팅커벨








하야코와 내가 같은 반이 된 것은 3학년 때였다. 나는 하야코를 소각장에서 처음 만났다.

3학년이 되어 새로 앉게 된 책상의 서랍 속에는 날짜가 지난 프린트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책상을 탈탈 비운 나는 종이를 버리는 도중 분리수거함 위에 누군가 벗어놓은 살색 스타킹을 발견했다. 그 스타킹은 구멍이 난 것도 아니고 올이 나간 것도 아니어서 언뜻 보기에 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깨끗한 채 버려진 살색 스타킹은 굉장히 지저분해 보였고, 무엇보다 그 때 당시 우리 학교에는 살색 스타킹이 교칙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주위를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분리수거도 제대로 못 하는 범인이 누구인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나는 하야코의 이름을 외웠다. 내가 온 줄도 모르고 황급하게 자리를 뜨던, 벙벙한 와이셔츠에 맨다리였던 짧은 머리 계집애. 초경을 겪은 지 꼬박 이 년이 지났던, 유독 강한 태풍이 지나갔던 해였다.



나는 태풍이 북상 중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초경을 시작했다. 그래서 태풍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생리를 시작한 지 이 년이나 지났지만, 초경이 터진 날 천둥벼락 속에서 하루종일 들었던 남자 캐스터의 태풍예고는 트라우마처럼 나의 뇌리 속에 남아있었다.

덕분에 나는 그 해 여름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강한 태풍이 올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떠들기도 했고, 살색 스타킹을 신고 다니는 하야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기도 했다. 단 한 번도 짝이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냥 하야코가 살색 스타킹을 신고 있는 것이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게 기분이 나빴다. 하야코는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챈 것처럼 불안한 눈빛으로 자주 나를 돌아봤지만, 나는 하야코와 눈이 마주치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싸우지는 않았다. 3학년 1학기가 지나고 여름이 오기 전에는.



우리 교실이 있는 건물 그늘에는 등나무 벤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통나무를 깎아만든 나무벤치 네 개는 썩 매끄럽지 못 해서 울퉁불퉁하고, 새까맣게 때가 타고, 언제 니스칠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래된 상태였다.

등나무 벤치에는 테이블 두 개와 긴 의자 네 개가 놓여 있었는데, 그저 학교 구석에 방치된 상태인 등나무 벤치는 이름만 등나무 벤치였을 뿐 단 한 번도 꽃이 피지 않았다. 다만 점심을 굶은 내가 잠을 청하려거든, 등나무 덩굴의 무성함 사이로 비치는 하늘과 햇살이 꽃처럼 눈이 부셨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 꽃없는 등나무 벤치를 좋아했다. 꽃가루도 꽃향기도 없는 나무였어도, 의자 위에 드러눕고 잠을 청하면 뱃속에서 뒤끓는 온갖 분노들이 모두 가라앉곤 했다.



나는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서도 등나무 벤치를 찾았다. 방학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머지 않은 태풍 덕에 온 공기가 후덥지근한 때, 정수리처럼 차오른 습기 속에서 모두가 아가미를 염원하던 시기였다.

뜨거운 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오는 끔찍한 여름이었기 때문에 나는 하야코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보다 나 자신의 신경줄을 부여잡는 것에 더 급급했다.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반의 모두가 그랬다. 아이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움직여 놀기보다는 에어컨을 킨 채 늘어져 쉬는 일이 많았다. 나는 에어컨이 켜진 교실에 있기보다 수업을 땡땡이치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수업을 등지고 향한 등나무 벤치에서 하야코의 섹스를 목격했다. 더위와 짜증이 내 시야를 하얗게 틀어막았던 시기, 하야코와 같은 장소에 있는 것에 적응한 것 같으면서도 적응하진 못 했던 어느 날의 오후였다.



하야코는 항상 사계절용의 얇은 살색 스타킹을 신고 다녔다. 우리 학교에선 그 무더운 여름날에 스타킹을 신는 것은 하야코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살색 스타킹을 신은 하야코가 통나무 테이블을 붙들고 있었다.

하야코의 허벅지 중간에는 돌돌 말린 하얀 속옷과 팬티 스타킹의 밴드가 걸려 있었다. 하야코의 엉덩이에 붙어 있는 남자가 끙끙거리며 허리를 펄떡이면 하야코는 벤치에 기댄 이마를 비벼댔다. 하야코의 땀냄새가 나에게까지 와 닿을 리가 없는데도 나는 내 코가 떨어질 것처럼 풍겨오는 땀냄새를 맡았다.

