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죽으면 내 무덤에 꽃 한 송이 놓아줘요. 어느 시인이 남긴 말이었는지 오래도 간다. 나 죽으면 죽는 거지 꽃은 무슨 꽃이야. 죽는 길에 무언가 남기는 건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태어나 세상에 흔적을 남겼으면 살다 떠난 자국 따위 아무려면 어떻겠냐고, 사뭇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날 것의 나는 비리도록 어렸다. 나 자신이 언젠가는 세상에 깊숙한 발자국 하나 남길 것이라는 우주같은 오만함, 어차피 세상은 다 치고 받고 싸우는 것이니 거창한 유언같은 것은 패배자가 남기는 미련같은 것이라고.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새하얗고 복슬복슬한 꽃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꽃이었다. 꽃, 시인과 화가가 사랑하는 생식기. 봄만 되면 눈아프게 사르르 터져나오는 살. 죽은 토끼의 무덤 위에 하얀 꽃이 거스러미 일어나듯 가볍게 놓였을 때, 나는 이제 흰 꽃을 보면 그자리에서 욕지기를 하기로 생각했다.
내게 꽃은 그런 것이었다.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에게 눈물을 쥐어짜내는 것. 가슴 속이 뚫린 사람에겐 부재의 피딱지를 자꾸만 떼어내는 눈치없는 것. 수치도 모르고 부어오르는 것. 어떻게 열매를 맺어내는지 자신은 알지도 못 하는 멍청한 것. 나는 고등학교 이 학년 말까지만 해도 토끼가 뜯어먹는 토끼풀을 바라보며 점심에 먹은 것을 끊임없이 게워냈다.
단 한 번도 꽃을 쥐지 않았었던 나의 못된 일 년. 그리고 네가 내게 처음으로 건네줬던 어느 잡풀. 난 아직도 잠들기 전 그 꽃을 기억해낸다. 손톱만한 크기에 뭐 그리 많다고 네가 자꾸 재채기를 했는지, 내 발치에 놓여진 한웅큼의 애기똥풀을 보고서야 나는 네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는 옷소매로 코 끝을 자꾸만 닦아냈고, 나는 네게 손수건을 하나 사줘야하나 무심결에 생각했었다. 아마 너는 토끼가 무슨 풀을 먹어도 괜찮은지 관심조차 없었겠지. 그러니 꺾인 줄기 끝에서 두 어 방울 눈물이 나오는 줄도 몰랐을 거다. 나는 토끼를 위한 너의 단순한 꽃다발을 몰래 등뒤로 숨겼고, 네놈 토끼나 가져다 먹이라던 너의 말은 내 호주머니 속으로 슬쩍 쑤셔 넣어버렸다. 토돌이 선, 아니. 네 생일선물. 나는 네가 이유없이 내게 무언가를 건네기 싫어함을 명백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석 달이나 남은 내 생일을 괜히 앞당겨 챙긴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나 또한 이 노랗게 우는 꽃을 토끼에게 먹여도 되는 것인지 잘 알지를 못 해서, 토돌이의 입가에나 스리슬쩍 꽃잎을 문댔을 뿐 꺾어 먹이지는 않았어.
꽃을 벽에 걸면 벌레가 생긴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진 어느 누구도 모르지만 시멘트 벽면에 말린 꽃을 거꾸로 묶어 달면 꽃은 화장하는 것처럼 벌레와 함께 가루가 된다고 했다. 죽어있는 꽃인데도 벌레가 꼬이는 정확한 이유를 아무도 알지 못하듯이, 나 또한 내 사춘기가 시작된 정확한 날짜를 눈치채지 못 했다. 밤마다 내 다리 사이에 낯선 열대야가 찾아왔을 뿐을 막연히 눈치챘을 뿐, 언제부터 내 혀 끝에 사랑이 사탕처럼 달라 붙어 있었는지. 그래서 네 팔뚝이 내 손가락을 물처럼 흘러내렸던 날은 나의 냉소적인 유년기의 종말일이었다. 세상을 삼킬 듯이 울어대는 네 모습과 너를 안고 같이 울고 싶던 그 순간의 나. 너와 함께 물에 빠지고 싶었던 이름모를 비참함. 내 눈물을 너에게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죽고 싶을 만큼 서러웠던 때. 더이상 너에 대한 눈물이 부끄럽지 않게 되면서, 나는 그제서야 내가 겨우 한 살 나이를 먹었음을 알게 되었다.
너와 다른 학교로 진학하고 난 뒤 나는 매일같이 꽃이 새겨진 나의 관을 생각했다. 그리움이라고 말하지도 못 할 정도로 앳되었던 나의 그리움, 네가 숨을 쉴 때마다 너 모르게 건넸었던 청춘의 씨앗. 내 죽은 몸과 나무꽃이 함께 묻힌다면 흙밖에 보지 못 할 조용한 내 정리정돈에 너에 대한 내 마음도 남김없이 개켜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의 관을 나 스스로 짤 수 없기에 나는 나의 관짝 대신 네 손 끝을 열 손가락 조각하고 싶었다.
이제 겨우 불이 붙어 반숙되고 있는 내 마음의 난포. 나는 매년마다 올해 내가 혹시 몰라 죽을 것을 기대하며 내 묘비에 적을 문구를 오 년 째 생각하고 있다. 깔끔한 글씨, 손으로 쓴 것처럼, 깨끗하게,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적 없었던 내 지나간 사춘기같이. 선생님, 내가 만약 내일 숨을 거둔다면, 풀도 안 난 내 묘비엔 이렇게 새겨주세요. 사망원인 : 짝사랑, 야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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