고 지금 자신이 모래에 비벼대며 걸어가고 있는 고무깔창의 마찰음. 아라키타는 옷을 갈아입고 밥을 먹고 씻고 침대에 누우면서도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좋은 여자라고? 어떻게? 왜? 무슨 이유로? 내 어디가? 내 모든 게? 이 몸이? 이 피부가? 이 눈이? 이 머리카락이? 내가 지금 있는 이 방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내 침대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내 이불이 하얗고 푹신푹신하다는 것도 모를 거면서, 내 팔뚝 안 쪽이 무슨 색깔인지, 내 무릎뼈가 어떻게 생겼는지, 내 복숭아뼈가 얼마나 단단한지, 내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더 모르면서.

 아라키타는 양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가, 입술을 만졌다가, 자신의 귓불을 괜히 문질러봤다가, 괜히 눈물이 나서 엄지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축축하게 젖어갈 관자놀이보다도 먼저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에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흰 시트 위에 꽃처럼 점점이, 열매처럼 동그랗게 떨어져 묻어있는 핏방울. 아라키타는 생각했다. 

 아, 초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