하야코가 입고 있는 두 사이즈 큰 와이셔츠는 땀에 젖어 등허리에 달라 붙어 있었다. 하야코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사람의 몸에서 그런 소리가 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 했는데, 운동장에 비라도 온 것처럼 하야코에게서는 젖은 풀을 밟는 소리가 났다. 진흙탕에 빠진 발을 빼는 소리 같기도 하고, 고무가 비벼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하야코의 섹스가 끝날 때까지 멀리서 지켜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등나무 벤치에 하야코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 머리카락에서 타는 냄새가 나는 줄도 모르고 아, 앗, 앗, 앗 하며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숨을 죽였다. 그늘을 벗어난 내 정수리 위에서 햇볕이 불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하야코가 섹스를 끝내고 스타킹을 파는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지켜보았다. 하야코는 섹스가 끝나자 스타킹과 속옷을 벗어 남자에게 넘겼다. 살색 스타킹과 새하얀 삼각팬티, 언뜻 보기에 그것들은 깨끗해 보이기도 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하야코는 남자가 떠난 뒤 치마주머니에서 새 속옷을 꺼내 갈아입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나는 하야코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자기 가랑이 사이에 들어가 움직이고 있던 하야코의 팔뚝이 잊혀지질 않았다. 그저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고, 무어라고 판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를 떴다. 하야코의 땀인지 나의 땀인지, 땀에 잔뜩 젖어 색이 짙어진 콘크리트 바닥이 하루종일 나를 괴롭혔다.

그 날 밤 나는 새까만 콘크리트 바닥 위로 내 온 몸이 녹아 쏟아지는 꿈을 꿨다. 하야코가 앓던 것은 섹스가 아니라 그저 한바탕 몰아친 장마에 가까운 것이라는 걸, 나는 잠에서 깨어난 뒤 깨달았다.



2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 갑작스레 반이 나누어졌다. 교내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있으니 남녀합반이던 교실을 성별로 분반하며 새로 운영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야코의 매춘에 대해 나만 아는 건지 아니면 남들도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사이에선 하야코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다. 나에게 들려오는 말이 없으니 하야코에 대한 아이들의 평가도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반이 나누어졌어도 나는 여전히 하야코와 같은 반이었다. 나는 부쩍 키가 자랐기 때문에 맨 뒤에 앉게 되었고, 덩달아 하야코와 짝까지 되었다.

하야코는 나와 짝이 된 것을 달가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하야코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하야코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남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몸을 파는 애와 말을 섞고 싶지는 않았다.



하야코는 나와 짝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나는 원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별로 없었고, 쉬는 시간에도 수업시간에도 하야코와 나는 자리에 나란히 앉아 엎드려 자거나 창 밖을 보았다. 남들이 보기엔 서로 좋아서 같이 붙어있는 단짝으로 보였겠지만, 나는 하야코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눈 적이 없었다. 나는 그저 하야코에게 말을 거는 것보다 차라리 책상을 공유하는 방법을 택했을 뿐이다. 나는 하야코와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그정도로 싫어했다. 싫어하기보단 두려워하는 것에 가까운 혐오였다.


나는 하야코와 이야기하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야코에 대한 이야기에는 징그럽다거나 혐오스럽다거나 싫다거나 더럽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나는 하야코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았고, 하야코에게 다가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하야코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감정은 별개였다.

