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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7 객지
- 2015.07.06 설맹
- 2015.07.01 사랑은 비를 타고
- 2015.06.24 바수밀다&베로니카 샘플
- 2015.06.17 바수밀다 백업
- 2015.06.14 시간
- 2015.06.06 월야환담 전력 60분 - 여름
- 2015.05.23 월야 전력 60분 - 책
- 2015.05.18 몽마썰 백업
액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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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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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건이 사혁의 집에 의탁한 것은 꼬박 세 달 전의 일이었다. 첫 한 달 간 세건은 사혁이 내어준 작은 방에서 옴짝달싹 하지 못 했다. 양 다리가 아작이 났으니 걷지도 못 하고 앉지도 못 해서, 세건은 사혁이 돌아와 저를 안아올려 씻겨줄 때까지 침대에 꼬박 누워만 있었다. 나 화장실은 어떻게 해. 그렇게 묻지도 않았던 기억이 난다. 세건은 침대에 누워만 있던 만 한 달간 사혁과 눈도 마주친 적이 없었고, 사혁은 세 시간마다 집에 들러 꼬박꼬박 그런 세건을 들어다가 화장실에 집어 넣어 줄 뿐이었다.
피 냄새도 나지 않고 화약 냄새도 나지 않아. 라이칸스로프 주제에 향수나 들이 붓고, 도대체 뭐 하자는 짓인지. 심지어 다리가 아작이 난 저에게 흡혈귀 피도 쓰지 않았다. 등짝에 욕창이라도 생길 것처럼 그저 가만히 누워만 있던 세건은 헛웃음을 지었다.
기이하게도 이 곳의 사혁에게선 향수 냄새 이외에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새까만 정장을 입고 아무때고 집을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니 떳떳치 못 한 일을 하는 것은 분명한데, 예의 그 공장에서의 정액 냄새나 화약 냄새, 하물며 피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집 밖에 나섰다 돌아와 세건을 안아드는 사혁에게서는 희미한 담배 냄새와 담배 냄새를 가리기 위한 향수 냄새만이 독하게 풍길 뿐, 사혁은 직접 운전대도 잡지 않는지 운전을 하는 이라면 으레 묻어날 법한 손바닥의 가죽 냄새도 그에게선 풍기지 않았다.
세건은 어느 날 허공에서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세건은 성장호르몬도 맞지 않은 빈약했던 고등학생의 몸으로 아스팔트 길바닥에 패대기쳐져 있었고, 죽었던 것이 확실한 사혁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작이 나버린 양 다리를 끌며 핏물바닥을 엎드려 질질 기고 있는 세건을 발견한 사혁은 심란한 표정으로 담배를 한 대 태운 뒤 그을 들쳐 업은 채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세건은 뼛조각이 들어있는 다리가 허공에서 흔들리는 고통에 몇 번이고 까무라쳤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사혁의 집이었다. 아, 깼어? 세건의 하얀 깁스에 매직으로 다리병신이라고 적고 있던 사혁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세건은 사혁이 씻겨준 덕에 뽀송뽀송한 몸으로 침대에 누운 채 생각을 했다. 세 시간마다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사혁에게서는 햇빛냄새, 담배냄새, 향수냄새만이 났다. 화약, 피, 정액, 마약. 월야와 관련된 그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곳의 사혁이 자신이 알고 있던 사혁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히 알겠으니, 이제 세건은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가. 사혁은 피범벅이 되어 바닥을 기고 있던 세건에게 흡혈귀 피도 붓지 않았고, 그런 세건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대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 곳에는 흡혈귀가 없다. 이 세계에서 세건은 할 수 있는 일도 할 일도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넘어서, 세건이 기어 올라갈 벽조차 없는 낯선 현실이 세건에게 와 부딪혔다. 그저 가만히, 민간인이 된 어느 알 수 없는 사혁이 자신에게 베푸는 호의를 받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일도 세건의 것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세건은 일단 몸을 회복하기로 일주일 만에 마음 먹었다. 그리고 꼬박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제 발로 설 수 있게 된 세건은, 어느 십 이 월의 날 사혁의 식탁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세건이 침대에서 일어나게 되자 사혁이 낮 시간 동안 자신의 집에 들르는 빈도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세건의 걸음은 아직 절뚝거렸기 때문에 사혁이 세건을 도와준다고 나설 법도 했지만, 사혁은 그저 식탁에 가만히 앉아 토스트기를 기다리는 세건의 앞에 우유 한 잔을 부어줬을 뿐 세건의 활동에 가타부타 간섭하지 않았다.
