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프리즈 샘플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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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혁세건 신간 '안티프리즈' 사양입니다
사양 ▶ 사혁세건|비규격|70P|8500원
샘플 ▼
00.
여전히 산 사람이 없어 세건은 희고 깨끗한 길을 걷는다. 다만 가끔씩 알 수 없는 것들이 세건의 시야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다가가 그것을 살펴볼 뿐이다. 세건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들은 대체로 몹시 오래된 삶의 모습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무런 생김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것들은 세건에게 아주 익숙해서 섬뜩하고도 불길한 목소리로 얘 세건아, 얘 세건아, 하고 말을 걸어왔는데, 세건아, 얘, 세건아, 거기, 세건아, 한세건 하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세건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세건이 손을 내밀면 몹시 오래된(그리고 삶의 흔적들이 분명한) 것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덕분에 세건은 자신의 이름이 세건이라는 것만을 안 채 홀로 세상에 또 다시 내던져진다. 성이 한 씨이고 이름은 세건이니 결국은 누군가가 세건을 태어나게 해준 것만은 명확한데, 사유하면 할수록 세건은 이름도 모를 누군가가 자신의 몸과 의식을 만들어주었다는 것을 단순하게 알게 되기만 할 뿐이라, 세건에게는 도통 생에 있어 어떤 것이든 무엇인가를 받은 기억이 있지를 않다.
그래서 세건은 어쩌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 하는 아주 오랜 기간, 혹은 세상이 태어나기도 전의 삶의 파편들이 세상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고 추측한다. 세건이 인식할 수 없는 존재일 수도 있고, 숨을 쉬지 않아도 되는 존재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는 존재일 수도 있겠다.
점차 세건은 결핍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세건이 발목에 오래된 삶의 파편들을 매단 채로 하얗고 끝없는 길을 그저 걷기만 한다. 세건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되뇌기 시작하고, 결국 살아있는 사람도 죽어있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홀로 뚜렷하게 순종하는 최초의 산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 날, 세건은 자신에게 남아 있을 수 없는 것들을 들고 걸어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까지 걸어갔다. 땔감으로 쓸 수 없는 커다란 나무 근처에 세건이 부러진 나이프와 밑창만 남은 가죽부츠를 얕게 묻는다. 만약 세건 외의 다른 사람이 똑같이 이곳을 헤매고 있다면 세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도 이 되다만 생존의 흔적을 보고 아, 이 사람은 죽었겠군, 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하루 이틀이면 세건의 흔적은 금방 다른 먼 곳으로, 그리고 세건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땅의 깊은 살 속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세건은 다시 반나절을 걸어 거점으로 돌아온다. 거점으로 돌아오는 길에 새까맣게 죽어있는 은행나무 밑에서 누군가 오래 전 떨어뜨리고 간(혹은 유품일 수도 있는) 성냥 세 갑을 찾았다.
어느 날 이전의 어느 날, 세건은 꽁꽁 얼어있는 군화 한 켤레를 얻는다. 세건은 접히지도 펴지지도 않아 어정쩡한 접이식 나이프 하나도 함께 줍는다. 꽁꽁 얼어있던 군화는 따뜻하게 녹이자 더 이상 가죽도 아닌 것처럼 흐물흐물하게 밑창만 남았다.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진작에 없어졌을 것이 그저 존재인 척 세건을 속이기만 한 것일 수도 있다. 반쯤 접힌 채 굳어있는 접이식 나이프는 통조림 하나를 까다가 부러졌으니 결국 세건에게 온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느 날 이전의 어느 날 이전의 어느 날, 세건은 모양새가 제법 남아있는 커다란 집 한 채를 발견한다. 단독주택이었고, 제법 오래된 목조건물이었다. 기와 몇 장이 떨어져 있는 것 말고는 별다른 하자가 없어 보이는 건물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 다만 어떤 사람, 혹은 어떤 다수가 살아온 흔적들만이 완연해서, 칠이 조금 벗겨져 있는 어두운 색깔의 (멈춰있는) 알람시계, 먼지가 묻어나지 않는 (비어있는) 액자들, 커다란 침대와 두툼한 이불 같은 것이 박제처럼 보존되어 있었다. 복도 곳곳에는 유리가 다 깨진 등잔과 함께 크고 작은 수많은 방이 있었지만 역시 제일 큰 방 하나를 제외하면 방 안은 대개 비어 있었고, 세건이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으면 근원을 알 수 없는 휘파람 소리가 세건의 곁에 머무르다 떠났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이 집은 저 혼자 세상에 살아있는 세건에게는 지나치게 불필요한 공간일진대, 세건은 이미 더 크고 거창하고 불필요한 것들이 많은 세상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집 안 구석구석 흔적과 같은 삶의 박제들을 기준으로 삼아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세건은 정말 오래간만에 나무라는 것을 때웠다. 덜 마른 성냥으로도 불은 용케 피어난다. 젖은 곳에서 겨우 태어난 불똥이 나무에 붙어 타오르는 것을 세건이 지켜보기로 한다. 벽난로 잿더미에 묻혀 있던 부지깽이도 하나 찾아낸 세건은 그제서야 이 집이 자신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옛날에, 아주 오래 전에 지어진 집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가, 이내 잊는다.