하야코가 하는 짓은 내게 모두 낯설었다. 너무 낯선 나머지 무섭기까지 했다. 내 눈에는 낯설고 무서운 하야코가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야코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만큼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그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야코를 파헤쳐준다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하야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단어 하나로 모든 선을 그어버릴 수 있을 만큼 확실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건 여러 경계선 사이에 간당간당하게 걸쳐진, 어렴풋이 알 수만 있고 볼 수는 없는 장마전선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나자 하야코는 눈에 띄게 컨디션이 나빠졌다. 헛구역질을 하는 날도 많아졌다. 그러나 내가 등나무 벤치를 향하려고 할 때마다 하야코는 항상 등나무 벤치에서 몸을 팔고 있었다. 엎드려 있거나, 누워있거나, 올라 타 있거나, 앉아있거나. 나는 하야코가 섹스를 해서 몸이 안 좋아지는 건지 몸이 안 좋은데도 섹스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야코가 몸을 팔고 얼마를 버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야코가 몸을 팔고 있다는 걸 알 수는 있어도, 하야코가 왜 몸을 파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하야코의 섹스가 꺼려졌기 때문에, 하야코가 섹스를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태양볕에 양 뺨이 아프도록 타버리고 살갗이 쩍쩍 갈라져 빨갛게 일어날 때까지 하야코를 기다리면, 하야코는 새빨갛게 익은 내 뺨을 보면서 내게 눈인사를 건네고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하야코가 섹스를 하지 않은 다른 테이블의 벤치에 누웠지만, 나무줄기 사이로 쏘이는 햇빛이 너무 아파서 잠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화를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야코에게 먼저 말을 걸고 말았다. 하야코가 1교시부터 3교시까지 내내 구역질을 해대길래 통로 쪽 자리였던 하야코를 내가 창가 쪽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나는 하야코 쪽의 창문을 열어주면서, 창 밖을 보다가 비구름이 끼거든 창문을 두 번 두드려서 나를 깨우라고 말했다. 구역질이 나거든 밖으로 나가라는 말도 함께. 하야코가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것을 확인하고 엎드렸지만, 나는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하야코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상했다. 하야코의 목소리는 괴물처럼 갈라지지도, 장마를 앓을 때처럼 간드러지지도 않았다. 평범하고, 말 끝이 조금 늘어지고, 멍하게 대답하는 투가 남아있는 하야코의 목소리는 생각만큼 무섭고 충격적이지 않았다. 나는 엎드린 채 그제서야 깨달았다. 몸을 파는 애지만, 섹스를 한 뒤 스타킹을 파는 이상한 애지만, 어쨌거나 쟤도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냥 조금, 몸을 팔아도 별 쑥쓰러움 없는 다른 세계에서 사나. 나는 뒤늦게 찾아온 벌거벗은 것만 같은 부끄러움보다도 내장을 토하는 것처럼 끝도 없이 나오는 하야코의 욕지기가 더 싫은 것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그 이후로 하야코의 헛구역질은 그 전보다 훨씬 빈도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하야코는 나와 이야기가 하고 싶을 때 창문을 두 번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야코가 창문을 두드리면 나는 하야코를 바라보거나, 교과서의 한 구석을 하야코에게 내밀었다. 그러면 하야코는 귓속말로 무언가를 말하거나, 하얗고 깨끗한 교과서 위에 둥글둥글한 글씨를 썼다. 나는 그런 하야코의 질문에 짧게 대답하거나, 심이 얼마 남지 않은 싸구려 샤프로 대충 대답했다. 그렇게 짧게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하야코는 충분히 기뻐보였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걸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내용없는 대화라도 듣고 말하는 걸 그렇게나 좋아하는데, 여태까지 용케 입닥치고 조용히 살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긴 대화를 나누지 않는 만큼 단편적인 정보만을 공유했다. 나는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지만 하야코는 분홍색의 손수건이 주머니에 있었고, 하야코는 비상약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지만 나는 가방 앞주머니에 진통제 두 알이 들어 있었다.

나는 하야코가 한 번 섹스를 할 때마다 버는 돈이 팔천 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야코도 내 생리가 팔 개월 째 나오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야코는 내가 태풍을 싫어한다는 걸 눈치챘고, 나는 하야코가 점심을 굶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야코는 내가 하교할 때마다 내게 벱시 한 병을 쥐어 주게 되었는데, 그런 날이면 나는 하야코가 등교하기 전에 하야코의 책상 서랍 속에 에너지바를 넣어두었다.

얼마 안 있어 나는 하야코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에너지바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야코가 지금 입덧을 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알게 되었다. 하야코는 임신 9주차였다.



하야코는 아이의 부모를 모른다고 했다. 국어시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국어선생이 애틋하게 낭송하는 고시를 듣다가, 네 뱃속에 있으면 아빠는 몰라도 엄마는 알지 않느냐고 말했다. 네가 엄마 아니야? 그러자 하야코는 배시시 웃으며, 이 만엔만 더 모으면 나는 엄마 아닌걸 라고 적었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하야코는 계속 창문을 두드렸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교과서를 내밀지도 않았다.

거꾸로 돌려진 교과서에는 하야코의 글씨가 빼곡하게 그러나 조그맣게 적혀있었다. 9주, 사진 보여줄까? 초음파 사진 말야, 이상하게 생겼어, 모르겠어, 글쎄에, 이 만엔만 더 모으면 나는 엄마 아닌걸.

하야코는 내가 고개를 돌리지 않자 포기하고 다시 턱을 괸 채 창문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하야코가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하야코의 책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야코가 내려놓은 분홍색 볼펜은 잉크만 가득 찬 채 껍데기에 그려진 키티를 반만 보여주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진 것은 그 펜 한 자루가 전부였다.