세건은 걸을 수 있게 된 후 사혁의 집 안에서 점점 제 영역을 넓혀가면서, 이 세계에 흡혈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했다. 십 층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여기에서 뛰어내릴까? 여기서 뛰어내리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영문도 모른 채 나약한 육체로 돌아온 세건에게 투신은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베란다로 절뚝절뚝 향하는 세건을 사혁이 막아서곤 했기 때문에 결국 세건은 세 달이 지나도록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지 못 했다. 이봐, 소년. 네가 죽건 말건 사실 나랑 상관은 없는데 내 앞에서 뛰어내리지는 말지 그래. 주워온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게 있지 않나? 종잣돈도 회수 못 했는데 부도가 나버리면 개미는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마치 짐승새끼 하나를 주워온 듯한, 반쯤 되다 만 사람새끼도 따지고 보면 짐승새끼이니 그 말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사혁은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처럼 세건의 의사와 행동을 제한적으로 존중했다. 세건에겐 사뭇 낯선 일이었다.
몇 번의 투신시도가 불발로 끝나고 난 뒤, 세건은 사혁과 겸상을 하기 시작했다. 세건은 오후 느지막히 일어나 가벼운 홈웨어 차림의 사혁과 얼굴을 마주했고, 때때로 복숭아잼과 열무김치라는 괴상한 레시피의 프렌치 토스트를 받아 든 채 인상을 찌푸렸다. 이걸 처먹으라고? 싫으면 굶던가 네가 하던가. 세건은 사혁이 사다준 새 칫솔에 치약을 짜고 양치를 하면서, 담배를 꺼내 물고 현관문을 나서는 사혁의 뒷모습을 지켜본 뒤 화장실로 돌아갔다.
그렇게 두 번째 달을 지냈다. 해가 바뀌고, 달력도 바뀌었다. 사혁은 오후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생활을 했다. 세건 또한 오후 늦게 일어나고 새벽에 자는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세건은 사혁의 생활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두 달 동안 지켜본 사혁은 생각보다 훨씬 단정한 생활을 했다. 사혁은 자신의 집 안에서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재떨이조차 사두지 않았다. 날짜가 되면 꼬박꼬박 쓰레기봉투를 가져다 버렸고, 매일매일 청소와 세탁을 하며 때때로 세건의 시선이 TV에 오래 머무른다 싶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양 손 가득 물건들을 사오기까지 했다.
사혁의 이런 행동에 세건의 배알이 뒤틀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세건은 단련한 적 없는 낯선 육체와 흡혈귀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증오하는 자의 생활에 섞여 들어가게 된 자기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흡혈귀를 고문하거나 짓밟지 않는 사혁의 존재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가 바뀐 1월, 세 번째 달의 두 번째 주, 세건은 소파에 사혁과 나란히 앉아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사혁은 대답했다. 되는 대로 사는 사람.
되는 대로 살다 보면 길에서 이름 모를 사람도 줍고, 주운 사람 애지중지 먹여키우고서 룸메이트로 들이나? 세건이 사혁을 노려보자, 사혁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으며 세건을 바라보았다.
아니지, 그 생각은 틀렸어.
…….
나는 내가 꼴리는 놈만 주워.
이 새끼 정도면 박을만 하겠다 싶은 놈만 줍지. 난 나쁜 놈이라서 병신새끼랑만 섹스를 하거든.
기왕이면 나처럼 여기가 병신이어도 좋고, 아니면 너처럼 다리병신이어도 좋고. 사혁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꼴리거든, 어디 한 군데 모자라면. 네가 다리 아작나서 기어다니는 걸 보니까, 그 생각이 들었어. 아, 얘를 데려다가 키워야겠다. 그러고서 나중에 자길 왜 주워왔냐 그러면, 그 때 섹스해야지.
사혁은 세건을 향해 몸을 돌린 채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기어다니는 꼴 보니까 느낌이 들대. 아 이 새끼 이거 만만치 않은 병신새끼로구나.
