背敎






 세건이 사혁의 자취방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사혁과 만난지 사십 일 째 되는 날이었다. 맑은 날이었고, 슬슬 더워지는 날이었다. 사혁은 밤 아홉 시에 자신의 방문 앞에 자리한 인영을 발견했다. 센서등이 고장난 오피스텔 복도 한가운데에서 세건이 백팩 하나를 방석삼아 깔고 앉아 있었는데, 사혁은 고장난 센서등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한 번 쉬었다가, 세건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세웠다. 세건을 일으켜 세운 사혁은 도어락을 열고 꾹꾹 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별까지 누르고 닫아야 열린다, 알겠냐. 세건은 사혁이 번호키를 누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무엇인가를 가방에서 꺼내 그에게 던졌다. 월세. 네가 좋아하는 거. 사혁은 세건에게서 콘돔박스를 받아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배웠는지 모를 담담한 표정과 말투로, 고작 스무 살도 채 안 된 어린 것이 섹스로 방값을 대신하겠다 말하고 있다.


 사혁은 세건이 무슨 일을 겪고 나서 사혁의 방으로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썩 좋은 일을 겪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건은 사혁의 방에 머무르기 시작한 직후 몇 달 동안 독한 몽유병과 실어증에 시달렸지만 그러나 사혁은 세건이 앓는 것을 병이라 말하지 않았다. 사혁은 세건이 낯을 제법 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사혁은 세건이 앓는 것을 병이라 말하지 않았고, 그래서 세건은 밤만 되면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의 타일벽에 머리를 쿵쿵 처박았고, 그래서 사혁은 세건이 앓는 것을 병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또 그래서 사혁은 세건을 그 어떤 방식으로도 환자취급하지 않았다. 다만 사혁이 세건의 몽유병과 실어증을 병이라고 인정하게 된 때는 세건의 일 학년 일 학기가 완전히 끝난 그 직후의 일이었는데, 학기가 끝난 후 이틀이고 사흘이고 밤낮없이 깊은 잠만 자던 세건이 어느날 깊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사혁에게 제 베개 밑에 있던 학사경고장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세건이 베던 베개 밑에서는 세건이 대학에 입학하는 날 선물로 받았다던 바이크 키와, 어디서 사왔는지 모를 커다란 재봉용 가위가 하나 나왔다. 사혁은 인정했다. 세건은 앓고 있었다. 


 사혁의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소문들을 따지자면 밑도 끝도 없었기 때문에, 세건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세건의 휴학이나 자퇴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건은 휴학계를 내지 않았다. 사혁이 생각하기로 세건이 대학을 포기하거나 회피하지 않은 이유는 유일했다. 제 동거인이 마침 사 학년 일 학기의 수업을 모두 끝마쳤으니 남은 반 년간 총 구 학점의 수업을 듣고 나면 세건도 세건의 동거인도 완전히 졸업을 할 것이라고. 그 때까지는 버텨야 한다고. 저를 강간한 사람에게 일 년은 몸을 의탁해야 한다는 사실이 굵직하지 못 한 세건의 신경줄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었다. 
 세건의 병세는 정확히 일 년을 갔다. 몽유병과 실어증을 앓고 나니 그 다음은 조현병이었다. 사혁은 매일 아침 반 강제로 잠에서 깨어나 베개 밑의 가위로 자신의 손가락 두 개를 쳐내려는 세건과 마주해야했다. 왜 울어 한세건이, 너 또 왜 울어. 손가락이 열 개나 돼, 손가락이 열 개나 돼, 나 손가락이 열 개야, 나 손가락이 열 개나 돼. 그러면 사혁은 세건을 끌어안고 그를 어르며 원래 사람은 손가락이 열 개다, 원래 사람은 손가락이 열 개다. 그렇게 속삭일 수 밖에 없었다. 손가락이 여덟 개보다 두 개나 많아서, 손가락이 열 두 개보다 두 개나 모자라서, 방 안에 또 다른 내가 말을 걸고 있어서, 창문 앞에서 또 다른 네가 문을 두드려서. 세건은 온갖 이유 때문에 서러운 아침을 반 년이나 보내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세건의 광증이 조금 가라앉고 나자 사혁은 졸업을 했다. 그리고 이 학년 일 학기 동안 세건은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밥을 먹고, 사혁의 얼굴을 보고 난 다음에 잠을 잤다. 사혁의 자취방 비밀번호는 여전히 별로 끝났고, 그 안에서 여전히 사람이 둘 살았고, 세건은 사혁이 술을 사들고 돌아오는 날에는 섹스를 했다. 남들이 수군대는 그 더러운 호모섹스, 세건은 사혁과 키스를 했고, 사혁과 키스를 한 다음에는 사혁과 섹스를 했고, 사혁과 섹스를 한 다음에는 사혁이 피는 담배를 피고, 사혁이 피는 담배를 핀 다음에는 다시 사혁과 섹스를 했다. 사혁은 엎드린 자세로 섹스를 하는 것을 선호했고, 세건도 그랬다. 사혁이 세건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담배냄새를 맡을 쯤에 세건은 대답한다. 개끼리 섹스하는 것 같아서 기분좋아. 나는 너한테 이 자세로 강간당했던 거라 기분이 좋아. 어, 나 후배위 좋아해. 개섹스, 호모섹스, 후장 씹창나는 거, 강간 당하는 거 다 좋아해, 좋아해. 
 사혁이 출근을 하기 시작하고 세건은 사혁이 입지 않는 옷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담배 대신 사탕을 물고 다녔다. 사혁은 세건을 위해 츄파춥스 스틸캔을 잔뜩 사 놓았다. 세건은 매일 아침 신발장에 올려져있는 깡통에 손을 집어넣고 휘적휘적, 그 날마다 마음에 드는 색깔 하나를 골랐다.
 엄지와 새끼 손가락에 베인 상처가 잔뜩 생겼지만 어느 누구도 세건을 바라보는 일이 없어서 놀림받는 일도 없었다. 세건은 수업을 듣다가 가끔 사혁의 코트에 배어있는 사혁의 담배냄새를 맡는다. 사혁의 담배냄새를 맡을 때마다 자살충동으로 몸이 동했다. 당장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기도 하고, 팔뚝을 깊게 긋고 싶기도 하고, 지금 당장 사혁을 불러내 다시 한 번만 강간을 해달라고 애원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세건은 강간범과 함께 살고 있다. 강간범과 함께 살고, 밥을 먹고, 섹스를 하고, 같이 산다. 세건은 저가 신경줄이 강한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지자면 지금 자신의 삶은 그 자체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만이고, 침묵이고, 폭력인 것이 맞다. 세건은 가만히 사혁의 냄새를 맡다 고개를 든다. 작년 세건이 사혁에게 강간을 당했던 바로 그 직후에 세건을 연구실로 불러내 네가 정말 게이냐고 물었던 여교수가 경영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었다.


