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에 해당되는 글 1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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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14 비난자에 대한 비난 샘플
- 2014.07.21 옷장
- 2014.07.12 재의 수요일
- 2014.07.04 키워드
- 2014.07.01 나무꽃
- 2014.06.30 프리다칼로(카웟님 리퀘)
- 2014.06.29 어바웃체리(츠게님 리퀘)
- 2014.06.22 릴리즈콜2(초모님 리퀘)
- 2014.06.22 초경
아웃팅을 당했다.
시작은 손편지였다. 2학년 신카이 하야코가 같은 반 아라키타 야스토모와 섹스를 합니다. 얼기설기 서툴게 쓴 분홍색 손편지는 믿음직스럽지 못 했는데도 온 학교를 뒤집어 놓았다. 어린 애가 쓴 것처럼 삐뚤어진 글씨가 손바닥만한 편지지에 가득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와 신카이의 책상에만 편지가 올라와 있어서 그랬는지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2학년 신카이 하야코가 같은 반 아라키타 야스토모와 섹스를 합니다. 그 둘은 레즈비언입니다. 2학년 신카이 하야코가 같은 반 아라키타 야스토모와 섹스를 합니다. 그 둘은 레즈비언입니다. 2학년 신카이 하야코가 같은 반 아라키타 야스토모와 섹스를 합니다…….
나는 교무실에 다녀오자마자 그 편지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악질적인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악질만도 못 한 장난이기도 했다. 내가 되려 찔려 여기서 화를 낸다면 이 더러운 스캔들이 모든 아이들에게 알려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의연한 척 할 수 있었던 나와 달리 하야코는 편지를 펼치고 읽자마자 바로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무릎이 까지는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하고 있던 하야코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내게 쏟아지는 낯선 시선들은 순식간에 나를 총알받이로 만들었다. 야스토모, 나더러 레즈비언이래. 나 레즈비언이래 야스토모. 어떡해, 나 어떡해.
나는 그 날 부로 레즈비언이 되었다. 정확히는 하야코를 좋아해서 레즈비언인 레즈비언이 되었다.
나와 하야코의 책상에만 올라오던 분홍색 편지지는 점점 갯수가 늘어났다. 두 개에서 세 개로 세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나던 편지는 학기의 마지막 날, 드디어 우리 반의 모든 책상 위에 올라왔다. 직접 써서 삐뚤빼뚤하고 분홍색 스티커로 밀봉되어 있던 손편지는 봉투도 없이 깔끔하게 프린트 용지로 바뀌어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가정통신문같이 느껴져서, 나는 교실 문을 열자 마자 우리 반 담임이 미리 통신문을 돌려 놓은 줄로만 알았다. 창문이 모두 열린 텅 빈 교실 속에 하얀 종이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 낯선 풍경. 말 한 마디 나눠본 적 없었던 옆 자리 계집애가 멀찌감치 책상을 떼어놓는 것을 시작으로 나와 하야코는 투명인간이 되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나와 하야코를 따돌리기 시작한 후에는 일말의 목적을 달성한 듯 편지가 잠시 주춤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너, 진짜 레즈비언이야? 아니지? 하고 용기있게 물은 바로 그 다음 날 고발편지는 다시 매일같이 학교로 날아들었다.
하야코는 편지가 오는 날에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거든 덩달아 자리를 박차고 나를 따라다녔을 뿐이다. 하야코는 차마 내 옆에 설 자신이 없어 안절부절한 모양으로, 그러나 나에게서 멀어지지는 않았다. 야스토모, 야스토모 어디 가? 야스토모, 같이 가, 야스토모.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없으면 무서워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모르는 척 하는 내가 무서워서 말을 걸지 못 한다는 것은 일찌감치 눈치챘다.
나는 그런 하야코가 얄미웠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야코는 꾸준히 내게 눈으로 말을 걸었다. 하야코가 불안해 하는 것이 나에게까지 전해져왔지만, 나는 그런 하야코를 모르는 척 자리를 피했다. 하야코에게 미안한 마음보다도, 감정에 못 이겨 나와 자기 자신을 수렁에 빠뜨린 하야코에 대한 원망이 조금 더 컸기 때문이다.
2학년을 마치고 3학년이 되어서 나와 하야코는 반이 바뀌었다. 그러나 나나 하야코 둘 중 하나가 교실을 비우는 날에는 어김없이 한 쌍의 편지가 찾아왔다. 까끌까끌한 재질의 편지봉투와 분홍색 하트스티커. 나는 굳이 책상이 보일 때까지 다가가지 않아도 편지의 유무 정도는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하야코는 3학년에 올라와서 예전보다 더 많이 자주 울기 시작했다. 홀로 유리된 학교생활이 많이 힘든 모양이었다. 하야코는 내가 보이지 않아도 울고 내가 보여도 울었다. 불안했다거나, 답답하다거나, 잘 모르겠다거나, 하다못해 배가 아프다거나. 온갖 사소한 이유를 들어가며 서러움을 정당화하는 하야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미안해, 야스토모까지 끌어들여서 미안해. 내가 널 좋아해서 그래. 내가 너 좋아하는 거 티를 내서 그랬나봐. 그런데 도대체 누군지 모르겠어, 누가 나한테 이러는지 모르겠어, 미안해, 미안해 야스토모.
나는 하야코가 혼자만 괴롭힘을 받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미웠다. 실제로 나와 하야코가 받은 편지는 두 개였다. 내 몫의 편지와 하야코 몫의 편지. 나는 하야코의 책상 위에 올라와있는 편지에 어떤 내용이 적혀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하는 말로 미루어봐서 나와 별반 다른 내용이 적혀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혼자만 죄를 지은 듯이, 마치 혼자서 잘못한 것인양, 나와 걔가 서로 좋아하는 것이 자기 자신만의 범죄인 양 우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하야코가 자책하는 모습보다 울다 지쳐 숨을 헐떡이는 하야코의 모습이 내 살을 더 저몄기에 차마 싫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편지를 받기 시작하고 나서 그리고 3학년이 되고 나서 하야코는 스킨쉽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우리는 편지가 오는 날엔 무조건 키스를 했고, 편지가 오지 않은 날에도 가끔 키스를 했다. 키스를 하고 숨이 너무 차면 손을 잡았고, 손을 잡다가 땀이 차면 서로를 끌어안았다. 하야코는 어떤 식으로든 나와 살이 닿아있어야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손가락 하나라도 팔뚝 살갗 하나라도 닿아있지 않으면 하야코의 안색은 금방이라도 거품을 물 것처럼 창백해졌다.
하야코가 내 눈 앞에서 편지를 보고 공황장애를 일으켰던 전적이 있었기에 나는 일부러 스킨쉽을 더 늘렸다. 대신 최후의 마지노선으로, 남들 눈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하야코를 끌고 들어갔을 뿐이다. 우리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둘만 더 자주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허벅지를 만지고, 그러고도 견딜 수 없어 정말 괴롭고 힘든 날에 섹스를 했다. 서로가 서로를 만지는 시간에는 하야코도 나도 학교에 관한 것은 모두 잊을 수 있었다. 하야코의 체육복이 찢어진 채 발견되어 내 것을 빌려 입어도, 이미 에이즈에 걸린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어도, 사정이 그렇게 되었으니 기숙사에 더 있긴 힘들지 않겠냐고 기숙사 사감이 회유한 날에도, 어쨌거나 섹스를 하고 나면 날이 바뀌어 있었고 그게 좋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통학을 시작한 나는 하야코와 줄지어 걷는 대신 어깨를 붙이고 걷기 시작했다. 앉을 일이 생기면 하야코의 옆자리에 허벅지를 붙이고 앉게 되었다. 하야코는 예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의연하게 외로움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없어도 가만히 교실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하야코는 이제서야, 어쩔 수 없이 해소할 수 없는 외로움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나는 쓰레기통에 버린 첫 편지를 제외한 나머지 편지들은 모두 모으고 있었다. 하야코는 내가 수집하는 분홍편지들을 단 한 번도 직접 만지는 일이 없었다. 다만 조용히, 그리도 억울한 눈빛으로 나와 편지를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고 숨을 참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야코가 편지들을 무서워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야코는 편지를 펼쳐보고 주저앉을지언정 편지를 집어 들고 내다버릴 강심장이 못되었다. 하야코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대응하기에 서툴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지 몰라서 수습을 못 하는 애였다. 하야코는 누군가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저 무서워하기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하야코는 악의가 무서워 울음을 터뜨렸을 뿐,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했다.
나는 아마 책상 위에 올라가있는 것이 편지가 아니었어도 하야코는 그걸 버리지 못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바라보는 하야코는 멍청하고 순진해서 가끔 짜증나는 애일뿐이지만, 나는 하야코가 어느 누구보다도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느 날 하야코의 가방이 망가진 채 소각장에 버려진 것을 목격했을 때, 그리고 그 속에 분홍편지가 한가득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조용히 가방을 도로 닫았다.
날이 추워지자 하야코가 나 없이도 혼자 다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나와 하야코가 어두운 곳을 찾아 숨는 일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물을 채운 콘돔에 맞거나 비눗물이 끼얹어지는 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지메는 오히려 더 깊숙이, 성적인 영역에서 심해졌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들과 싸웠고, 하야코는 내 앞에서만 세 번 강제로 팬티가 벗겨졌다.
괴롭힘이 심해져서인지 편지를 가방에 집어넣고 다니는 하야코의 이상한 습관은 바뀌지 않았다. 하야코의 이상한 강박관념이 편지를 두려워하는 행위인 건지 박제를 하는 행위인 건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야코의 새 가방에서 떨어지는 분홍색 편지를 두 어 개 주워 그것들을 내 책장에 따로 꽂아두는 일 뿐이었다.