나는 읽지도 못 하는 시들 사이에 자잘하게 가득 적힌 글씨들을 계속 읽었다. 9주. 동그랗게 휘어진 분홍색 숫자가 도장처럼 내 눈 위를 지지는 것 같았다. 9주. 하야코의 글씨는 지우개로 지워지지도 않았다.



그 날 이후 나는 일주일동안 빠짐없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태풍이 오자 생리도 하지 않는 자궁이 아파왔다. 내가 하야코처럼 헛구역질을 하자 하야코는 걱정스럽게 내 등을 두드렸다. 나는 하야코가 창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비가 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교실 안 공기가 빗물 비린내로 가득 차고, 플라스틱 우산 한 자루가 하야코의 책상 한구석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국어선생은 시낭송을 자주 끊게 되었다. 바람이 부는 소리가 휘파람처럼 교실을 훑고 천둥이 모두의 눈을 가릴 때면 하야코는 나를 끌어 안았다.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는 동안 하야코는 오히려 동상처럼 입을 다물었다.

내 코 끝에서 하야코의 교복 냄새가 멀어지는 날이 없었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서는 분홍색 글씨가 떠나가지 않았다. 9주, 이만 엔, 9주, 이만 엔, 9주, 이만 엔, 9주, 이만 엔. 온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와중에도 분홍색 글씨들만 선명하고 뚜렷했다.



나는 입덧을 하는 하야코 대신 점점 말라갔다. 하야코는 그렇게 굶고 챙겨 먹지 않으면서도 살만은 신기하게 빠지지 않았다. 하야코의 허벅지를 움켜쥐면 잡히는 살들이 하얗게 질렸고, 스타킹을 신다가 손톱에 걸려서 올이 나가는 일도 여전했다. 내가 책상에서 일어나지 못 하게 되면서 하야코에게 달라진 일이 하나 있었는데, 하야코는 5교시 종이 치면 어느 빼빼 마른 남자애와 교실 뒷문에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남자애는 안절부절하지 못 하면서도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지 못 했다. 나는 그 남자애가 주머니 속에 콘돔이나 지갑 둘 중 하나를 넣어두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하야코는 그저 이야기만 하다가 다시 내 옆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누구냐고 묻자 하야코는 그냥 내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하야코는 어느 순간부터 잠깐 자리를 비우더라도 여전히 살색 스타킹을 멀쩡하게 신고 있게 되었다.



태풍이 그치고 비가 오지 않은 며칠 사이에 우리는 자습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등나무 벤치에 갔다. 날씨가 선선해지니 오히려 한여름보다 나무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러나 나도 하야코도, 등나무 벤치에서 나무냄새를 맡으면서도 둘 중 어느 하나 섹스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없었다.

나는 이 주에 걸쳐 관찰을 하면서 그 빼빼 마른 남자애가 하야코를 임신시킨 새끼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하야코가 몸을 파는 장면을 여러 번 봐왔지만, 그 새끼가 하야코를 사러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의식 밑에 묻혀있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괴로운 일이 꼭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하야코와 관련된 것들이 떠돌아 다녀서 그렇기도 했고, 하야코의 비명소리만 내 귓가에 울려서 그렇기도 했다.

나는 하야코가 임신기간에는 콘돔을 쓰지 않는 대신 천 엔을 더 받기로 했다는 것을 그 새끼를 통해 알았다. 하야코가 스스로 말했다고 했다. 하야코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고 어차피 낙태를 할 것이기 때문에 낙태비용을 위해 그렇게 결정했을 거라는 걸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새끼는 하야코가 임신을 한 것을 알고 있었다. 하야코가 임신하기 전, 콘돔을 꼬박꼬박 쓰는 대신 천 엔을 덜 받기로 하던 시절에, 오천 엔을 더 내고 콘돔을 안 쓴 사람이 자기라고 했다. 하야코가 임신을 했다면 분명히 자기 아이일 거라고, 그래서 낙태비용을 보태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하야코는 더 이상 돈을 받고 대주지 않을 거라고 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낙태수술을 받을 거니까, 최소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섹스하지 않을 거라고도 덧붙였다. 그 정도까지의 태아가 두 사람이 낼 수 있는 낙태비용의 마지노선이라고 했다.