세건은 자신의 얼굴을 사혁의 손바닥이 덮는 것을 바라보면서, 눈도 깜빡이지 못 했다. 커다란 손바닥, 딱딱하게 굳은 피부가 박힌 살. 마치 사혁이 세건에게 살해당했던 그 날처럼, 사혁은 세건의 이목구비를 더듬으며 고백했다.
얼굴이 반반한 건 둘째치고 딱 보면 알지. 나 못지 않게 맛 간 정신병자 새끼,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닐 정도면 다리도 병신될 테니 이만한 연애상대가 또 어디 있겠어.
사혁이 세건의 뒤통수를 잡아채며 속삭였다. 우리 섹스할까?
이건 권유하는 거 아니야, 강요하는 거지. 보증금 낸다 생각하라구. 세건은 자신의 입 안을 무자비하게 침범하는 사혁의 혀를 받아들이며, 희미하게 터오는 아침 동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 주 동안은 사혁과 정신없이 섹스를 했다. 콘돔이 없으면 콘돔이 없는대로 뒹굴었고, 인터넷으로 주문한 성인용품이 도착할 때까지 살갗이 까지도록 맨 몸으로 뒹굴었다. 자신이 한 달동안 누워 지내던 침대에서도 섹스를 하고, 사혁과 함께 식사를 했던 식탁에서도 섹스를 했다. 세건은 대체로 눕거나 엎드려서 사혁이 자신을 찍어누르길 기다렸고, 사혁은 세건이 까무룩 정신을 놓거나 발작하듯 잠에 빠져들어도 여지없이 세건의 몸에 추삽질을 했다. 세건은 병자처럼 겨우 옅은 잠을 자다가 이내 깨어났고, 사혁이 건네주는 물을 한 잔 마신 뒤 다시 성교에 돌입했다. 소파나 식탁, 주방, 그리고 사혁이 잠을 잘 거라 추측만 하고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안방의 새하얀 침대까지, 세건은 사혁의 담배냄새조차 나지 않는 깨끗한 집 구석구석을 네 발로 기어다녔고, 짚고 일어날 수 있는 가구라면 어떠한 너비든 알몸으로 기어올라갔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셨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생활이었다. 짐승의 끝, 진흙탕의 바닥, 순수한 야만. 그러나 세건은 후회하지 않았다. 두 다리가 아작이 난 채 흡혈귀가 없는 세계의 사혁 앞에 떨어졌을 때부터 재앙은 이미 시작되었고, 세건의 것이 될 수 있는 게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자신이 제일 증오했던 자와 굴러먹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세건은 협탁을 끌어안고 사정하며 속삭였다. 당신 정말 잘 고른 거야. 나만한 병신새끼가 이 세계에 또 있을 리 없으니까. 봐. 제대로 서 있지도 못 하잖아. 사혁이 그런 세건을 추슬러 들어올렸다. 나, 사실 약도 해서 뇌에 구멍도 뻥뻥 뚫려 있을 거야. 당신 진짜 끝내주게 잘 고른 거거든. 사혁은 조금 웃었던 것도 같고, 세건의 안에 사정한 것도 같았다.
그리고 세건은 방금 세 시간 전에 사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세건은 사혁의 집 문을 열고 들어온 험악한 얼굴의 낯선 남자에게서, 사혁의 부고를 건네듣고 아 역시 그렇게 되었군, 생각했을 뿐이다. 그럼 저 여기서 나가도 되나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건은 바로 현관 앞 집의 입구에서 사혁의 보금자리를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새하얀 식탁과 새하얀 가구들, 때조차 타지 않은 하얀 벽, 약간 어두운 색의 바닥. 안방의 문 너머로 슬그머니 꽁무니를 내민 사혁의 하얀 이불와 바닥에 떨어져있는 흰 베개, 자신이 누워있던 좁은 방의 침대, 하얀 타일이 붙어있는 화장실. 그러고보니 사혁은 강박적일 정도로 새하얀 가구만을 집안에 채워넣어놓았다. 얼핏보면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지만 이 집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하얀 나머지 결국 추잡하기까지 했던. 모든 것이 창백했던 사혁의 집. 담배조차 피우지 않았던 청결한 공간.