하야코는 내가 허벅지에 그려진 낙서들을 지워주자 많이 울었다. 너 지금 누군지도 모를 년한테 시위하냐? 나는 눈물로 투명해진 하야코의 소맷자락을 걷어주며 이야기했다. 네가 울어봤자 너만 손해고, 네가 그렇게 무서워해봤자 너만 손해라고. 나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 그 년도 그냥 포기하고 잊을 거 아니야. 울지 좀 마. 왜 자꾸 울어. 그냥 잊게 하면 되는 건데 네가 자꾸 울면 그게 힘들어지잖아. 하야코는 여전히 새빨개진 눈가로 내게 웃어 보였다. 아니야, 야스토모. 내가 안 울어도 걔는 포기 안 할 거야. 걔는 그냥 내가 싫은 거야. 내가 싫어서 너를 괴롭히는 거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네가 아니라 우리인 거고, 그 년은 그냥 우리가 싫은 거고. 차마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범인이 우리를 싫어하는 것 정도는 당연했다. 우리를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다면, 이렇게나 꾸준히 일 년도 넘는 시간에 걸쳐 나와 하야코를 철저히 고립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하야코가 두려워하는 것은 범인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하야코는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이 무서운 것이다.
하야코는 맨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내가 말아준 대로 오른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붙인 하야코는 내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5교시를 조퇴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저녁까지 하야코를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두 달 동안 하야코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 달의 첫주를 실연당한 사람처럼 내내 울었다. 그리고 두 번째 주는 엄마를 잃은 사람처럼 문득 울었다. 혹시라도 장난처럼 다른 반에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하야코마저 나를 괴롭히려는 건지, 실마리조차 찾을 수가 없어서 오히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하야코가 사실 나를 싫어했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원래 하야코는 내 상상 속의 인물이었나? 아니면 내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악몽을 한 달 동안 꾸고 있는 건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핸드폰을 확인해도 발신내역과 발신메일만 잔뜩 쌓일 뿐, 하야코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전화 한 통화 메일 한 통 받지도 못 한 핸드폰에 충전기를 꽂는 것이 그렇게나 억울한 일인 것을 난생처음 알았다.
나는 그렇게 한 달 동안 복도를 걸었다. 곧 죽을 사람처럼 셋째 주를 지내고 피라도 대신 내어 울고 싶은 사람처럼 울지도 못 하고 한 달을 채웠다. 마치 태어나지 못 한 사람같은 끈적끈적한 시간이었다.
하야코가 홀연히 사라진지 한 달 만에 학교는 통째로 뒤집어졌다.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회의실에 호출된 나는 내가 모아온 편지들을 모두 가져갔다. 책상 위로 쏟아지는 편지들은 하나같이 신선하고, 꿈틀거리고, 갓 잡은 돼지고기처럼 분홍색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없는 하야코를 대신해 하야코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든 일을 말했다. 물이 담긴 콘돔을 맞았던 일, 비눗물을 맞고 미끄러져 손목이 부러졌던 일, 강제로 치마가 찢어졌던 일, 남자애들 앞에서 팬티가 벗겨졌던 일, 허벅지에 AIDS 라고 잔뜩 낙서당한 일. 낙서는 남아있지 않지만 어디에 적혔는지 보여줄 수 있다며 치마를 걷어 올리자, 교실 맨 뒷자리에서 일어나던 모든 일들을 모르는 척 방임하던 담임선생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징계를 받았다.
도덕과목을 담당하는 여선생은 내 양손을 붙들고 눈물을 터뜨렸다. 그 여자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진정으로 모르고 싶던 것 같았다. 도덕선생은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로 하야코보다도 많이 울었고, 마치 연기하는 것처럼 울며 실신했다. 그리고 한동안 교무실에 앉아있는 남선생들 사이에서 담배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하야코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괴롭힘을 주도했던, 나와 자주 얼굴을 마주하던 아이들 몇 명이 졸업을 앞두고 정학처분을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나머지 한 달을 차마 죽지 못 한 사람같이 도로를 걸었다. 하야코를 찾아다니느라 한 달을 통째로 출석을 빠졌다. 나는 살이 많이 빠졌고, 살이 빠진 만큼만 많이 울었다. 모든 일이 끝난 것 같았지만 하야코가 돌아오지 않았기에 모든 일이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두 달 만에 듣는 하야코의 목소리는 묘하게 가벼웠다. 그 흔한 안부인사 한 마디 없이 하야코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편지의 행방부터 물었다. 나 지금 너 보고 싶어, 너 미쳤어? 지금 장난해? 너 지금 어디야, 빨리 말해, 보고 싶어, 만지고 싶어, 다 끝났어, 빨리 말해 제발, 하야코 너 지금 어디야. 온갖 말이 입 속을 떠다녔지만 생각이 너무 많아지자 오히려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내가 뭐라도 말 한 마디 잘못 삐끗한다면 하야코가 다시 연락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
“야스토모, 편지 다 버렸어?”
“아니야, 안 버렸어, 나 아직 모아놨어.”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야? 너 지금 어디야?”
“그것보다, 전에 있었던 분홍색 편지 좀 찾아줄래? 내가 지금 그 편지 때문에 죽을 거 같아서 그래.”
하야코가 있는 곳은 바람이 많이 부는 것 같았다. 하야코의 숨소리보다도 더 거친 바람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내게 전해졌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파악하지 못 하고 하야코가 죽는다는 소리에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숨을 참으면서, 하야코가 섣불리 끊지 못 하도록 계속 말을 걸면서, 엉망이 되어있는 책상서랍 속에서 하야코가 말한 편지들을 찾았다. 낙서된 교과서들과 찢어진 공책, 다 말라비틀어진 볼펜, 반이 통째로 부러져있는 육각연필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구석 언저리에 편지들이 담긴 종이상자가 보였다.
“야스토모, 편지 찾았어?”
“어, 어. 찾았어, 찾았으니까, 내가 거기 갈게, 내가 지금 가져갈게. 너 어디야? 지금 시내야?”
“아니야 야스토모. 여기까지 안 가져와도 돼. 야스토모가 그거 읽었나, 궁금해서. 편지 읽었어?”
하야코는 웃었다. 하야코가 웃자마자 통화가 힘들어질 정도로 바람이 크게 불었다.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아니야, 나 이거 안 읽었어. 처음 말곤 한 번도 읽어본 적 없어.
“그러면 지금 편지 한 번만 나한테 읽어줘.”
나는 상자 속에 가득 담겨있는 분홍색 편지들 중 맨 위에 놓여있는 편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밀봉이 되어있는 하트 스티커를 긁어 떼어내자 봉투보다 조금 옅은 색깔의 편지지가 드러났다. 나는 스피커를 켜고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양 손바닥에 식은땀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세 번 접혀있는 편지지를 펼치자, 여전히 삐뚤빼뚤하게 적혀있는 글씨가 보였다. 야스토모에게.
“야스토모, 에게…….”
“…….”
“미안해…….”
“…….”
“이……. 편지…….”
“내가 쓴 거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온 세상이 찌그러지는 것처럼 현기증이 느껴졌다.
“글씨를 너무 못 써서 좀 민망해서, 나는 못 읽겠어서.”
야스토모에게.
“듣고 있어?”
미안해.
“내가 그냥 죽으면 야스토모는 언젠가 날 잊을 테니까, 그 편지 내가 썼다고 알려주고 싶었어.”
레즈비언이라고 헛소문 퍼뜨려서.
“나 지금 야스토모네 자취방 옥상이야.”
야스토모가 레즈비언 아닌 거 아는데, 너랑 나랑 둘만 남고 싶었어.
“여기 너무 높아서 무서워.”
내가 아플 때마다 네가 나를 챙겨주는 게 너무 좋았어.
“그래도 나 죽으면.”
내가 아플 때만 네가 내 것 같았어.
“나 기억해줄거지?”
이해해줄 수 있지?
“안녕.”
수화기 너머로 갯벌에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창문을 열지도 못 한 채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고만 있었다.
비난자에 대한 비난 샘플
※총 10P 중 2P 내용입니다
“일단 속바지부터 벗겼다고 했어요.”
“속바지?”
“네 속바지요. 치마 밑에 받쳐 입는 거. 기모였다고 하던데요.”
“다짜고짜?”
“먼저 뒤통수를 내리쳤대요. 어떤 걸 휘둘렀는지는 끝까지 말을 안 했어요. 짜증나는데 또 그걸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본인이 입을 다무니 추궁하지도 못 해요, 묵비권 행사라서.”
“그래서?”
“아니 선배님도 아시잖아요, 저 애들 못 다루는 거. 거기서 제가 뭐 어떤 말을 더 하겠어요. 아 그래, 그렇구나. 그래서 어떻게 됐니? 그냥 대충 때우고 다음으로 넘어갔죠. 그래도 같은 여자라고 선배님보단 제가 나은 거 같네요. 흉기 말곤 다 불었어요.”
“차근차근 얘기해 봐.”
“일단 그 날은 학교 전통인 졸업레이스가 있는 날이었대요. 날씨가 좀 추웠고, 피해자와 함께 산에 올랐고. 본인도 피해자, 그러니까 자기 선배랑 같이 산을 오르면서 마음정리를 다 했다고 했어요. 여기엔 뒷얘기가 좀 있나 봐요. 자기도 피해자도 똑같이 자전거 선수였는데, 대회문제로 둘 사이에 조금 트러블이 있었다고. 자존심은 있는지 자세히 얘기는 안 했는데 뭐 대회성적 때문이라 그러던가.”
“…….”
“그래서 레이스가 다 끝난 다음 기념사진을 찍고 선배들이랑 인사도 하고 그러고서 부실에 돌아왔다가 잠깐 밖에 나왔는데, 피해자가 남자친구랑 전화를 하고 있었대요. 그게 너무 화가 났다고.”
“단순히 그거 때문에?”
“이상하게 촉이 왔대요. 오늘은 그 선배가 일찍 방에 돌아가지 않겠구나, 이런 식의 예감이 들었다고. 그래서 기다렸대요, 다른 사람들이 다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학교 기숙사 있잖아요.”
“감이 영 안 좋은데.”
“간단히 말하자면 남들 다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둘만 남았을 때 퍽.”
“결론부터 얘기해 봐.”
“선배님은 이런 거 안 믿으실 거 같은데.”
“그래도 해 봐.”
“좋아해서 그랬대요.”
“치정이야?”
“네.”
“누구를?”
“피해자를.”
“…….”
“어이없으시죠?”
“계집애들끼리 치정은 무슨 치정이야. 웃기지 말라 그래.”
“여고도 아니고 공학인데, 그게 좀……. 저도 잘 안 믿기기도 하고. 여튼 본인 말로는 그래요. 좋아해서 그랬대요. 너무너무 좋아해서 그랬다고.”
