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곤, 그거 알아요? 원래 너무 어린 애들이 죽으면, 그런 건 요절이라고 하지도 않아요. 죽었다, 가버렸다, 떠났다, 돌아갔다, 기타등등 뭐, 그런 말들. 그런 말로도 제대로 표현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생각해봐요. 요절이라는 게, 이런 말이 알고 보면 참 재밌어요. 단편적으로 예를 들자면, 음, 최소한 몇 년을 살아야 요절로 인정을 받냐, 뭐 이런 의문 같은 것들? 사람이 죽는다는 것, 사람이 떠난다는 것, 사람이 죽었다, 갔다, 돌아갔다, 귀천, 뭐 이런 말들, 자주 쓰잖아요? 누구누구가 요절했다 혹은 누구누구가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해버렸다, 약간 관용구처럼. 요절한 작가, 음악가, 건축가,사업가, 발명가, 미술가, 예술가, 시인, 가수, 무용가, 운동선수, 꼭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도요. 같은 마을 사는 누가 요절했다던가, 그런 것, 그런 경우, 많지 않을까요.
잘 안 와 닿아요? 사실 잘 안 가 닿을 것 같은데, 특히 아르곤한테는. 아르곤은 몇 살에 한 번 죽었는데요? 그러니까, 인간이었을 때. 아, 이 말 약간 전생체험같아. 인간이었을 때, 인간이었을 때. 뭐, 아르곤도 본 투 비 뱀프 로열 블러드, 이런 건 아니잖아요, 석세서니까. 몇 살에 얼어죽었어요? 얼어죽었었다고 했잖아. 아, 이야기 하기 싫어요? 왜요? 아낙스 때문에? 지금은 내가 아낙슨데 뭐. 아, 이해는 가요. 그런 거죠? 구-남-친-같은. 하하.
어쨌든, 이렇게 자주 쓰이고 이야기 나오는 요절이라는 거, 그러면 사람이 도대체 몇 살에 죽어야 그게 요절로 인정을 받는 걸까요? 너무 어려도 안 되고, 너무 늙어도 안 되고.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죽었을 때 그걸 요절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또 예순이나 일흔 먹은 남자가 죽었을 때 그걸 요절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구요. 어떻게 보면 참 까다로워요. 요절이라는 말. 사전적 정의로는 젊은 나이에 죽음. 아마 실제로도 젊은 나이에 죽음. 젊다와 어리다는 사실 다른 말이니까요. 젊다, 젊다의 기준이 뭘까요, 어리다는 기준은 또 뭐고요. 사실 어리다, 젊다, 이런 개념은 아마 인류가 성장을 시작했을 때부터, 아마 꼭 인류가 아니어도, 태고적부터 존재해왔을 개념일텐데. 제가 요즘 들어 하는 생각이 이거에요. 사람과 함께 존재해온 것들 중에 사람이, 그러니까 사람 입장이죠. 사람 입장에서 이해하기 쉬운 건 하나도 없어요.
아,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요, 오늘은 한국을 봤어요. 아시죠, 제 고향. 고향이라고 말하기에도 어색하군요. 기억이 흐릿해요. 한국이요, 거기서 살았을 때, 거기서 살고 있었을 때, 행복하기만 했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 때의 기억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역시 여기 제 머리 속에, 뭐가 하나 들어있기 때문이에요. 여과기나 필터 같은, 그 비슷한 것? 평범한 사람들은 다들 그러더라구요. 추억보정이라고. 재미있지 않아요? 기억이 흐려지면 흐려질수록 아름답게 기억된다니, 살기 참 편한 기능이에요. 아마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저한테는 특히 그래요. 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래되지 않아도 제 기억과 추억이 흐려지지 않아도 제 인식 속에서 아름답게 남는다는 거겠죠. 이게 바로 릴리쓰의 장치고, 릴리쓰의 함정이고, 릴리쓰의 선물이고. 사실, 아, 막말로, 보통 사람들에게는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산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은 아니잖아요. 힘든데 어떻게 행복해. 아무리 행복이 상대적이라고 해도. 근데 전 행복하다고 느꼈었거든요. 제가 생각하고 그린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고, 행복이 있고. 이제 와선 제가 생각해왔던 그런 것들이 모두 릴리쓰가 만든 장치였나 싶지만, 그래서 가끔 슬퍼지지만서도.