세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혁의 새하얀 집이 안구에 문신처럼 와 처 박힌다. 눈이 부시고 시큰거리고. 인테리어 색깔이 너무나 새하얘서 그런 건지, 눈에 익은 흰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세건은 바싹 마른 팔뚝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그 차림새 그대로 세 달 만에 신발을 신었다. 이 곳은 원래 세건의 세계가 아니었고, 이 곳에서는 그 어떤 것도 세건의 것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세건은 챙겨야 할 것도, 챙겨갈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헐렁헐렁하고 커다란 사혁의 구두 하나에 발을 집어넣은 세건은 발걸음을 옮겼다. 타박타박, 덜렁거리는 구두가 현관의 타일바닥을 두드렸다. 당신이 있던 곳은 설원이었어. 아주 새하얗고, 눈이 부시고, 너무 부셔서 눈이 멀어버리는. 여기서 살았던 시간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질척하고 끔찍한 어둠으로 자리잡겠지.
철컹,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사랑은 비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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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수밀다&베로니카 샘플
우리 반엔 이상한 애가 있다.
이상한 애라기보단 조금 묘한 애였다. 항상 웃고 다니고, 키가 조금 크고, 입에 무언가를 물지 않는 날이 없는 애였다. 좋게 말하면 섹시하게 생기고 나쁘게 말하면 걸레같이 생긴 애. 잘 웃고 싹싹하게 구는데도 그 애의 소문은 항상 지저분했다. 돈을 받고 데이트를 해준다더라, 그렇게 번 돈으로 자전거를 샀다더라, 쟤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가 육십만 엔이라더라. 그 애의 소문만큼이나 이상한 것은 그 애의 성격이었다. 그렇게 더러운 소문이 뒤로 돌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본인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그 애는 단 한 마디 특별한 해명도 없이 그저 웃고 인사하고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조금 놀랐다. 그 애는 성적인 소문으로부터 무관심해보였다. 무관심이라기보단 속물적인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보였다. 그리고 세속적인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로움과 동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애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나는 1학기 중순, 그 애의 이름이 교내방송을 통해 온 학교에 울려 퍼졌을 때에야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A, A. 3학년 교무실 담당 선생님에게 와 주세요, 3학년 교무실 담당 선생님에게 와 주세요.
모두가 그 방송을 똑똑히 들었지만 그 애를 소리내어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초조한 침묵을 버티느니 대신 본관 2층 화장실로 향하는 것을 택했다. 화장실에 홀로 서 있는 그 애는 목욕하는 것처럼 세면대에 손을 담그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마주한 그 애의 눈동자는 감흥도 없이 홀로 멀뚱멀뚱했다. 그 애는 고개를 들지도, 수도꼭지를 돌리지도 않고 시선만 올려 내 얼굴을 향했다. 담임선생님이 너 내려오래. 나는 세면대 소리에 묻히지 않기 위해 나의 목소리에 온 힘을 담았지만 내 목소리는 무척이나 격앙되어 오한이 든 것처럼 떨리기만 했다. 담임선생님이? 응. 담임선생님이. 내 말을 가만히 끝까지 들은 다음 그 애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화장실을 나섰다.
나는 그 날 내내 비어있는 옆 자리를 때때로 확인했다. 교실 뒷문에 귀를 기울이며 혹시 그 애의 실내화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집중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그 애는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그 애와 마주치지 못 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났다.
방학이 끝나고 오랜만에 다시 본 그 애는 싸늘한 인상의 어느 여자애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사나운 얼굴의 그 여자애가 A, A 어디 있냐? 하며 우리 반에 들이닥치는 일이 많아졌다. A는 화장실 갔어. 어느 샌가 그 애의 메신저 역할을 떠맡게 된 내가 더듬더듬 어설프게 겨우 대답하면, 무서운 여자애는 나를 천천히 뜯어보다가 알았다고 대답한 뒤 자리를 떴다. 사납게 생긴 여자애의 이름이 B B라는 것은 한참 후에야 뒤늦게 알았지만 나는 그 이름을 부를 일이 없었다.
2학기에 들어서 B의 반과 우리 반은 일주일에 두 번 함께 체육을 하게 되는 날이 있었다. A는 체육시간이 되면 항상 나무그늘 밑에 자리잡았다. 같은 반 여자아이들은 피구도 뜀틀도 하지 않는 A를 얄미워했지만, A의 옆에 B가 앉아 있어서 A에게 무어라 핀잔도 주지 못 했다.