“피해자의 남자친구나 아니면 뭐 피해자를 좋아하던 다른 남자애를 좋아했다거나 하다못해 피해자와 친한 선생님을 좋아했다거나 이런 게 아니라?”
“네. 피해자를 좋아했대요.”
“…….”
“마저 얘기할까요?”
“어.”
“둘만 남게 되면, 자기는 그냥 한 두 마디 이야기만 하려고 했대요. 아니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무언가, 어떻게든 매듭을 짓고 싶었대요. 그게 뭔지는 본인도 그 때까진 파악을 못 했지만. 사람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리면서 자기도 라커룸에 멍하니 앉아있었는데, 피해자가 들어오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보통 질투가 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선배의 뒤통수를 내리치나? 여자애들은 그래?”
“그럴 리가요.”
“이해를 못 하겠네.”
“언제는 뭐 이해를 하고 얘기를 했나요. 이해가 가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강간범 논리를 이해해서 뭐에 쓰게요. 보면요, 또 그렇게 완전 확 돌아버린, 정신병이 있는, 그런 거는 아닌 줄 알았거든요. 기록을 보면 불성실하긴 해도 등교는 또 하고, 부 활동 때문에 보충수업을 여러 번 받기는 해도 성적이 아예 밑바닥을 치는 건 아니고. 부 활동은 또 열심히 하는 애래요. 연습에는 잘 안 나와도 실력이 좋아서 대회멤버로도 뽑혔고.”
(후략)
나 방금 강간당했어.
전화가 아니었다. 양치를 할 겸 가방을 뒤지다가 메일을 발견했다. 피임약 먹고 있으니까 어차피 임신은 안 하겠지만, 야스토모, 나 배가 너무 아파. 아라키타는 핸드폰 폴더를 접었다가 다시 열었다. 글씨가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번 달이 4월이었던가. 아니면 오늘이 할로윈이었나 소름끼치게. 이 거지같은 계집애는 이게 무슨 뜻인 줄 알고 보낸걸까. 농담도 정도가 있지 지금 이걸 농담이라고 한 건가. 아라키타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신카이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너 어디야. 2층 화장실 둘째 칸. 거기 가만히 있어, 움직일 생각 꿈도 꾸지 마.
화장실은 좀약냄새로 가득했다. 배려심 넘치는 청소부는 여자 화장실에 칸마다 나프탈렌을 잔뜩 걸어두었다. 적으면 두 개, 많으면 세 개. 신카이가 강간당한 장소에서 고작해야 생각한다는 것이 옷장 속 눅눅한 좀약이라니. 아라키타는 둘째칸을 두드렸다. 그러자 신카이가 코맹맹이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어와, 열려 있어. 문을 열자 팬티를 내린 채 엉거주춤하게 변기에 앉아있는 신카이가 보인다. 미안한데 야스토모, 혹시 생리대 있어? 자꾸 피가 나. 신카이는 발 끝으로 화장실 문을 밀어 닫았다. 아라키타가 그 문을 중간에 받아 걸어잠궜다. 사진을 찍는 것처럼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아라키타는 티슈와 물티슈를 한 손에 쥐어든 채였다. 신카이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 상상 속 남근의 대리만족으로 다른 반 남자애에게 강간당할 만큼.
아라키타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신카이가 엉엉 울면서 정액묻은 속옷을 휴지통에 쑤셔 박았던 날을 생각해보았다. 어떤 새낀데. 그 날은 아라키타가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신카이의 양 무릎을 만졌던 날이었다. 1반? 3반? 5반? 7반? 아라키타의 추궁에 신카이는 고개만 내저었다. 그럼 뭐야. 좀 말을 해. 네가 지껄여야 내가 사정을 알 거 아냐. 신카이는 생리대를 빌려달라고만 이야기 했고, 아라키타는 계속 캐물어냈다. 그럼 이거만 말해. 그 새끼가 널 강간친거야 아니면 네가 그 새끼를 강간친거야. 말 안 하면 양호실 안 데려가 줘. 신카이는 대답했고, 아라키타는 신카이에게 세례의 여지조차 남겨주지 않기로 했다. 그 새끼가 너 강간 친 거 맞아?
"내가 한 거야."
"누가 뭘 했다고?"
"걔가 나 강간한 거 아니야. 내가 걔를 강간했어."
"근데 멍청아 왜 네가 울어."
신카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너는 가해자잖아. 네가 그 새끼 강간친 거라면서. 그럼 네가 잘못한 거잖아.
"걔한테 미안해서 그래."
"그럼 미안해야지 안 미안해? 네가 먼저 꼬셨다면서."
"그건 안 미안해. 걔랑 섹스하면서 네 생각해서, 그게 미안해."
이 미친년. 그게 어떻게 섹스야 강간이지.
신카이는 아라키타가 교실에 들러서 같은 반 아이에게 생리대를 빌려올 때까지 헛숨을 잔뜩 먹으면서 울어댔다. 저 계집애는 뭐가 그리 겁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남의 성기가 두려운건지 시큼한 화장실 냄새가 두려운건지. 아라키타는 신카이의 속옷에 생리대를 붙여주고 체육복 바지를 빌려주었다. 신카이는 조금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양호실에 내려간 뒤, 그 날은 내내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눈물을 쥐어짜내놓고도 신카이는 다음 날 두려운 기색도 없이 둘째칸 문을 열었다. 아라키타는 칸막이 밖에서 등을 기댔다. 병원은 갔냐. 아니, 병원 안 가고 그냥 씻었어. 왜 안 가. 씻으면 괜찮아. 청결제로 소독은 했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물에 개어서 쓰는 것인지 젤처럼 된 것인지 하다못해 청결제를 쓰기는 하는 건지. 그 새끼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 새끼한테 병이라도 있었으면 어떡하냐고, 너 에이즈 걸리게 되는 거면 어떡할 거길래 왜 병원도 안 가고 있냐고. 그러나 아라키타는 입을 다물었다. 은밀한 것이어서 그렇다고 애써 생각해봐도 자꾸 토할 것처럼 속이 뒤집어진다. 자신은 신카이의 어느 것 하나 알 자격이 없었다. 정확히 한 달 전이었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신카이가 웃으면서 아라키타에게 피임약을 내밀었던 날이 있었다. 야스토모, 생리통 심하지? 이거 새로 나온 건데 약사님이 이거 먹으면 생리통이 없어진대. 먹을래? 피임약을 왜 먹어, 남자랑 잘 일도 없는데. 이상하게 그 말에 조금 기뻐하더라. 네가 왜 좋아하는지 그 땐 몰랐는데 이젠 알 것 같아.
생각해보면 신카이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신카이는 때때로 사람같지 않은 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피력했다. 신카이가 끊임없이 속삭이는 말은 별 특별한 게 아니었는데도, 마치 동물원에 간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구질구질한 것도 사랑이래.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사람이 된대.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야스토모도 나를 사람취급 해줘. 쌍욕을 듣느니만 못 한 말이다. 똥통에 처 박힌 것처럼 가슴이 조여오고 속이 울렁거리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네가 내 몸 속에 또아리를 틀었나보다. 어느 막연한 감정이 살을 파고드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숨이 꽉꽉 막혀오는데 하물며 본 적도 없는 남성기란.
살아남는 방법이 모두 이렇게 짐승같지 않다는 것을 않다. 그런데 왜 이리도 자처해서 짐승만도 못 한 이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강제건 강제가 아니건 무언가를 속에 쑤셔넣는다는 건 올가미같은 일이고, 그 무언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몸통 어딘가가 아프고 쓰라린데 불편해서 뒤척이면 자꾸 깊이 파고 들었다. 발목을 자르라면 발목을 자를테고 손목을 자르라면 손목을 자를텐데 잘라낼 것도 없어 벗어날 수가 없다고. 보이지 않으니 도망칠 수 없고 쥘 수조차 없어 떼어내지 못 하는데 이러고서 내가 도대체 어떻게 살겠어. 이러고서 내가 너를 어떻게 좋아해. 차라리 지금 나 동정하는 거냐고 욕을 하지, 강간당해서 더러워보이냐고 말을 하지. 네가 뭔데 나를 좋아해, 내가 뭔데 나를 좋아해, 내가 뭐라고 네가 나 대신 강간당해. 강간이 어떻게 섹스야 이 바보야. 간 자 들어간다고 다 섹스인 거 아니야.
아라키타는 치마를 들어올렸다. 속옷 하나만 입은 다리 사이에 찬 바람이 들이닥친다. 너랑 자고 싶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라키타가 얌전히 문에 등을 기댄 이유는 신카이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라키타에게 신카이는 야만인이었다. 성이라는 엄숙주의를 부끄러움도 없이 박살을 낸 작자다. 내가 죽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내가 받은 만큼 너에게 쏟아내고 싶은데 나는 너한테 받지를 못 했다고. 뻔하고 자기만 속편한 변명을 듣느니 이깟 레즈비언 섹스.
내가 그걸 먹었으면 내가 신카이의 대신이었을까. 아라키타는 신카이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칸막이 너머로 전구빛이 보였다. 속옷 아래가 가차없이 후벼 파여진다. 마치 뚜껑처럼 시야가 어두워졌고, 고개가 흔들릴 때마다 뺨이 잔뜩 눅눅해졌다. 화장실에 너와 나만 있는 것 같아. 세상에서 너랑 나만 섹스하는 것 같아. 내가 너무 깨끗해서 어떡하지, 내가 너무 더러워서 어떡하지. 신카이는 울고 있다. 목욕이라도 하고 싶다고 자꾸 눈물을 닦아냈다. 아라키타의 가랑이 사이는 여전히 축축했다. 뻘 같은 소리와 함께 허벅지에 무언가가 흘러내린다. 눈물인지 한숨인지 도무지 모를 것이 눈을 자꾸 가리고, 아, 옷장 냄새, 코가 너무 아프다.
아라키타는 엉거주춤 양 발의 보폭을 벌렸다. 그러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신카이의 손가락은 아직도 길었다.
열 달이다. 귀머거리처럼 지냈다. 그런데 귀를 막고 지낸다고 해서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에 처음으로 화가 났다. 스물 한 살이 되어 버렸다.