세건은 자신만큼 이 세상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본 적 없기 때문에 자신만큼 이 세상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 자신 외에 이 세상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알 수 있는 것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세건의 세상은 이토록이나 새하얗고, 이토록이나 비어있고, 이토록이나 결백한 것에 지나지 않아서.
세건이 벽난로 앞에 앉아 불에 그슬려 숯이 되어가는 나무를 바라본다. 세건은 품속에서 자신의 얼굴이 찍혀있는 사진을 꺼냈다.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찍은 자신의 사진이 스스로를 몹시 사무치게 만들지만, 그저 그뿐이다. 세건은 몸을 웅크린다. 나무가 타는 냄새가 났다. 생존이 박제가 되는 냄새였다.
어느 날 이전의 어느 날 이전의 어느 날 이전의 어느 날, 세건은 자신이 매일 걷는 길목에서 여지껏 보지 못 해왔던 것을 하나 발견한다. 사방이 뾰족하게 각이 지고, 겉에는 이름 모를 빨간 것이 발라져 있고, 문을 닫으면 온 시야가 쪼개지는 낯선 공간이다. 불투명한 유리로 막혀있는 상자 속에는 수명을 가늠하기 어려운 전화기가 하나 놓여있다.
세건이 그 붉고 네모난 공간과 눈을 마주치자 예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튀어나와 전화기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세건이 상자의 출입구 근처를 맴돌며 기웃거리자 전화기 뒤의 알 수 없는 그것이 섬뜩한 목소리로 세건을 불렀다. 얘, 건아, 거기, 건아. 세건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세상과 괴리된 것처럼 새빨간 문을 잠시 닫아보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하는 말대로 문 앞에 떨어진 수많은 종류의 동전을 집어 든다. 동전들을 바지주머니 속에 모두 집어넣고 나서야 세건은 다시 고개를 돌린다.
얘, 세건아. 세건은 전화기 뒤에 숨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주머니 속에, 너 있지, 거기 동전 하나, 오래된 것, 그 중 제일, 거기 동전 하나. 그러나 온 시야가 새빨갛게 쪼개지는 저 네모난 공간은 새하얗게 죽어있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난 살아있는 것이라, 세건은 어찌 보면 제 아가리와 같은 저 붉은 것의 속으로 발을 옮기기를 조금 주저한다. 허나 전화기 너머의 그것도 세건을 포기하지는 않아서, 살이 에이듯 새파랗게 귀가 아픈 목소리로 얘, 세건아, 거기, 건아, 사실, 나, 밤마다, 하고 세건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이다.
결국 세건은 동전 하나를 꺼내 쥐고 전화기 앞으로 겨우 발을 옮겼다. 세건의 하얗고 트인 시야가 붉고 뾰족하게 쪼개지기 시작했다. 세건은 불안한 눈초리로 연신 좌우를 살펴보다가, 전화기 뒤의 것이 시키는 대로 수화기를 들고 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하나 꺼냈다. 녹이 잔뜩 슬어있는 전화기가 제 홈보다 조금 작은 오래 된 동전을 하나 잡아먹자 세건을 부른 것이 세건의 귀에 속삭였다. 사실, 건아, 보았단다, 밤마다, 오래, 매일, 끊임없이, 빠짐없이, 다름없이, 혼자, 너 우는 것, 나.
곧 세건에게 소음이 다가온다. 사람의 말 같기도 하고, 항상 세건을 불러왔던 저 알 수 없는 것들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눈이 밟히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그러나 결국에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게 분명하다. 소음 저 너머에서 세건을 부른 것이 세건에게 속삭였다. 울길래, 너, 그래서, 불렀단다, 산 것.
