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계집애처럼 혼자서 영화도 못 보냐고 말했었다. 같이 보러 가기로 했던 사람이 급한 일이 생겼다, 표가 아까우니 같이 보러 가자. 별 거 아닌 일인데도 나는 너에게 부탁하는 게 죽기보다 힘들었다. 네놈 지금 나를 땜빵 취급 하고 있냐고. 날카롭게 돌아오는 대답이 조금 무서웠지만 그래도 물러설 수 없었다. 미안해, 야스토모. 그렇지만 혼자서는 외로우니까. 네가 외롭다는 단어에 민감하게 대답하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네 앞에서 항상 외로운 사람으로 있어야 했다.
팝콘 필요해? 너나 먹어. 콜라는 코카콜라지? 맞고 싶은 거지 지금? 콜라컵을 받아 든 채 에스컬레이터 두 계단 위에 서 있는 너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바싹 마른 어깨뼈도, 팔을 뻗을 때마다 아슬아슬한 팔꿈치도, 갈고리처럼 뾰족한 손가락도. 나는 너를 올려다보면서도 네 모든 모서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영화가 시작했을 때, 기억나? 너는 안 먹는다던 팝콘에게서 손을 떼지 못 하더라. 빤히 쳐다보면 네가 먹지 않을 것 같길래 일부러 팝콘을 잊어버린 척 했어. 너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광고를 바라보면서,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틈틈히 털어내면서, 먹고 마시고 웃으면서, 조금은 지루한 듯이 영화를 기다렸는데.
정작 영화가 시작할 땐 팝콘통이 비어있었지? 미안해. 일부러 작은 사이즈로 샀어. 난 네가 당황하는 표정을 바라보는 걸 즐기니까, 그런 사소한 것에서 네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나는 굳이 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소리없이 신경질내는 너를 볼 수 있어. 너는 팝콘통을 무릎 위에 올리고 마저 튀겨지지 않은 옥수수알맹이들을 바닥에 가라앉힌 채, 한참동안이나 이어지던 배급사 영상을 삐딱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었지.
영화 재미없었지? 그럴 것 같았어. 너는 몰랐겠지만, 나는 항상 아닌 척 네 약점을 찌르는 비겁한 사람이니까. 자막영화 싫어하지?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자막영화로 골랐어. 드라마 영화라서 중간부터 잠들었지? 네가 졸 걸 알아서 그 영화를 예매했어. 너는 내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으니까,
미안해, 야스토모. 나 처음부터 거짓말했어. 같이 보러 가기로 한 사람은 애초부터 없었어. 처음부터 좌석표는 네 몫이었던 거, 끝까지 몰랐지? 몰라도 돼. 그렇지만 거긴 원래 네가 한 시간 반동안 앉아있어야 할 자리였어.
네가 나랑 본 영화는 기억 잘 못 하는 거, 나 알고 있어. 고등학생 때엔 고작 영화를 보기 위해 낼 시간따위 있지도 않았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학과 공부며 술자리며 이리저리 불려다녀 눈붙일 시간도 없었으니까. 넌 고작 세 네 번 왔을 뿐인 영화관을 낯설어했고, 나는 영화관을 낯설어하는 너를 낯설어했고.
맨 프롬 어스.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본 영화였는데, 일주일 후에 물어보니까 머뭇머뭇댔던 거 아직도 기억나. 괜찮아. 사실 나도 영화 내용은 기억 잘 못 하니까. 재미없어서 그냥 졸아버렸다고 왜 그런 재미없는 영화를 예매했냐고 짜증내는 너에게 나도 중간부터 잤다고 그렇게 재미없을 줄 몰랐으니 봐달라고 싹싹 빌었었지.
역시 미안해.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나는 그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었어. 단지 너무 울어서 기억에서 사라졌을 뿐이야. 영화내용 설명해줄까? 아니 내가 왜 울었는지 설명을 해줄까? 듣기 싫지? 그래도 들어줘. 두 번 다시 안 볼 테니까, 아마 다시 말 할 기회도 없을 테니까.
영화 주인공은 구석기 때 태어나 여태까지 살아있는 사람이야. 러닝타임 내내 동료들은 주인공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 어디에서 태어났냐 어떤 풍경을 기억하냐. 무언가 발명한 적은 있느냐, 예수나 부처는 만나보았느냐.
계속 거짓말만 해서 미안해. 나, 사실 중간부턴 화면을 안 봤어. 네가 팝콘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조는 모습을 보면서 가끔씩 큰 소리가 들릴 때 네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아주느라고 정신이 없었어.