왜 귀머거리처럼 살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내 유년기를 되씹으며 살았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강의를 듣는 대신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는 대신 자전거에 올라탔고 가끔씩은 자전거에 올라타는 대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내가 담배를 주머니에서 꺼내면 나를 지켜보던 킨조는 살며시 내게 속삭였다. 아라키타, 자중하도록 해라. 자전거를 계속 타고 싶다면. 그 말이 어쩐지 눈물이 나도록 서글퍼서 나는 괜히 조약돌처럼 담배까치를 저멀리 내다던졌다. 엄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화풀이를 하고 싶지 않아 킨조에게서 등을 돌리면, 킨조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멀찌감치 사라졌다.
그러니까 대학생이다. 나는 성년이 되고 나서도 나의 남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었다. 야구방망이도 쇠파이프도 식칼도 하물며 새하얀 담배마저 나를 거부하는 나의 삶. 굴절된 인생이다. 마치 부딪힌 것 같다. 중학생의 나, 대학생인 나, 합당하게 담배를 살 수 있는 나.
강의를 듣고 싶지 않으면 눈을 감았는데, 그때마다 떠오르는 유년기라는 것이 참 그랬다. 내 모든 걸 끄집어 뱉어야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는 거였는데,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고치를 잣지 못했다. 더군다나 야구는 더더욱 그러했다. 야구방망이를 부러뜨려 내다버린 날에는 내 등뼈가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많이 화났고, 많이 울었고, 많이 죽고 싶었다. 고등학교 삼학년 여름처럼.
후회가 없어도 결실이 없으면 결실이 없는 것만으로도 내 노력은 깎아내려졌다. 강제로 깎이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면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깎여나가는 내 몸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의 전제조건이라면, 독이 스며있던 나는 굳이 아프게 성숙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성숙한 내 연애질을 핑계삼기로 했다. 포옹하고 키스하고 하반신을 맞대었던 너와 나의 시간. 남김없이 내팽개쳐졌던 너와 나의 공감. 그래서 그런 건지 몰라도, 너와 나는 단상 위로 올라가지 못 했다. 노력으로 내 발 밑이 푹신푹신해졌는 나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는 솔직히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내가 누워있는 동안 시상식은 끝이 났고, 나는 누운 채로 내 청춘이 끝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내 사춘기는 여름이 처음이고 여름이 마지막이다. 처음과 마지막이 달라붙어있으니 동그랗다고도 말할 수 있다. 둥글둥글한 내 학창시절을 생각하면 신카이가 생각났다. 내게 뻗어왔던 신카이의 둥근 손톱, 울지마, 야스토모. 울고 있어? 미안해, 잘못했어, 울지마. 내게 건네던 그의 말도 처음과 끝이 같았다. 울지마로 시작해서 울지마로 끝났던 너의 마지막 발화. 내게 던졌던 네 첫 마디도 울지 말란 소리였음을 너는 모를 거다. 함께 발가벗었던 최초의 시간을 빌려서 나는 네 앞에서 울었고, 너는 그런 내게 울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울지 말라고 끝을 맺었다. 둥글둥글한 너의 말, 둥글둥글한 너의 손톱, 둥글둥글했던 너의 손길. 내가 팔꿈치만 멀쩡했어도, 내가 야구를 싫어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그런 너를 멀찌감치 홈런으로 쳐낼 수 있었을텐데, 나는 방망이를 전력으로 휘두르지 못 하는 병신 중의 병신이라서 너도 너의 다정함도 그리고 나의 탈력감도 공처럼 때려버릴 수가 없었다. 그게 아직까지도 나를 괴롭힌다. 세상에 둥근 것이 야구공만 있는 것도 아닌데, 별 생각없이 분수를 향해 튕기는 싸구려 동전도 둥글둥글한데.
나는 내 모든 게 네 처음이어서 구역질이 났다. 그리고 네 모든 것 또한 내 처음이라는 걸 알아서 화가 났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처음이 되어줄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너와 나를 포자처럼 자유롭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성년이 되어 열 달을 더 살아보니 알겠다. 우리는 열병을 핑계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었는데도, 백지같은 너는 내게 말을 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백치같은 나는 너의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했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그러면서도 서로에게 절대 비밀일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네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 과식을 한 환자처럼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너몰래 너를 모두 소화시킬 수 있을 줄 알았다. 무슨 뜻이냐고? 널 좋아했다고.
태아처럼 눈감고 산 열 달을 매듭짓고자 차라리 신생아가 되어버린 내 성년의 처음. 나는 나를 배신하기 전까지는 성인이 아니었다. 길에 피는 잡초들도 잡초라는 이름으로 사랑받는 이 세상 속에서, 성인도 아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하는 것은 도무지 생각치도 못 할 일이다. 그만큼 나는 내가 벅찼다. 너에 대한 내 마음이 내게 너무 벅찼다. 누군가가 너에 대한 내 마음을 산다고 속삭이면 나는 기꺼이 내 애정을 베어물어 그 이에게 넘겨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정도로 나는 오늘까지도 감정의 과호흡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너를 팔아넘긴다. 이제는 흔적만 남겨진 내 유년기 속으로 너를 향한 내 마음을 탯줄처럼 쑤셔넣기로 했다. 내 첫 한숨, 내 첫 종교, 되도 않는 어리숙한 계류유산. 나는 너를 향한 내 마음을 배반했기 때문에 이제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버려 내 인생을 얻었다고, 나는 이제 자유라고. 처음으로 내가 얻은 자유로운 사랑, 삼백 오 일만에 드디어 찾아온 재의 수요일. 오늘부터 너는 나의 첫사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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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축하해. 잘 살아라.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한 문장을 덧붙였다. 안녕.
얼마 있지 않아 핸드폰이 다시 울렸지만 나는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다. 아마 별 의미없는 내용만이 내게 돌아왔을 것이다. 핸드폰으로 하는 연락은 선호하지 않는 네가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정도의 인사로 충분하다.
난 내 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훤하게 뚫린 소통구로 청량한 공기가 들어왔고, 매니큐어 냄새로 가득 찼던 내 방이 순환을 시작했다. 적조처럼 가라앉은 탁한 공기 너머로 허하다 못해 뻥 뚫린 것 같은 쾌감이 목구멍 너머로 내리달렸다. 언제였더라, 미용실에 가면서 비치된 잡지를 읽었던 적이 있었다. 첫 경험은 어땠나요? 세상에 꿰뚫린 기분이었어요. 너무 아픈데, 나와 그 사람만 이 공간에서 살아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여태까지 사람들이 왜 섹스를 하는지 이해를 못 했다. 덥고 더럽고 뜨겁고 냄새날 것 같은데 그런 짓을 도대체 왜 자청해서 하는거야? 연애를 하기 시작하면 뇌가 어떻게 되나? 그런데 내가 이 무더운 여름날에 방 안에 틀어박혀 매니큐어를 바르는 행위도 알고 보니 덥고 더럽고 뜨겁고 냄새났다. 그리고 나는 지금 탁한 공기를 통해 섹스하는 감각을 느끼면서, 세상에 꿰뚫린 것 같다던 여자들을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섹스를 하나보다. 세상에서 유리된 것 같은 이질적인 쾌감, 세상에서 나 혼자만이 살아있는 것 같은 삐뚤어진 생기.
나는 허벅지를 비벼붙였다. 시원한 공기를 맡으니까 속이 시원했다. 숨통이 트이니 이제야 살 것 같구나. 나는 핸드폰을 향해 자꾸 돌아가는 내 고개를 바로 잡으며, 나 자신이 비로소 첫사랑의 이 끔찍한 주박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통조림같던 내 눅눅한 사랑, 이렇게 뚜껑을 따 속을 비우면 모든 게 깨끗해지는 걸 삼 년이라는 시간동안 지지부진하게도 잘도 끌었다. 한 치 앞도 내려다보이지 않는 길거리를 바라보며 신카이를 생각했다. 언제부터 좋아했더라? 고등학교 이 학년 때였던가, 언제 걔를 처음 만났더라. 움직이기도 짜증날 정도로 습기로 찼던 여름이었던 건 확실했는데, 그게 몇 년 전이더라. 나는 원래 섬세하지 못 한 사람이다. 연애하는 사람처럼 일자까지 꼬박꼬박 기억하지는 못 한다. 본디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이 나라서, 다만 대략적인 내 감정의 봉오리만이 기억이 난다. 너무 더운 나머지 부채질을 하면서 일지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땀냄새를 잔뜩 풍기는 네가 먼저 다가와서 내 부채를 빼앗아갔다. 그리고 내가 짜증을 내기도 전에 내게 부채를 부쳐줬다. 어때? 괜찮아? 어지럽지는 않아? 야스토모는 너무 말라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여름이니까 물은 꼬박꼬박 마셔.
너와 멀어지면 좀 편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전혀 편해지지 않았다. 남자친구는 있냐는 말에 머뭇거리면서 없다고 대답했는데, 대답하는 중에서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할까 말까 수십 번도 더 고민을 했다. 내가 너에게 널 좋아한다고 말을 하지 못 했던 것처럼, 나는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도 너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을 하지 못 했다. 소중해서 말을 하지 못 한 게 아니라, 잘 모르겠어서 말을 하지 못 한 것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게 맞는 것인지, 이게 너를 좋아하는 감정이 정말 진짜인 것인지. 숨을 쉬지 못 하겠는데, 내가 불에 타느라 숨을 쉬지 못 하는지 물에 빠져서 숨을 쉬지 못 하는지 판단조차 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이 기분이 사랑이 아니라면 로맨스 영화를 찍은 감독들은 모조리 불에 타 죽어버려도 모자라다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감정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리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동시에 너에게 계속 묶여있고 싶었다. 이십 년이 넘도록 내 마음 가는대로 살아왔는데 고작 삼 년 정도 너에 대한 감정을 뒤처리하는 것에 매달려 있었다고 이렇게 방향성을 잃을 수도 있던가. 졸업가운을 입을 네 모습을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났다. 이제 끝이다. 대학교 졸업을 앞 둔 이제서야 나는 너에 대한 내 감정을 시원하게 비워낼 수 있었다. 내가 너에게 간편하게 보냈던 문자메세지처럼, 내 사랑도 이렇게 미련없이 한숨만 터뜨리고 끝나버릴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나는 형광불에 반짝이는 내 손톱을 바라보았다. 바싹 마른 손 끝에 은은한 분홍색의 매니큐어가 발라져있다. 야스토모, 손 좀 줘 봐. 매니큐어 발랐어? 손톱이 분홍색이네. 예쁘다. 매니큐어는 개뿔이, 널 생각하면서 아랫니로 잘근잘근 물어뜯느라 하도 씹혀 새빨갛게 멍이 오른 손톱이었다.