수화기 너머로 보이던 것이 웃는 소리를 내며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리고 난생 처음 들어보는, 소란스럽고 복잡한 소리들이 세건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딱딱한 무언가의 위에서 걷는 소리, 천이 서로 비벼지며 내는 소리, 종이가 사정없이 구겨지는 소리, 서로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 했던 아주 큰 소리와 함께, 사람과 사람이 서로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는 대화소리.
세건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소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었다. 자신처럼 숨을 쉬고 움직이고 소리를 내며 살아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소음이었다.
세건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타인의 시끄럽고 낯선 잡음들 속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귀 끝까지 싸늘해질 정도로 (다정하게) 세건에게로 내리꽂혔다.
“세건이니?”
여전히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산 사람에게 처음으로 불리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01.
세건은 수화기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댔다. 남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는다.
“혼자 전보도 칠 줄 알고 많이 컸네.”
“태어날 적에, 넌 제대로 울지도 못 하고 궁둥이만 두드려 맞고 있는 애였는데.”
세건은 이 남자를 몰랐고,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분명히 세건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세건 자신은 모르고 있는) 세건이 세상에 태어난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건은 사람을 몰라 짓고 있는 자신의 죄에 대해 떠올렸다. 그러나 남자는 세건의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건이 모르는, 저만 아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너 첨 보았을 때 거, 뭐냐, 태반만 잔뜩 묻어있는 주먹만 한 핏덩이였다.”
“한참만이지? 얼마 만에 말을 섞고 있는지, 기억이 까마득하다.”
“너도 까마득하니?”
“나가 네게 전보 좀 치라고, 너는 도통 연락이 없다 몹시 을러댄 게 대체 언제인지…….”
“나 살던 집은 오래전에 다 불타고, 동생이랑은 한참 전에 떨어졌어도, 지금은 나가 고국에 있는데.”
“왜 연락이 없었니. 허긴, 할 상황이 아니었갔지.”
“아마, 너가 찾아오진 못하겠다만은, 내 어디에 있는지는 너가 알았으믄 해서.”
“여기가 어디냐면, 종로에서 제일 잘 나가는 다방이다. 서양 술도 팔고 있단다.”
“세건아.”
잘 지내니?
세건은 황급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기에서 쇠가 부딪히는 무겁고 둔한 소리가 났다. 세건은 수화기를 슬쩍 들어 귀에 댔다가,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수화기를 재차 내려놓는다. 세건을 불러냈던 것이 전화기 너머에서 세건을 향해 샐쭉 웃었다. 건아, 들었지, 목소리, 너 아는, 오래된. 세건은 이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들이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는다. 세건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아주 시커멓고, 어둡고, 깊은 색을 가지고 있었다. 세건은 저것이 자신을 해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세건은 전화기를 바라보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네모나게 쪼개진 시야가 깨끗하게 변모하고, 세건을 불렀던 것이 다시금 전화기 뒤에 숨는다. 무엇인가 세건에게 속삭였다. 세건아, 잘 지내니?
세건의 두꺼운 신발이 눈을 밟는 소리가 연속한다. 몹시 청결淸潔한 땅 위에 세건의 발자국이 길게 선을 그렸다가 점점이 떨어진다. ‘모르는 사람이다.’ 아주 잠깐 각지고 새빨갰던 세상이 편평하게 쏟아진다. ‘모르는 사람이다.’ 세건은 몸을 돌려 자신이 몸을 의탁한 건물을 향해 쫓기듯이 달려 나간다.
세건이 멀리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자 세건을 불러냈던 무언가는 이제 완전한 문장으로, 그리고 세건이 최초로 알게 된 타인의 목소리로 세건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건아, 너 아는 목소리다, 세건아, 잘 지내니, 세건아, 많이 컸네, 세건아, 너 첨 보았을 적엔, 세건아, 여기가 어디냐면, 세건아, 세건아…….
온 사방이 세건을 조이고, 세건은 낯선 것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운다. 세건은 이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사람이다. 가쁜 숨을 내쉬는 세건이 자신은 모르는 세계로부터 쫓겨나고.
02.