어쨌든 오늘은 한국을 대충 한 번 훑어봤는데,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 섹스는 됐어요. 엊그제도 했고, 어제도 했고, 오늘은 좀 쉽시다 뼈 삭아요. (흡혈귀도 뼈가 삭던가?) 속으로 생각해도 다 들리거든요? 저 테트라 아낙스거든요?
어쨌든, 어떤 여자가 한 말인데, 예뻤어요 그 여자. 그래서 잊혀지지가 않나봐요 내 이상형이라. (얼굴이 제 이상형이었어요. 진짜 예뻤다니까요. 게다가 연상이야!) 스펙을 읊어볼게요. 이십 팔 세, 서울, 강서구에, 키는 백 육십 칠에, 혼자 살고 연봉이, 알았어, 알았어요. 농담이에요. 질투하는 거에요? ……고마워요.
그 여자가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다가, 앞으로도 누워있을 예정이었거든요,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하는 생각이 딱 이거에요. 나는 요절한 천재가 되고 싶었어. 예뻐서 그랬을까, 아니면 내 이상형이라 그랬을까, 그것도 아니면 내일 자살할 운명이라 그랬을까. 저 문장이 계속 마음에 콱,하고 박혀서 안 빠지더라구요. 나는 요절한 천재가 되고 싶었어, 나는 요절한 천재가 되고 싶었어. 그래서 자살을 하는 걸까. 내일, 어……, 지금 한국은 열 두 시 지났나요? 아, 지났네. 그러니까 한국 시간으로 오전 두 시 쯤에 투신을 해서, 죽어요. 왜 이런 이야기를 했냐면, 지금이, 바로, 한국 시간으로, 새벽, 한 시, 오십, 팔, 구. 말을 하는 도중에 보게 되겠네요. 점심으로 스시를 먹는 게 아니었는데. 속에서 생선 비린내가 올라와요.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냐면, 아르곤, 제가 이 자리에 앉은 건 제 의지잖아요? 그래도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저는 말이죠, 저는 단 한 번도 요절하는 천재가 되고 싶다던가, 요절을 하고 싶다던가, 이런 생각들은 단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냥 오래, 행복하게, 편안하게, 돈을 많이 버는, 비웃지 말아요. 그냥, 그런 삶을 살고 싶었어요.
……. 이런 삶은 사실 단 한 번도 꿈 꿔본 적이 없고 또 꿈 꿀 필요도 없고. 저는 그래요. 이런 거 바랄 생각도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제 기준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그런 삶이 어땠냐면 이렇게 비현실적이고 그런 것보다는 공인중개사하면서, 부동산 좀 만지면서, 현금이나 좀 만지면서, 복비는 용돈으로 쓰고 돈많은 연상 누나를 하나 잡아서 등따시게 먹고 자고. 한 삼십 퍼센트 정도는 이룬 것 같죠? 부동산은 아니지만 현금은 좀 만지고, 공인중개사는 아니지만 회장 대리에, 돈도 없고 누나도 아니지만 연상 하나 잡아서. 하하.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제가 왜 죽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왜 하필 나인가. 또 다른 시점으로는, 과연 내가 스스로의 의지로 죽는 것인가 이런 이야기가 있겠네요. 궁금하지 않아요? 전 궁금한데. 저 원래 희생 같은 말 싫어해요, 저는 행복해지더라도 함께 행복해지는 게 좋아서. 희생은 손해보는 거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왜 하필 나인가. 왜 내가 죽어야 하는 걸까. 이 말 싫어하는 거 알아요. 저 같아도 그럴 테니까. 자꾸 죽는다 죽는다, 요절한다 요절한다 그런 얘기 들어서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래도 험한 말은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사실이니까. 음,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그래요. 저 같은 삶을 뭐라고 부르던가요. 예언자? 흡혈귀의 왕? 도서관? 슈퍼 컴퓨터? 데이터 서버? 적어도 도서관, 슈퍼 컴퓨터, 데이터 서버가 지금의 저보다는 수명이 더 길테니 모두 틀렸군요.