겨울눈은 겨울동안 한껏 숨어있어서 이름이 겨울눈이라 했다. 나는 이 감정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여름눈이라고 붙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너는 두 번 다시 부채를 부쳐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 해 내내 단 한 번도 부채질을 하지 못 했다. 네가 부쳐주는 부채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나왔고,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데도 미처 너에게 불평 한 마디 던지지도 못 했다. 그래서 내 첫사랑은 여름눈이다. 나는 네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전전긍긍했고, 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만큼 너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몽땅 토해낸 것처럼 위가 후련한데도 숨이 턱턱 막혔다. 아직도 덜 빠진 매니큐어 냄새가 내 코를 시큰하게 찍어누르는가. 코로 숨을 쉬기가 너무 힘들었다. 앞으로는 이제 공부 안 하고 원나잇이나 가는 계집애들을 흉보지 말아야지. 그네들도 지딴에 마땅한 이유가 있었을 거다. 헤프게 몸 굴린다고 욕하지 말아야지, 나는 지금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포옹이 필요하다. 신카이가 칭찬했던 투명한 매니큐어는 모두 갖다버릴거야. 그리고 새 매니큐어를 사 올 거다. 나를 알았던 사람들이라면 모두 기겁을 할 아주 원색적이고 화려한 매니큐어를 바르기로 했다. 새까만 색도 좋고, 크랙네일도 좋고, 남극바다처럼 검푸른 색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일 한아름 양손 가득 사 올 번쩍번쩍한 매니큐어를 생각하면서, 나는 길을 걷다 넘어진 어린아이처럼 차마 숨도 제때 쉬지 못 하고 잔뜩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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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으면 내 무덤에 꽃 한 송이 놓아줘요. 어느 시인이 남긴 말이었는지 오래도 간다. 나 죽으면 죽는 거지 꽃은 무슨 꽃이야. 죽는 길에 무언가 남기는 건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태어나 세상에 흔적을 남겼으면 살다 떠난 자국 따위 아무려면 어떻겠냐고, 사뭇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날 것의 나는 비리도록 어렸다. 나 자신이 언젠가는 세상에 깊숙한 발자국 하나 남길 것이라는 우주같은 오만함, 어차피 세상은 다 치고 받고 싸우는 것이니 거창한 유언같은 것은 패배자가 남기는 미련같은 것이라고.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새하얗고 복슬복슬한 꽃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꽃이었다. 꽃, 시인과 화가가 사랑하는 생식기. 봄만 되면 눈아프게 사르르 터져나오는 살. 죽은 토끼의 무덤 위에 하얀 꽃이 거스러미 일어나듯 가볍게 놓였을 때, 나는 이제 흰 꽃을 보면 그자리에서 욕지기를 하기로 생각했다.
내게 꽃은 그런 것이었다.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에게 눈물을 쥐어짜내는 것. 가슴 속이 뚫린 사람에겐 부재의 피딱지를 자꾸만 떼어내는 눈치없는 것. 수치도 모르고 부어오르는 것. 어떻게 열매를 맺어내는지 자신은 알지도 못 하는 멍청한 것. 나는 고등학교 이 학년 말까지만 해도 토끼가 뜯어먹는 토끼풀을 바라보며 점심에 먹은 것을 끊임없이 게워냈다.
단 한 번도 꽃을 쥐지 않았었던 나의 못된 일 년. 그리고 네가 내게 처음으로 건네줬던 어느 잡풀. 난 아직도 잠들기 전 그 꽃을 기억해낸다. 손톱만한 크기에 뭐 그리 많다고 네가 자꾸 재채기를 했는지, 내 발치에 놓여진 한웅큼의 애기똥풀을 보고서야 나는 네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는 옷소매로 코 끝을 자꾸만 닦아냈고, 나는 네게 손수건을 하나 사줘야하나 무심결에 생각했었다. 아마 너는 토끼가 무슨 풀을 먹어도 괜찮은지 관심조차 없었겠지. 그러니 꺾인 줄기 끝에서 두 어 방울 눈물이 나오는 줄도 몰랐을 거다. 나는 토끼를 위한 너의 단순한 꽃다발을 몰래 등뒤로 숨겼고, 네놈 토끼나 가져다 먹이라던 너의 말은 내 호주머니 속으로 슬쩍 쑤셔 넣어버렸다. 토돌이 선, 아니. 네 생일선물. 나는 네가 이유없이 내게 무언가를 건네기 싫어함을 명백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석 달이나 남은 내 생일을 괜히 앞당겨 챙긴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나 또한 이 노랗게 우는 꽃을 토끼에게 먹여도 되는 것인지 잘 알지를 못 해서, 토돌이의 입가에나 스리슬쩍 꽃잎을 문댔을 뿐 꺾어 먹이지는 않았어.
꽃을 벽에 걸면 벌레가 생긴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진 어느 누구도 모르지만 시멘트 벽면에 말린 꽃을 거꾸로 묶어 달면 꽃은 화장하는 것처럼 벌레와 함께 가루가 된다고 했다. 죽어있는 꽃인데도 벌레가 꼬이는 정확한 이유를 아무도 알지 못하듯이, 나 또한 내 사춘기가 시작된 정확한 날짜를 눈치채지 못 했다. 밤마다 내 다리 사이에 낯선 열대야가 찾아왔을 뿐을 막연히 눈치챘을 뿐, 언제부터 내 혀 끝에 사랑이 사탕처럼 달라 붙어 있었는지. 그래서 네 팔뚝이 내 손가락을 물처럼 흘러내렸던 날은 나의 냉소적인 유년기의 종말일이었다. 세상을 삼킬 듯이 울어대는 네 모습과 너를 안고 같이 울고 싶던 그 순간의 나. 너와 함께 물에 빠지고 싶었던 이름모를 비참함. 내 눈물을 너에게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죽고 싶을 만큼 서러웠던 때. 더이상 너에 대한 눈물이 부끄럽지 않게 되면서, 나는 그제서야 내가 겨우 한 살 나이를 먹었음을 알게 되었다.
너와 다른 학교로 진학하고 난 뒤 나는 매일같이 꽃이 새겨진 나의 관을 생각했다. 그리움이라고 말하지도 못 할 정도로 앳되었던 나의 그리움, 네가 숨을 쉴 때마다 너 모르게 건넸었던 청춘의 씨앗. 내 죽은 몸과 나무꽃이 함께 묻힌다면 흙밖에 보지 못 할 조용한 내 정리정돈에 너에 대한 내 마음도 남김없이 개켜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의 관을 나 스스로 짤 수 없기에 나는 나의 관짝 대신 네 손 끝을 열 손가락 조각하고 싶었다.
이제 겨우 불이 붙어 반숙되고 있는 내 마음의 난포. 나는 매년마다 올해 내가 혹시 몰라 죽을 것을 기대하며 내 묘비에 적을 문구를 오 년 째 생각하고 있다. 깔끔한 글씨, 손으로 쓴 것처럼, 깨끗하게,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적 없었던 내 지나간 사춘기같이. 선생님, 내가 만약 내일 숨을 거둔다면, 풀도 안 난 내 묘비엔 이렇게 새겨주세요. 사망원인 : 짝사랑, 야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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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칼로(카웟님 리퀘)
내 삶은 누구보다 생생해 도리어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다. 네가 인생의 갓길을 걸었던 것만큼이나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네가 길바닥에 무릎을 갈아대며 얼결에 살아갈 때, 나는 누군가가 세상을 뜨고 있는 장소에서 사정하고 있었다. 전혀 몰랐지?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내 첫사랑, 내 첫자위. 나는 아직도 차가운 벽돌에 아랫배를 비벼대며 다리를 꼬았던 열 두 살의 내 모습을 기억한다. 악력이 생기니 성욕도 생겼다. 머리가 크고 난 나는 과학실을 좋아했다. 옷을 벗어 살을 보여주는 내 성욕의 박물관. 내 허벅지에 시원하게 와닿았던 배우들의 유리관. 혹여 얼어죽은 참새를 맨손으로 누를 수 있었던 날엔 다리 사이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밤새 잠들지도 못 한 채 끊임없이 울어제꼈다.
나는 스물이 되고 나선 나와 섹스하는 모든 이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야스토모,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하고 있어? 네가 한숨을 내쉬며 이상에 절망하던 순간, 나는 그제서야 사람으로 만든 가죽카펫을 밟았어. 너무도 싱싱해 느끼지 못 해왔던 나의 잃어버린 생동감, 어느 인부의 장갑을 물고 흰자위를 굴려대던 이름모를 여학생. 누군가의 죽음이 내 성기를 처음으로 스쳐갔던 열 일곱살, 나는 그 때 비로소 내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아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너와 섹스할 때 어떤 생각하는지 너는 알고 있어? 네 체온 위로 떠오르는 나의 자위상대들. 열 손으로 모자라서 셀 수조차 없어. 얘가 열 두 번째구나, 얘가 열 세 번째구나, 아, 사정하면 안 되는데. 마른 허벅지에 하늘하늘 걸려있는 감색 교복치마, 다 떨어진 끈으로 흔들리는 어느 빨간 하이힐. 내가 가장 흥분하는 온도로 식어있던 사람을 네 몸 위에 덮어 씌우고 나서야 냄새를 풍기던 나의 페인트같은 정액. 네 생각 하지 못 해서 미안해. 나는 도저히 네 생각을 할 수가 없어.