세건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던 어느 날을 기억한다. 그러나 세건이 기억하고 있는 세건이 태어난 날이라는 것은, 세건의 기억이 시작하는 최초의 지점을 정확히 이르는 말이다. 갓 태어난 세건은 따뜻한 옷을 입고 있었고, 어느 건물 속에서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있던 옷장보다 조금 모자란 키에 열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발가락. 세건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했던 생각에 대해 떠올린다. ‘용케 손도 발도 성하게 다 붙어있군.’ 아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세건은 가끔씩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세건이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던 순간부터 세건은 이 세상에 자신 외의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일 먼저 깨달았다. 얘, 세건아 하고 세건에게 말을 거는 시커먼 것들만이 세건에게 손짓했을 뿐, 생각해보면 아무 도 세건에게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세건은 낯선 것을 두려워하는 방법에 대해 안다. 그리고 동시에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는 방법 또한 함께 알게 되었다. 세건이 태어났을 적에는 아무도 세건이 태어난 것을 알지 못 해서 다만 세건 자신만이 자신이 출생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고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지. 남자의 말에 따르면 세건 자신이 주먹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다. 태반이 몹시도 묻어있던 핏덩이라고도 했다. 키가 크기 전의 세건을 아는 것처럼, (혼자 전보도 칠 수 있을 만큼) 많이 컸다고, 왜 연락이 없나 자신에게 몹시도 을러댔다고, 오래전에 그랬다고, 그러나 세건이 연락할 수 없었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아마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03.
세건은 숨을 고르며 현관문을 닫았다. 실내가 고요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가 마치 몹시 옛날의 것인 양 점차로 멀어지고, 세건은 이제 새로운 눈으로 실내를 둘러본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고, 동시에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는 물건들이었다. ‘생각’해보니 세건은 어떤 방법으로 불씨를 만드는지, 어떤 식으로 나무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세건은 시간을 읽는 방법도,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누군가의 삶이 박제처럼 남아있던 가장 큰 방, 탁자 위에 놓인 것은 칠이 벗겨진 알람시계, 사진이 들어있지 않았던 크고 작은 액자들. 그러나 세건이 그 소용들을 자연스레 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세건은 황급히 큰 방을 향해 달려간다. 누군가가 살아온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세건은 자신의 모든 기억을 되짚어보기 시작한다. 펼쳐지다 굳은 나이프로 통조림을 ‘열어’ 보려고 시도했던 일 : 통조림은 식량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밀봉해두는 것, 알람시계가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보고 아쉬워했던 일 : 알람시계는 시간을 알려주고 동시에 때에 맞춰 이를 알려주는 것, 벽난로 속 부지깽이로 나무들을 들쑤시는 밤 : 바깥에 나가 무언가라도 구해 돌아와야 하는 낮.
세건은 단 한 번도 궁리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보자마자 모든 것이 떠올랐고 세건에겐 그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세건은 다른 어떤 무언가를 궁금해 할 수도, 궁금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세건은 도통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 정확히는 낯선 것들을 낯설다고 받아들인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다. 낯선 공간을 낯설다고 느끼는 것도, 이전까지는 없었던 일이다.
세건은 이제 모든 색 있는 것들을 두렵다고 느낀다. 그저 하얗고 비어있는 세계에서는 색이 있는 것들이 이질적이다. 세건이 모든 색깔 있는 것들에 대해 :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 궁리를 시작한다.
세건은 가장 큰 방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이 아는 ‘이름’들을 이야기했다. 옷장, 탁자, 서랍, 액자, 시계, 침대, 이불, 창문, 창틀, 바닥, 천장, 베개, 사진……. 옷장은 옷을 걸어두기 위한 것, 탁자는 무엇인가 올려두기 위한 것, 액자는 사진을 담아두기 위한 것, 시계는 시간을 알기 위한 것, 잠에 들기 위한 침대, 보온을 위한 이불, 유리는 불투명한 것, 문은 여닫이문, 목조창틀, 나무로 만든 바닥, 나무로 만든 천장, 목을 베는 베개, 그리고 품속의,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은, 나.
세건은 창문을 열어 건물 바깥을 바라보았다. 듬성듬성 보이는 새까만 나무들 너머로 새하얀 눈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바람 한 점 없는 설원 멀리에 세건이 누군가와 대화를 했던 새빨간 상자 하나가 세워져있다. 떠올려보면 세건이 ‘알고 있는’ 날씨라는 것은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창백한 이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을 부르는 새까만 것들뿐이라서, 세건은 태어났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이 세상에 눈이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세상 또한 세건이 세상을 바라볼 때 단 한 번도 세건을 향해 고개를 돌려준 적이 없었다. 희고 빈 세계가 세건의 손을 떠나간다.
세건은 창문을 닫았다. 거대하게 멈춰있는 세계가 닫히고, 그저 방만 남겼을 뿐인 누군가의 껍질 속에 세건의 몸뚱이가 놓여진다. 세건은 자신의 살아가는 법이 이미 몸에 익어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이 온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함께 인지한다. 세건의 의식이 침잠한다. 세건은 인정했다. 세건의 결백했던 세계는 사실 끔찍하고, 아주 결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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