하야코는 이 등나무 벤치에서 몸을 팔았으면서도 등나무 벤치를 좋아했다. 섹스를 좋아하거나, 아니면 몸을 파는 걸 좋아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뱃 속에 들어있는 아기가 불쌍해서 등나무 벤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 나처럼, 그냥 이 등나무 벤치에 누워서 연보라색 등꽃처럼 반짝이는 하늘을 생각없이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 뿐일 것이다. 나는 등나무 벤치에 엎드린 채 얕은 잠에 빠지고 있는 하야코를 내려다 보았다. 하야코의 통통한 뺨 위로 어느새 끝나가는 가을의 하얀 햇살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하야코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하야코가 낙태를 하러 병원에 가면, 나는 그냥 내 방 침대에 가만히 누워 낙태인사를 생각해내기로 했다. 고생했어, 힘내, 다음부터 조심해, 낙태 축하해. 나는 이 구멍 뚫린 소통만이 나와 하야코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풍은 우습게도 금방 지나갔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더니 내게 이렇게나 짧은 순간만을 남겨두고 가버렸다. 옆을 힐끔 바라보자 하야코는 예의 그 분홍색 볼펜으로 사각사각 답안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잉크가 가득 찬 중성펜이 움직이는 모양새를 보다가, 나는 창문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이미 되는 대로 문제를 풀어놨기 때문에 더 해야 할 일도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모르는 것은 대충 채워넣고, 알 것 같은 것도 대충 채워넣었다. 어차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사랑을 이야기하던, 어느 제목 모를 고시 하나가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기말고사가 끝나자 하야코는 사라졌다. 학생부에 무어라고 이야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선생들도 하야코의 출석은 부르지 않았다. 나는 하야코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 창문을 두드리며 시간을 보냈다. 태풍이 지나간 흔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늘은 정말 그렇게도 새파랗고 눈부신 색이었다. 연보라색도 연자줏빛도 아닌, 두 눈이 타 들어가는 것처럼 새파랗게 물이 빠진 가을과 겨울 사이 흐린 경계선. 나무줄기 사이로 틈틈히 바라보던 환상 속 등꽃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하늘은 청순하지도 은은하지도 않았다. 칼처럼 벼려지고 상처처럼 날카로운 쓰라린 파랑.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하야코의 책상서랍을 뒤졌다. 하야코의 책상서랍에는 언제 먹고 뜯었는지 모르겠는 에너지바 비닐 여러 개와, 언젠가 내가 건네주었던 진통제 두 알의 포장껍데기가 튀어나왔다. 나는 그 잡동사니 쓰레기들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소각장으로 향했다. 몇 달 전 내가 발견했던 그 지저분한 살색 스타킹이 올려져 있던 분리수거함. 나는 쓰레기를 옮기는 리어카를 지나고, 유리, 캔, 페트, 종이라고 이름붙은 분리수거함을 지나서, 태울 것들만 모아 넣어두는 소각로 앞에 다다랐다.

국어선생이 읊어주던 사랑시가 자꾸 귓가에 울린다. 고막을 찢을 듯이 나를 뒤흔들던 천둥소리 대신 뜻도 모르고 제목도 모르는 사랑시만 나의 귓바퀴에 남게 되었다. 뜻도 모르고 제목도 모르지만, 그게 사랑시라는 건 어떻게든 알겠다. 듣는 사람이 가슴이 메이면 그게 사랑이고, 그게 상처고, 그게 트라우마고.



나는 환상 속 남자 기상캐스터의 일기예보를 들었다. 그리고 하야코가 창문을 두드리는 환청도 들었다. 트라우마가 생겨나던 그 순간이 무의식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천둥벼락이 치고 배가 아프고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왔던 화상같이 끔찍한 내 첫 생리통.

허벅지 위로 핏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린 시절 속 어느 날의 밤, 손수건이 없는 나와 진통제가 없는 하야코. 한여름 폭풍우 속 등나무 벤치에 앉아 있는, 생리를 하지 않는 나와 낙태를 하고 있는 하야코. 내가 꼭꼭 씹어 삼켜왔던 모든 분노와 서러움들이 한꺼번에 자궁에서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대칭 같았던 우리는 완벽하게 소통하지도 완벽하게 교감하지도 못 했지만, 평생 첫사랑을 이루지 못 하게 된 나처럼 하야코도 평생 첫 아이를 키우지 못 하게 되었으니 적어도 앞으로의 우리 삶 만큼은 무섭도록 평생 서로 닮게 될 거라고.

나는 눈물을 터뜨렸다. 창문을 두 번 두드리고 내게 말을 걸었던 나의 팅커벨. 아마 두 번 다시 창문을 두드리지 않을, 흉터처럼 나를 할퀸 나의 첫사랑. 나는 상상 속의 비바람 소리와 함께, 내 주머니 속의 쓰레기들을 잿더미 위로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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