사람이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 속이 한가득 차오른다고 했다. 피를 많이 흘린 것처럼,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열병처럼, 그렇게 온 시야가 어지러워진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내 기이한 병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평생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느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난 아직도 전염병을 믿지 않아. 내가 전염병에 걸릴 줄은 몰랐어. 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병에 걸릴 리 없다고 생각했어. 나무도 버짐이 생기고 돌고래도 자살을 하는데, 왜 나는 너의 모든 것에 면역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껴주고 보살피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받는 것 뿐만 아니라 주는 것 또한 사랑이라고 했다. 그러나 줄 것 없어 네게 병을 옮기는 나 또한 너를 사랑해.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네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런 나도 너를 사랑해. 나는 차라리 내가 앓는 이 병을 너에게 옮기고 싶어. 문둥이가 사람을 잡아먹고 고름을 벗는 것처럼, 나는 차라리 너와 함께 문둥병에 걸려 같이 뭉개지고 싶다. 네 피부에서 시반들이 연꽃같이 돋아나는 날, 딱딱하게 굳은 네 손가락이 내 마음을 단단하게 못질하는 때. 너의 얼어가는 핏줄이 내 목을 조르며 마지막 사정을 종용하는 날. 나는 그때서야 내가 너의 속을 겨우 파고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네 목을 뒤로 젖혀 눌러버리고 싶었다. 숨쉬지 않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안타까운 나의 자위, 서늘한 콘크리트벽에 뺨을 붙이고 엉엉 울었었던 어린 시절 속의 나. 나는 네 턱밑에 손을 댈 때마다 열매처럼 뜨거워지는 나의 손바닥을 느끼면서 소리없이 고함쳤다. 네가 어떤 온도로 식든 그 온도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온도가 되어버릴텐데, 이런 내가 어떻게 너를 죽여, 이런 내가 어떻게 네 목을 졸라. 나는 살아 있지 않은 모든 어린 것들을 온 몸으로 사랑하면서도, 이렇게나 날 것인 네 생명에게 전염병같이 목을 매고 말았어. 차라리 네 목이 나뭇가지라면 좋았을텐데, 가볍게 죽고 가볍게 돋는 어느 나무의 의미없는 생장점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자라나는 거였으면 좋았을텐데. 숨쉬지 않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나는 너의 심장소리를 연가처럼 되새기며 생각했다. 아, 오늘도 너는 이렇게 살아있구나. 죽지 못 해 살겠다고 열심히 살아있는구나.
그래도 나는 내 흔적이 네 몸 속에서 영원히 부화할 것이라는 아름다운 희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언젠가 네가 나의 진짜 사랑으로 변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날숨이 잦아들고 부푼 뼈가 주저앉는 진정한 삶의 시작, 살아 누워 숨을 쉬는 너의 모든 살점들. 나는 너를 위해 너를 지금 프리다칼로처럼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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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즈콜2(초모님 리퀘)
아라키타는 메말랐다. 허벅지에 살보다 가죽이 붙어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가깝다. 나는 가끔씩 그의 튀어나온 손목뼈와 힘줄이 도드라지는 팔뚝, 부딪히면 아플 정도로 딱딱한 어깨뼈를 상상해보곤 했다. 나 자신을 속이느니 차라리 인정하는 것이 빠르다고, 나는 아라키타의 허벅지에 손바닥을 올렸다. 아라키타는 술기운이 올라 시뻘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너처럼 자존심 센 놈들은 굽히질 않아."
"그런가."
"그래 이 새끼야."
그러니까 내가 지금 너한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거야. 아라키타는 오른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가, 내 아랫배가 불편했는지 자세를 고쳐잡았다. 아라키타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따져 들어가고 싶지 않다. 따져봤자 내게 별 다른 이익이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아라키타에게 지금 이 행위가 강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라키타가 나를 강간한다 하더라도 내가 그의 강간을 별 다른 반항없이 받아들일 거라는 것 또한 그에게 인지시켜줘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아라키타가 비자발적인 범죄자로 남아버릴 때, 나는 나의 감정을 어설픈 로맨스영화로 마무리짓는 것이다. 풋내나는 배려, 부러지지 않는 자존심. 나는 나의 배려가 다른 사람의 진심에 가 닿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로맨티스트의 가면을 뒤집어 쓸 수 있었다.
내가 아라키타에게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아라키타는 자세를 고쳐 내 사타구니에 허벅지를 가져다대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발기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이 그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내 허벅지에 아라키타의 엉덩이뼈가 닿는다. 아팠다.
"아라키타."
"왜."
"대화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응할 수 있다."
아라키타는 내 티셔츠를 말아올리면서 대답했다.
"지랄하고 앉아있네."
"진심이다."
"난 네 진심 안 믿어."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항상 아라키타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나의 진심은 진심이 아니었다. 진심이라고도 할 수 있고 진심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중의적인 마음이다. 배려라는 이름의 핑계였고 도피라는 이름의 거짓말이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을 기만하는 진심으로 살고 있다.
내 옆구리에 차가운 공기가 와닿는다. 티셔츠는 이미 명치까지 들어올려졌다. 나는 들숨이 나의 배를 지나치게 부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손은 물갈퀴가 없는 손이고 내 목은 울음보가 없는 목이었다. 나는 나의 말이 어떠한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의미 없는 말은 그저 소리로 멈춰져있을 뿐이다. 나는 아라키타에게 소리냈고, 아라키타는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나의 넥타이가 내 윗배를 간지럽힌다. 아라키타는 눈물을 흘릴 때처럼 내 티셔츠에 코를 박고 나의 냄새를 맡았다. 아라키타는 말을 한다. 그에게서 물비린내가 나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대답 뿐이야."
"예스 아니면 노겠지."
"잘 알고 있네."
"……."
"너 강간 좋아하냐?"
"……."
아라키타는 노골적인 단어로 나의 옷을 벗겨냈다. 성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손길로 나의 가면을 까뒤집었다. 분노와 지배욕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도 나는 이 관계가 뒤집어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기이했다. 강간이었지만 강간이 아니었다. 나는 내 아랫배를 찔러대는 아라키타의 열 손가락을 느꼈다. 아라키타의 손톱이 마치 철사처럼 뾰족하고 물처럼 차가웠다. 그것이 금방이라도 내 뱃가죽을 갈라내고 창자를 뽑아낼 것 같아 나는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아라키타의 이성은 적당히 빨갛게 달아올라있었으나 오히려 손짓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손 끝은 빨갛게 달아오르다 못 해 파랗게 질린 것에 가까웠다. 너무도 뜨거워서 내 몸의 피부를 새까맣게 그을리는 증기. 허벅지에 와닿는 그의 골반뼈가 석탄같이 따뜻하다. 아라키타는 내 몸 위에서 숨을 쉬고 있었지만 물 속에서의 숨처럼 완전하지 못 했다.
"대답해봐. 강간 좋아하냐?"
"혐오한다."
"혐오해?"
나는 나의 생각을 정정할 필요를 느꼈지만 동시에 정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도 생각했다. 강간을 통보하였기에 아라키타는 더이상 비자발적인 범죄자가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의사를 묻는 것으로 스스로의 도리를 다 했다. 이건 강간도 아니었고, 범죄도 아니었다. 합의 하의 성교다. 그것도 개구리의 성교였다. 피부 대신 점막이 손가락 대신 발가락이 있는, 털이 없어 인간이 덜 된 동물은 우리였기 때문에. 강간인 것 같으면서도 강간아닌 섹스. 나와 그의 정체성만큼이나 애매모호한 섹스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소리내기를 그만두었다. 대신 말을 하는 것으로 아라키타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렇다. 범죄니까."
나는 이미 내 가면을 까발린 아라키타에게 이야기했다. 아라키타라면 내 말 속에 숨어있는 물렁뼈를 알아차릴 거라 생각했다. 나는 개구리였지만 항상 지느러미를 펼쳐왔다. 그 지느러미는 내 본성과는 사뭇 다른 것이어서, 휘어지면 휘어졌지 부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부러지기보다 휘어지고, 휘어지기보다 뽑히는 것이 더욱 빠른 실핏줄같은 물 속의 날개였다. 아라키타는 내 아랫배에 올려져있는 손바닥을 그대로 움츠렸다. 내 내장을 들어낼듯이 아라키타가 양 손에 무게를 실었다. 아라키타의 입이 벌어졌다.
"나는 좋아해."
양서류같은 혀가 보인다.
"너를."
"……."
"그러니까 신고."
술에 취한 아라키타가 나의 이름을 부른 것이지만 그가 부르는 내 이름에선 술냄새가 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널 강간할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키타가 내 가면 속을 들여다 보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아라키타에게 내 속내가 보여지는 것을 생각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울음보가 없어 말을 하지 못 해도 꺽꺽대는 소리나마 힘차게 내어야하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나는 어디까지나 피해자로 남는다. 그러나 나는 피해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라키타가 내 모든 속을 헤집어대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싫으면 이걸로 목을 조르든가."
나는 내 손에 들어오는 넥타이의 감촉을 손바닥으로 느꼈다. 나는 아라키타의 목을 조를 수 없었기 때문에 넥타이를 잡느니 차라리 감싸쥐었다. 나는 속으로 속삭였다. 네가 내 셔츠카라에 코를 묻을 때마다, 나는 기만이라는 이름의 진심으로 너를 강간하고 싶었다고.
이로써 드라마의 끝이다. 로맨스의 종말이다. 진화의 정체였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어도 사랑할 수 있었다. 아라키타는 곁눈질로 그런 내 손을 바라보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내게 입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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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성인식이라는 것은 찾아왔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영영 찾아오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가 좋았지, 어릴 때가 좋은거지, 어렸을 때로 돌아갔으면. 사람들은 누구나 시간을 뒤로 돌리고 싶어했다. 어른은 학생을 그리워하고 학생은 아이를 그리워하고 아이는 아기를 그리워했다. 아기는 말을 하지 못 하기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라키타는 아마 갓난아기들도 엄마 뱃 속을 그리워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따지자면 그런 거다.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하나의 과정이다. 아이는 자라면서 말을 하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되고, 자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구실을 하려면 어른이 되어야 한다. 몸도 마음도 죽순이 껍질을 벗듯이 여러 개의 굴을 통과하면서 벗고 입고 버리고를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키타는 자신은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이불을 걷어올리고 시트를 확인하면 아라키타의 마음 속에는 안도와 불안감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열 여덟, 나이로만 따지자면 아라키타는 이미 성인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그 중간터널, 남들은 이미 다 빠져나가 어른의 껍질을 뒤집어 쓰게 되는 그 어두운 곳을 아라키타는 절반도 채 달리지 못 하고 어정쩡하게 말라가고만 있다.