 이 학년 이 학기였던가, 삼 학년 일 학기였던가. 그 둘이 살기 시작한 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세건과 사혁은 술잔을 마주했다. 도수 높은 양주인데, 맨날 소주니 맥주니 노가리 까지 말고 취할 때 작정하고 크게 취하는 게 낫지 않겄냐. 타이를 풀어헤치며 현관으로 들어서는 사혁을 본 세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레포트를 작성하던 노트북을 덮었더랬다. 안주도 없이 불 같은 술을 꼬박꼬박 넘기고, 식도가 타는지 위장도 타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속이 뜨거웠다. 연거푸 술잔을 비운 사혁은 술에 취한 낌새 하나 내비치지 않고 세건에게 물었다. 한세건이, 나 좋아하나. 세건은 불처럼 뜨거운 양주를 들이킨 후 안주 대신 사혁의 자켓 안주머니에서 하얀 담배곽을 하나 꺼내 담배를 한 개비 문다. 내가 너를 왜 좋아해. 세건은 그렇게 말하고 싶다고 어렴풋이 생각을 떠올린다.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해. 그렇게 자신이 말을 했던가. 아리까리한 정신 속에서 세건은 마약같은 담배를 피다가 사혁에게 키스했다. 그러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나는 지금 정신병자고, 옛날에도 정신병자였고, 너랑 같이 사는 것부터 정신병자였고, 병신새끼, 병신새끼, 병신새끼, 병신새끼…. 어디까지가 속내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알 수가 없고, 이성과 감정이 기름처럼 뒤섞이고, 세건은 술을 마시다가 담배를 피우다가 낄낄거리고 웃다가, 야, 나 있잖아, 이제 애미애비없는 새끼됐어, 이제 나한테 남은 건 너밖에 없어, 내 인생 좆되게 한 새끼, 내 인생 조진 개새끼. 세건은 그렇게 말을 하다 잠들었다. 술도 담배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하나같이 담담하고 건조하게, 나는 네가 아니면 갈 곳이 없어. 좋아해, 좋아해, 좆같은 새끼, 개좆같은 새끼, 나는 아프니까 살살 다뤄줘.
 

 독한 양주 탓이었는지 세건은 다시 일주일을 앓았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사혁은 세건을 위해 가장 높은 온도로 보일러를 켜주었다. 발바닥 가죽이 몽땅 타버리도록 뜨겁게 보일러를 틀어놓고서도 세건은 달구어진 방바닥보다도 뜨거운 열몸살을 앓는다. 사혁은 몸살을 앓는 세건에게 물었다. 그렇게 아프면 어디 병원에서라두 앓아눕는 게 어떠냐. 그러자 세건은 부어오른 목구멍을 가라앉히기 위해 사탕을 한가득 입에 문 꼴로, 사혁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앓다 죽어도 네 앞에서 죽을라고, 내 인생 조져놨으니 나 뒤지더라도 뒤지는 꼴까진 보고 가야 하지 않겠냐 개새끼야. 사혁은 세건이 몸살이 아니라 간절기를 앓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혁은 식은 땀을 흘리며 창백하게 질려있는 세건의 하얀 등을 바라보고, 불이 꺼져있는 자취방 천장을 한 번 바라보고, 눅눅하게 숨이 죽은 세건의 이불을 한 번 바라보고, 저기 저 쪽 어둡게 불이 꺼진 현관의 츄파춥스 깡통을 한 번 바라보고, 마치 뜨겁고 검게 보일 것만 같이 달아오른 숨을 내쉬며 찰나의 죽음을 유영하고 있는 세건을 다시 바라본다. 나는 네가 아니면 갈 곳이 없어, 나는 아프니까 살살 다뤄줘. 사혁은 자신을 찾아오기 전, 세건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다시 한 번 추측을 해 본다. 아마 끔찍한 일이었겠지. 다신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거다. 기반과 상식과 도덕과 애정을 모두 무너뜨리는 일이었을 거다. 사혁이 간절기를 앓는 세건의 얼굴에서 정신의 현을 고르다 못 해 삶을 연주하기를 포기한 세건을 바라본다. 세건의 뼈가 하얗고 고요하다. 성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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