왜 하필 나인가, 왜 내가 죽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아르곤은 어떻게 생각해요? 아르곤 생각 들으려고 묻는 거 아니에요. 그냥 정리하는 거에요. 역시, 그게 바로 정답이기 때문이겠죠. 그러니까 아르곤은 그냥, 어, 아르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저는 곧 떠날 사람이고, 그 시기가 언제가 되던 간에, 아마 당신은 원하지 않겠지만, 어차피 저는 당신이 원하더라도 아르곤의 여기(톡톡) 여기에 남아 있지 않을 거에요.
좆같아요? 하하, 그래요,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그러니까 무섭지 않냐고 묻지 마세요. 사실 저도 무서워요. 그런데 원래 무서워 해야 하는 게 맞는 거에요. 원래 정답은 무서운 거에요. 모든 정답이 그렇듯이. 그런데 제가 이 무서운 말을 왜 굳이 입밖으로 꺼내 말하냐면, 어차피 당신밖에 듣지 못 할 말이니까 하는 거에요. 좀 더 적나라하고 거칠고 원시적으로 말해볼까요? 저, 금방 죽어요. 저는 이제 죽을 거에요. 역사상 가장 짧은 임기를 가진 왕,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을 왕이 될 거구요, 아무도 저를 기억하지 못 하고 저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세상이 올 거에요. 이건 예언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아마 어떻게든, 어떻게 해서든 저는 죽게 되겠죠. 그러니까 만약 제가, 당신 요절할 애인 말이에요, 내가 죽게 된다면 아르곤은, 내가 요절했다고 불러줘요.
그러고보면 흡혈귀 왕국도 참 슬퍼요? 이 놈의 왕조, 2대까지밖에 못 가다니. 영원을 산다면서, 아이러니하게, 이렇게 돈이 많은데 제대로 돈지랄도 못 해보고. 그래서 말이에요 아르곤. 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인에게 향수를 하나 맡겼거든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향일 거고, 그걸 뿌릴 사람도 세상에서 단 한 사람 뿐일 거에요. 왜냐하면 당신 전용이니까. 저 향수 이름도 지어놨어요. 제 빛나는 감성과 언어구사력으로, 아주 아름답고 뛰어나게. 돈 엄청 많이 들었으니까 뿌릴 때마다 마음껏 신경쓰세요. 아 참, 유명한 재봉사에게 정장도 하나 맡겼어요, 당신 전용으로. 입으면 정말 예쁠 거에요. 뭐, 멋있을 수도 있겠고. 드레스를 맡긴 건 아니고, 그냥 무난하게, 공식석상에서 입을 만한 그런 양복이에요. 그런 옷 싫어하는 거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제가 죽기 전에 한 번 쯤은 입어줬으면 좋겠네요. 옷이 오면 한 번 입어봐요. 아마 딱 맞을 거에요. 그 옷 입고, 제가 사준 향수도 뿌리고, 저랑 한 번 데이트가요. 그리고 제 샴푸랑 린스 훔쳐쓰는 것도 적당히 하고요. 다 티 난다니까? 전용으로 수제작하는 제품들인데, 아르곤한테서 제 냄새 풀풀 난다고 생각해봐요. 테트라 아낙스의 히트맨에게서 테트라 아낙스의 냄새가 난다, 이러면 좀 포르노 영화 같지 않아요? 물론 제 입장에서야 꼴리고 좋은데 나도 입장이라는 게 있잖아, 입장이라는 게.
어쨌든 저도 이거 돈지랄인 거 아는데, 그래도 이런 돈지랄,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구요. 비행기나 음식이나 그런 것들보다 좀 더 직접적이고 확실하지 않아요? 너랑 나랑 사귄다 하고 완전히 도장 꽝꽝 박는 거. 그러니까 어린 날의 치기라고 생각해줘요. 어차피 향수야 갖다버리면 그만이고, 안 뿌려도 그만일 테지만, 아르곤은 안 그럴 거라는 것 알아요. 쉿, 그리고 이건 아르곤에게만 말해주는 건데, 여차 싶으면 경매같은 곳에 갖다 팔아도 괜찮아요, 돈 많이 받아요. 하지만 아마 가져다 팔더라도 아르곤 외에 그 향수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거야. 장담해요. 보증해요. 나를 믿어요.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니까.
맞다, 아르곤. 가기 전에 이건 알아둬요. 제가 지은 당신 향수 이름이 뭐냐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