아라키타는 자신의 손짓이 신카이에게 나비처럼 날아간다는 것을 안다. 자신이 신카이의 손에 깍지를 끼면, 신카이는 가끔씩 입술을 깨물고 한숨을 내쉬고는 했다. 몇 걸음 채 걷지 못 하고 주저앉아버리면서도, 아라키타는 신카이의 손을 놓지 않았다. 신카이가 자신의 신발코를 바라보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주워삼을 때에도 아라키타가 그를 추궁하는 일은 없었다. 아라키타는 생리적인 반응이라는 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저 그 뿐이다. 생리적인 현상도, 과학적인 이론도, 아라키타에게 가슴 깊이 감정적으로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아라키타의 교실에는 때때로 생리통이 심해 엎드려있는 여자아이들이 많았다. 울고, 신음하고, 지쳐 늘어진 모습들을 보며 아라키타는 신카이를 상상했다. 신카이의 손가락이 자신의 다리 사이를 시원하게 긁어줬으면 하는 기대에서 연유하는 일그러진 착란. 아라키타는 단 한 번도 속옷에 무언가를 붙여본 적이 없었다. 아라키타에게는 아직도 초경이 찾아오지 않았다.
가슴이 나오고 아랫배에 살이 붙었다. 한 줌에 채 잡히지 않는 가슴인데도 젖꼭지는 동그랗게 모양이 잡힌다. 속옷은 무조건 순면이어야 했다. 아라키타는 팬티를 손가락으로 들어올려봤다가 다시 놓는다. 민둥산이었던 아랫배 밑에는 언제부터인가 숱 적은 털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라키타는 어린 날, 브래지어를 사러 갔을 때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처음으로 아라키타의 등 뒤에 팔을 둘렀고, 늑골 위에 얇은 줄자가 자리잡았다. 꼬마아가씨가 많이 말랐네요. 셔츠 밑에 부드러운 천을 처음으로 덧대보았던 날이었다. 등에 땀이 차는 갑갑함에 숨이 막혀왔어도 더이상 밋밋하지 않은 젖꼭지가 못내 부끄러워 참던 숨을 한 번 더 참았었다. 그러니까 너는 이제 여자라고, 아이가 아니라 여자니까. 아라키타가 중학교 교복을 입게 되던 날 어머니가 말했었다. 스스로의 몸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단다. 너는 이제 여자니까. 아라키타는 못내 묻지 못 했던 말을 아직도 속으로 주워삼키고 있었다. 엄마, 나는 단 한 번도 욕실선반 맨 위로 손을 뻗지 못 했는데, 그런 나도 여자인 거에요?
신카이와 아라키타의 사이에는 내 어디가 좋아? 하는 뻔한 질문이 놓여있다. 신카이는 아라키타에게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이야기 했고, 아라키타는 가끔 토할 것처럼 울렁거리던 위장의 움직임을 호감이라고 명명했다. 아라키타가 고개를 끄덕였던 순간부터, 아라키타와 신카이 사이에는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어느샌가부터 그 긴장감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과는 결코 만들 수 없는 희귀한 공기 속에서 말을 하고 손을 잡고 같은 곳에서 같은 풍경을 보게 되었다. 아라키타는 금방이라도 끝날 것처럼 질질 늘어지는 운동장 위를 굼벵이처럼 걸었다. 신발 뒤축이 소리를 내며 모래를 파고드는 것은 결코 아라키타가 체중을 뒤로 실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신카이는 삼 초에 한 번씩 걸음을 옮기면서, 아라키타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왜 좋아하냐고? 야스토모, 듣고 싶어? 아라키타는 매번 고개를 흔든다.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맞지만, 사실은 들을 필요가 없는 거라고 억지로 생각한다. 숨통을 쥐고 흔드는 이 긴장감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았다.
아라키타의 어머니는 부쩍 석류를 많이 먹기 시작했다. 석류에서는 물에 젖은 고무공같은 소리가 흘러나온다고 했다. 알알이 발라내는 것이 힘들어 그저 쪼개서 한 입 깨문다고. 어머니의 안부전화 너머로는 가끔씩 폐경기의 여성들을 위한 교양프로그램의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그는 필요한 건 없냐고 물으면서도 끊임없이 석류를 씹었고, 마치 손톱을 씹는 듯한 그 빠득거리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아라키타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용돈은 충분해요. 더 살 것도 없으니까. 새하얀 침대 위에 드러눕고 나니 구름처럼 하얘 얼룩조차 없는 이불이 못내 서럽다. 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군가는 끝을 준비하는 게 무척이나 억울하다. 시작하지도 못 한 사람이 결승선으로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알 리가 없으니 아라키타에게는 서러워할 자격이 충분했다. 아라키타는 전화를 끊고 베개를 때린다. 베개를 때리다 속이 터져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신카이에게서 메일이 왔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그게 신카이를 부실 뒤로 불러낸 이유였다. 아라키타는 매니저들의 입에 자신이 오르내리는 걸 알고 있다. 쟤는 힘들지도 않나봐, 하루도 안 쉬어, 자기 남자친구가 선수라서 그런거야? 걔는 쟤의 어디가 좋대? 쟤는 화장도 안 하는데. 시답잖은 소리였지만, 시답잖은 소리는 시답잖은 소리라서 의미가 있었다. 아라키타는 자기 자신을 여성이지만 여자가 아닌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너는 내 어디가 좋냐?"
뻔한 질문이다. 여태까지 매번 학교가 파하면 물어오던 질문. 애정을 확인하기 가장 쉬운 한 마디. 신카이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창문 너머에서 부원들의 수다가 들려온다. 야, 야. 조용히 해. 쟤네 지금 사랑싸움한다. 우와, 정말요? 신카이는 눈을 깜빡였고, 아가미가 베인 물고기처럼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아라키타를 시야에 넣었다. 아라키타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애정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라키타가 표현하려 하지 않아도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그러했고, 답지 않게 치맛자락을 꽉 쥐어 통통하게 솟아오른 그의 힘줄이 그러했다. 눈을 마주할 때마다 홍채를 스쳐지나가던 이질감, 좋아하는 사람의 두려움. 아라키타의 모든 몸이 말하고 있었다. 너, 내 어디가 좋아?
"응, 야스토모."
어디라고 딱 정하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그냥 네 전부가 좋아.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어깨 너머로 소란스러워지는 부실을 바라보았다. 연애는 토도 선배가 제일 자신있는 분야 아니었어요? 너는 쟤가 여자로 보이냐? 선배 그거 성희롱이에요. 아라키타는 새빨개진 얼굴로, 그렇지만 절대 부끄러운 표정은 짓지 않았다. 아라키타에게는 항상 미묘한 당당함이 있었다. 아라키타는 가끔씩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의 기준은 신카이가 가지고 있었던 상식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낯선 것들이어서,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모든 사고를 좋아했다.
"야스토모?"
"……."
"야스토모?"
"……."
아라키타는 복잡한 눈초리로 마른 입술을 몇 번 핥았다. 신카이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으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래야만 했다. 아라키타의 고개가 위로 들어올려졌고,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입술과 눈을 마주했다. 아라키타가 물었다.
"네 눈엔."
"응."
"내가 여자같아?"
수군거리는 부원들의 수다가 신카이의 귓바퀴에서 달팽이처럼 휘몰아쳤다가, 엉금엉금 기다가, 이내 봄바람처럼 훅 사라졌다. 파도같은 정적이다. 신카이는 눈을 크게 뜨고서, 항상 생각해오던 것을 속삭였다.
"내 눈엔 야스토모가 제일 예뻐."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어깨 너머로 슬쩍 창문을 바라보았다. 부실 안에서는 토도가 베어물던 파워바를 손에 들고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아악, 짜증나! 커플 재수없어! 신카이는 후쿠토미가 연습을 나간 것에 감사했다. 마나미가 우와 선배들 닭살돋아요 하고 뒷통수를 긁는다. 신카이는 머리꼭대기에서부터 쌔한 느낌이 온 몸을 훑었다고 생각했다. 아라키타는 치맛자락을 쥐던 손으로 자신의 교복 상의 끄트머리를 움켜쥐었다. 아라키타의 시선이 신카이를 정면으로 노려본다. 신카이는 아라키타에게 되물었다.
"그걸 묻고 싶었던 거야?"
아라키타의 질문은 항상 일방적이다. 아라키타는 상대방에게서 성실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체면치레, 인사치레라기엔 다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상의 본분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잠은 잤냐, 밥은 먹었냐, 다친 곳은 없냐. 아라키타는 항상 인사대용으로 쓸만한 질문만을 할 뿐이다. 상대방에게서 돌아오는 대답 따위에는 항상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그래서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질문을 두려워했다. 아라키타의 질문은 상대방과의 장벽을 쌓기 위한 벽돌이었다. 신카이와의 관계에서도 그러했다. 아라키타가 신카이에게 던지는 질문은 유일하게 하나였다. 너, 내 어디가 좋아? 일종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일과 비슷할 정도로 자주 가볍게 별 일 아닌 것처럼 던져졌지만,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이 질문을 제일 두려워했다.
전부 좋아, 네 자체로 좋아. 가장 스테디셀러인 답변을 고르자니 자신의 마음이 너무 벅차다. 신카이는 항상 아라키타의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그의 질문을 가볍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백 배는 더 길었기 때문이다. 까만 머리카락도 좋고, 긴 눈도 좋고, 좋은 냄새가 나는 피부도 좋다고. 팔뚝에 스치는 네 손 끝이 좋고, 사각사각 소리를 내면서 훈련내용을 기록하는 네 팔꿈치도 좋고, 잔물결처럼 흔들리는 네 셔츠소매가 좋고, 신카이 라고 내 이름을 부를 때 온 세계가 흔들리는 것처럼 울리는 네 목소리 마저도 너무 좋다고. 손쉽게 말하기에 좋다는 말은 너무 짧았다. 가볍게 말하자니 자신의 마음이 통조림으로 취급당하는 것 같다. 네 머리카락, 네 숨소리, 네 손톱, 가끔 네가 분수대에 동전을 던지듯 건네어 말하는 내 이름은 내 가슴에 못처럼 사랑으로 처박히는데.
아라키타는 눈을 깜빡였다. 이마에 식은땀이 슬쩍 맺혔지만 애써 팔뚝으로 닦아냈다.
"아니."
"그러면?"
"너."