야스토모. 너는 네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기억하고 있어? 이런 질문 처음 받아보는거지? 아마 짜증나겠지 이 놈이 왜 이런 질문을 하나, 하고. 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질문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혀왔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기억하고 있느냐, 어떻게 그 곳에서 빠져나왔느냐. 주위의 풍경은 어땠느냐. 나는 분명히 만 사 천 년을 살아온 사람이 아닌데도, 저 질문을 듣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났어. 마치 내 감정에 대해 추궁하는 것 같아서.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어디에서부터 태어났는지, 어떻게 내 마음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너를 좋아해서 세상이 그토록 예쁘게 보였던걸까 싶어서.
계속 울어서 미안해. 그렇지만 역시 네가 옆에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나와.
내가 소리죽여 울 동안 너는 팝콘을 끌어안고 코를 골고 있었어. 내가 이걸 말해주면 너는 화를 내겠지만 그래도 이제 넌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으니까, 다 이야기할 거야. 너무 뻔한 말이지? 뻔해서 재미도 없고. 그렇지만 야스토모. 그래도 이야기하고 싶어. 그 때의 나는 잠든 너를 옆에 두고 한 번쯤 울어보고 싶어서, 그래서 그렇게 했어. 왜냐하면 이번 생에는, 평생 네 침대 위에서 함께 잠들 수 없을테니까.
좋아하는 사람 옆에서 몰래 우는 건 너무 힘든 일이더라. 눈물을 닦다 못 해 우는 게 너무 버거운 일이 되어버려서 마침내 고개를 숙였을 때, 그 때 뭐가 보였는지 알아? 시야 밖인데도 네가 보였어. 팝콘을 끌어 안고 깊게 잠든 네 모습이 보였어. 좌우가 새까맣고 시끄러운 효과음이 내 귀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너 혼자 우주에서 유영하는 사람처럼 내 시야에서 유일하게 네가 너무 하얘보였어. 마치 너랑 나랑 단 둘이 우주에 있는 것처럼, 너랑 나랑 손을 잡고 어두운 터널을 걷는 것처럼, 세상에서 유일한 너를 그순간 가득 느꼈어.
있지, 야스토모.
나
너를 좋아했어.
미안해.
같이 죽어줄 수가 없어서.
만 년까진 아니더라도, 역시 나는 더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굳이 너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만 년이 아니더라도, 천 년이 아니더라도, 오래 살려고 노력해봐도 결국 백 년 조금 덜 되게 살겠지만, 그래도 살아야겠다 하고 생각했어.
고마웠어, 야스토모. 네가 있는 동안 나는 내가 너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니까, 덕분에 살 수 있었어. 널 좋아했던 동안에는 세상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어. 어쩌다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해서 이 감정이 세상을 그토록 예쁘게 덮을 수 있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네 말투 네 행동 네 감정 네 얼굴 네가 사소하게 잡고 지나갔던 손잡이 하나하나, 그런 사소한 것들마저도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이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그랬나봐. 그래서 세상이 예뻐보였나봐.
나,
사실은 아직도 너를 좋아하고 있어.
그래서 조금 무서워.
난 사실 너를 좋아하지 않았던걸까? 그래서 네가 죽었어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걸까? 많이 생각했어. 미치도록 고민했어. 머리가 터질 것 같이 힘들었어. 네가 이런 나를 봤을 때 어떻게 이야기할까 화를 낼까 소리를 지를까 짜증을 낼까 네 행동을 하나하나 다시 떠올리면서 토하는 것처럼 울어댔어.
그래도 답이 안 나오더라.
내 생각은 내 생각일 뿐이더라.
어차피 너는 못 돌아올테고, 다시 돌아오더라도 그건 내가 사랑했던 네가 아닐 거고, 너는 아마 나를 모를 거고, 나도 그런 너를 모를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눈물이 났어. 근데 너 때문에 힘들어서 눈물이 난 게 아니라, 내가 드디어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났어. 다 큰 어른이 고작 현실과 악수를 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게 우습지만, 나는 항상 네 앞에선 비겁한 사람이었으니까. 혼자 있기 외로워하는 고등학생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생각했어.
좋아한다는 게 끝날 거 같지는 않지만, 살아야겠더라. 감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되더라도, 역시 살아야겠다고.
있지, 야스토모.
역시 좋아해.
그래도 살아갈께.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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