나는 피구를 하는 틈틈이 몰래 A를 훔쳐보았다. B는 운동장에 나오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A의 옆자리에 다가갔다. 그리고 A와 B는 똑같은 모양의 체육복을 입고 똑같은 색의 양말을 신은 채, 모두가 분주한 운동장 속에서도 세상에서 자기들만 살아 숨 쉬는 양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그 둘은 특별한 대화 하나도 없이 그저 시간만 때운다는 식으로 무표정하게 앞만 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 곳에 싱크홀이라도 생긴 것처럼 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옷이나 양말, 신발 같은 획일화된 공산품들마저 A와 B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나는 공에 맞아 여러 번 아웃당했다. 우리 팀은 주스내기 시합에서 졌다.
A는 이상한 애였다. 이상한 애라기보단 묘한 애였다. A에게는 어디에 있든 간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A가 있는 곳의 시간은 홀로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고 A가 움켜쥐면 하얀 분필도 빨개보였다.
그래서 학기 초만 해도 A의 움직임을 뒤쫓아 고개를 돌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A가 B와 함께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실에는 앳된 동경과 축축한 질투 대신 묘한 이질감이 감돌았다. A 하나에만 집중되던 시선들이 B에게도 옮겨갔고, 우리 반 아이들은 별 것 아닌 일에도 수군대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담임의 경고가 하루에 네 번 높은 강도로 아이들의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교실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A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A는 점심시간 종이 치기도 전에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다. B는 우리 반 교실 뒷문을 열고 나에게 A의 행적을 들은 다음 다시 쏜살같이 멀어져 사라졌다. A의 위치를 모르면 B에게 핀잔을 들었기 때문에 A의 궤적을 파악하는 것은 어느새 나의 일과가 되었다.
별다른 큰 일 없이 몇 달이 지났다. 우리 반은 여전히 정제되지 않은 이질감과 적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자애들은 자주 울었고 남자애들은 자주 싸웠다. 무엇이 그토록 아이들을 날카롭게 벼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모두가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날카롭고 따갑고 사나워 눈물짓는 팽팽한 와중에도 A는 바람같이 우리 반의 구석에 잠깐 머무르다 움직였단 것이다.
나는 항상 A를 지켜봤다. 우리 반 아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알게 모르게 A에게 정신적인 이지메를 가하고 있었다. A는 자신을 밀어내는 아이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그저 가만히 스스로가 무리 바깥쪽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네들이 A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 한 것 같았다. A는 미묘하게 열이 어긋나 삐뚤어진 내 책상을 알면서도 그저 아이들이 자신의 옆을 지나가거든 안녕, 하고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A 본인이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서 별다른 상처를 받지 않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안쓰러웠지만 내가 A를 굳이 신경 써서 챙겨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늦가을이었다. 단풍이 빨갛게 떨어지는 시기였다.
그 해 가을바람은 이상하게도 유독 서늘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니트 조끼를 꺼내 입었지만 추위를 많이 타는 몇 명은 목도리를 두르고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한 해의 끝을 알려가는 낙엽의 알람 속에서, 내 차례의 주번이 돌아왔다.
나는 학교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남아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돌아다녔다. 날씨가 갑작스레 추워진 탓에 오랫동안 학교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운동장 구석에서, 과학실 구석에서, 가정실 구석에서 무언가에 열중하는 아이들에게 폐문시간임을 알리며 생쥐마냥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온 학교를 뒤지고 나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비상계단이었다. 대체로 잠겨 있는 날이 많아 수위아저씨들조차 잘 안 다니는 비상계단인데 굳이 내가 이곳을 확인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등줄기가 오싹하게 소름이 돋고 괜히 머리가 찡하게 울리기에 나는 비상출입구의 문을 열었다. 비상계단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는 B와 A였다. 나는 뒷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A가 B의 허벅지를 벤 채 길쭉하게 가로질러 비상계단 하나를 차지하고 누워있었다. 조심스럽게 연다고 열었는데 오래된 쇠문이 찢어지는 마찰음은 비상계단을 쩌렁쩌렁 흔들었다. 그러나 B와 A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깜짝 놀란 것은 문을 열어제낀 내 쪽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고, 뒷걸음질을 치는 통에 다리가 꼬여 복도바닥에 세게 주저앉았다. 내가 엉덩방아를 찧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B는 고개를 돌렸다. A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A가 어디 있냐던가 A가 오늘 오전에 학교를 왔냐던가 A가 오늘 몇 시에 등교했냐던가. 여태까지 내가 B에게 들어온 질문과는 사뭇 다른 저의가 그 기저에 진득하게 깔려있었다.