아라키타는 조용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머리 위의 창문에서는 토도가 마나미에게 좀 떼줄까?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라키타는 지금 이 말을 함으로써 신카이와의 관계가 극적으로 변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뒤집어지던가, 뒤집어지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구십도 정도 옆으로 굴러갈 수는 있을 것이다. 입 안에서 왠지 모를 쇠냄새가 났고, 코 끝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어느샌가 후덥지근하고 불쾌했다. 신카이와 자신만의 긴장감있는 공기 속에, 어느샌가 계절감이 도둑처럼 들어와있었다. 그래도 아라키타는 말해야했다. 이 말이 오늘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그전처럼 그저 소리낼 뿐만인 질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목적이 담긴 질문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아라키타는 입을 뗐다.
"내가 떡치자고 하면 떡칠 수 있냐?"
토도가 기침하면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고, 이즈미다가 괜찮으세요? 하고 묻는 소리가 났다. 마나미가 우와, 돌직구 하고 감탄하며 웃는 소리도 들려왔다. 신카이는 눈을 깜빡이지도, 미소를 짓지도, 손을 들지도, 숨을 쉬지도 않았다. 다만 토도의 기침이 멎어갈 때 쯤, 한 발자국 아라키타를 향해 다가갔을 뿐이다. 아라키타는 부실 벽에 등을 기댄 채 치마를 다시 움켜쥐고 신카이를 올려다보았다.
"야스토모."
"……."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야?"
"못 들었냐? 내가 떡치자고 하면 떡칠 수 있냐고."
"잠시만 기다려줘, 야스토모."
"왜, 더럽냐? 여자애가 먼저 섹스하자고 하니까 기분나빠?"
신카이는 아라키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아라키타의 교복 치맛단을 바라보았다. 아라키타의 목소리가 갈라져있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평소라면 하지 못 할 말을 할 것이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상당히 날 것인 단어를 선택했지만, 아라키타가 굉장히 진지하다는 것 정도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말 돌리지 마, 신카이. 너 내가."
아라키타는 머리 위의 토도나 이즈미다, 마나미 등의 부원들을 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신카이에게 집중하고 있었고, 신카이에게 집중하고 있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감정들 중 제일 밑바닥의 것을 그대로 드러내보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카이는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고, 아라키타는 치맛단을 한 줌 더 움켜쥐었다. 바싹 마른 허벅지에 속바지 끝단이 슬금슬금 비춘다. 신카이가 순을 올리자 아라키타는 눈에 띄게 치맛단을 잡아당겼다. 신카이는 오른손으로 아라키타의 양손을 모아 잡고 부드럽게 그의 손가락을 풀었다. 회색 속바지가 교복치마에 가려진다.
"떡치자고 하면."
"할 수 있냐고?"
사레들린 토도가 소리없이 기침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소리, 마나미가 끈적끈적한 파워바를 씹는 소리가 모두 들려왔다. 청각은 모든 소리를 말소리만큼 부풀렸고 촉각은 날카로워 바늘처럼 예민해졌다. 신카이는 왼손으로 부실창문을 닫았다. 고요해진 공기 속에서 신카이의 시선이 아라키타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아라키타는 고개를 들어 신카이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작은 눈동자, 촘촘한 아랫속눈썹, 창백한 흰자. 아라키타의 창백한 뺨과 도드라진 청색 핏줄을 가만히 시선으로 따라가던 신카이는 속삭였다. 못 할 게 뭐가 있어, 야스토모.
"내가 네 남자친구인데."
아라키타는 눈을 내리 깔았다가, 다시 신카이를 올려다봤다가, 교복 치맛단을 괜히 매만졌다가, 허벅지 옆쪽에 손바닥을 비볐다가,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은 뺨을 손등에 가져다대었다. 아라키타의 숨이 가볍고 잦았다.
아라키타는 항상 당당했다. 신카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강하게 이야기를 하고, 남자애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을 정도로 왈가닥이고, 엄청나게 아프지는 않아도 손 끝이 사뭇 매운 그런 여자였다. 항상 치마 밑에 반바지를 받쳐입고 다녀서 남자애들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는, 당당하고 거친 여자였다. 젖내나는 어린애도 아니고, 칭얼대는 소녀도 아닌 당당한 한 사람. 아라키타는 여자였다.
아라키타의 그런 당당함 속에는 당황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지금처럼 조금 서러워하면서 무서워할 줄도 아는 인간다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당장의 오만에 의해 나타나는 당당함도 아니었고, 타인을 깎아내리며 억지로 내세우는 당당함도 아니었다. 스스로가 사람이라는 것에서 시작하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당당함.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자존심을 높이 사면서도 절대 퇴색하지 않을 그 인간다운 섬세함을 좋아하고 사랑했다.
아라키타의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었다.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앞머리를 손톱으로 갈랐다. 자신의 그림자에 가려져 조금 창백해보이는 이마선에 손끝을 가져다 대면서, 신카이는 아라키타를 불렀다.
"너는."
"……."
"가끔 내가 너한테 먼저 반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
"……."
"너무하네, 아라키타 야스토모."
아라키타는 신카이를 노려보면서 씹어삼키듯이 중얼거렸다.
"나도 내 몸뚱아리를 모르는데 뭘 보고 남이 내 모두를 좋아한단 말을 믿냐?"
신카이는 아라키타의 이마를 매만지던 손가락을 옆으로 쓸어내렸다. 땀에 살짝 젖어있는 앞머리가 옆으로 갈라지고, 가늘게 올라간 눈썹을 지나 보기 좋게 부드러운 관자놀이를 신카이의 손가락이 스쳐지나갔다.
"아니지."
"……."
"그런 말은 지금 하면 안 되는 거지."
신카이의 손가락은 아라키타의 귓바퀴를 훑고 귓볼을 매만졌다. 아라키타의 온 신경이 자신의 손 끝을 따라오는 걸 느끼면서, 신카이는 귓볼 뒤 움푹 패인 곳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야스토모, 내가 네 모든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의미는."
아라키타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땀이 식어 서늘한 자신의 뺨과 턱에 신카이의 굳은 살 배긴 손바닥이 곧 덮어씌워질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나도 내 감정을 차마 갈무리하지 못한다는 뜻이야."
아라키타는 자신의 시야가 어두워지고, 곧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가, 숨이 조금 막히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꼈다. 눈 앞에서 자신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던 신카이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라키타에게 남아있는 것은 식은 땀이 축축하게 난 단단한 손바닥이 와닿은 뺨과, 턱이 아플 정도로 들어올려진 뺨과
신카이의 냄새 뿐이었다.
첫째로는 그저 스치듯 맡기만 했던 신카이의 냄새가 코 끝에 잔뜩 스며들었다는 것. 둘째로는 신카이의 얼굴에 보송보송하게 나 있는 솜털을 처음으로 바라봤던 것. 셋째로는 어깨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손 끝이 바위처럼 무거워서 뺨을 쥐고 있던 신카이의 손목을 양 손으로 붙들었던 것. 입술을 떼었을 때 숨을 내쉬면 혹시 침 냄새라도 날까봐 숨을 참고 있었는데, 신카이는 그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아라키타의 양손을 떼어다가 오른손을 자신의 어깨에, 왼손은 자신의 허리에 가져다 대 주었다. 겁 먹은 자신보다도 더 흔들리던 어깨와, 옷 아래로 느껴지는 어설픈 호흡과, 울 것 같이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나는 너를 좋아해, 야스토모.'
첫 키스가 어땠냐고 물으면 아라키타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피부만 숨을 쉬는 느낌, 물 속에 빠진 느낌, 목이 졸리는 느낌, 누군가 나를 포옹하는 느낌, 한여름 땡볕에서 한 시간 정도 서 있는 것 같은 현기증, 이불을 덮지 않고 잠들었던 다음날 아침의 찬 공기,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먼 발치에서 바라본 야구장, 불로 지지는 것 같던 팔꿈치의 통증,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모든 촉감과 냄새와 맛을 동원해봐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모습.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소리로 표현할 수 없어서, 결국 아라키타에게 남은 것은 단편적인 기억과 손 끝에 닿아왔던 체온 뿐이었다.
섹스를 하자고 했는데 키스를 하냐고 신카이에게 면박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라키타가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아라키타의 귓가에 너를 좋아한다는 신카이의 말이 먼저 들려왔다. 아라키타는 땀이 식어 서늘해진 자신의 양 팔을 감싸 끌어당기던 신카이의 피부를 느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카이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혔고, 아라키타는 보지도 말하지도 못 하는 상태에서 이마로, 뺨으로, 눈으로, 입으로, 코로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신카이의 심장박동을 듣고 맡고 느꼈다.
야스토모, 너는 내가 봐 왔던 사람들 중에서 제일 좋은 여자야.
아라키타는 마치 곧 죽을 사람처럼 방으로 돌아왔다. 발로 짚는 모든 땅이 물처럼 느껴졌고,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해초처럼 부드러웠다. 머리카락과 온 몸에 신카이의 체온이 배어있는 것 같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몰라서 신카이의 손바닥이 닿아있던 뺨만 문질렀고,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서 입이 바싹 말라도 혀로 입술을 축이지 못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고함소리, 새가 날아가는 소리, 아스팔트에 부딪히는 얼얼한 배기음, 그리고 지금 자신이 모래에 비벼대며 걸어가고 있는 고무깔창의 마찰음. 아라키타는 옷을 갈아입고 밥을 먹고 씻고 침대에 누우면서도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좋은 여자라고? 어떻게? 왜? 무슨 이유로? 내 어디가? 내 모든 게? 이 몸이? 이 피부가? 이 눈이? 이 머리카락이? 내가 지금 있는 이 방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내 침대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내 이불이 하얗고 푹신푹신하다는 것도 모를 거면서, 내 팔뚝 안 쪽이 무슨 색깔인지, 내 무릎뼈가 어떻게 생겼는지, 내 복숭아뼈가 얼마나 단단한지, 내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더 모르면서.
아라키타는 양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가, 입술을 만졌다가, 자신의 귓불을 괜히 문질러봤다가, 괜히 눈물이 나서 엄지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축축하게 젖어갈 관자놀이보다도 먼저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에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흰 시트 위에 꽃처럼 점점이, 열매처럼 동그랗게 떨어져 묻어있는 핏방울. 아라키타는 생각했다.
아, 초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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