견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세련된, 분노라고 하기에는 너무 날 것인, 도무지 내가 파악할 수 없는 낯선 의도였다. 나는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붙기 시작했다. 혼신을 다해 마른 침을 삼킨 난 B의 말에 겨우겨우 대답했다.
"폐문, 폐문시간이라서……. 이제 집에 가라고……. 문 잠가야 해서……."
B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는 건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끙끙대며 뒤척이는 A를 바라보며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간 A의 교복치마를 내려 주었다.
"A."
"A, 일어나."
"집에 가야 돼."
"일어나, 바보야."
"두고 갈 거야. 일어나."
B는 A의 허벅지에 오른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이야기했다. B의 목소리는 빈말로라도 썩 듣기 좋은 톤이 아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가만히 가라앉아 마치 아무런 방해물도 없는 널찍한 곳에 흐르는 물처럼 놀랍도록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A는 B가 다리를 붙들고 흔드는 와중에도 깨어나지 않았다. A가 무척 깊게 잠든 것 같아 나는 숨을 죽였지만, B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을 봐서 A는 아마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B는 목소리를 키웠다.
"안 일어나면 버리고 갈 거야."
A가 발바닥을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A는 신발을 벗고 있는 채였다.
"어리광부리지 마."
"니네 반 애가 보고 있어."
A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가 기지개를 폈다. A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몇 시야?"
"폐문시간."
"추워."
"그래서 조끼 입으랬잖아."
"조끼는 안 예쁜걸."
"언젠 예쁜 거 입고 다녔다고."
B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A보다 두 계단 밑으로 내려가 양 손을 뻗었다.
"일어나."
A가 B를 향해 두 팔을 내밀고 B가 A를 잡아당기는 순간,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B가 앉아있던 자리의 왼편, 바로 그 옆에 A의 까만 단화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A의 반질반질한 새 단화는 마치 진열대 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가지런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내가 뒤로 물러나는 와중에도 B는 A의 두 팔뚝을 붙들고 있었다. A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주는 B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자꾸 이렇게 마구잡이로 자면 감기에 걸린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감기 걸리면 B가 간호해 줄 거잖아. 멍청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런 뜻이 아니면 무슨 뜻인데? 굳이 사서 아프지 말라는 뜻이잖아. 나는 아프고 싶은데, 한 일주일 정도. 죽는다 너 진짜.
새파란 하늘이 네모나게 비치는 가을빛 비상구의 서늘한 계단. 그리고 그 위에 나란히 앉아있던 까만 생머리의 B와 까만 광택의 윤기나는 학생구두.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헐떡이는 숨소리를 죽이려고 노력했다. 왠지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것 같았다. 까만 생머리, 까만 세라복, 주름진 교복치마, 통통한 허벅지, 길쭉한 종아리, 거리낌 없어 보이는 A의 새하얀 반양말, A의 앞머리를 빗어주는 B의 가느다란 손가락.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B는 A의 부속품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A가 들이마시는 공기만 색이 다른 것도 아니었다. A와 B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같은 빛깔의 기억과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배타적인 유대감.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제일 이기적일 수도 있는 두 사람. 뱃속에서부터 혐오감이 차올랐다.
A는 자신의 등 뒤에 내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알고는 있으나 아무런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의미를 두어야 할 필요도 못 느끼고 의미를 두어도 별 다른 이점이 없는 존재. A에게 나란 사람은, 이름도 모르는 같은 반 아이들만도 못 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A는 어느새 가만히 서서 커다랗게 뚫려있는 파란 가을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흔한 숨소리도 없이 진공처럼 조용한 공기 속에서 B의 긴 생머리가 계단 바닥에 사락사락 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B. 너무 조여."
"참아."
"발등이 아프단 말야."
"새 신발이라 그래."
"한 사이즈 큰 걸로 살걸."
"저번에 그랬다가 넘어졌잖아."
"그건 그렇지만……."
"피 묻은 밴드 갈아주기 싫어. 안 넘어지게 해."
나는 A의 옆구리 쪽으로 B의 하얀 손이 거미처럼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다가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그 자리를 떴다. 조용한 복도에는 황급히 부딪히는 실내화 소리와 코끝에서 차오르는 거친 숨소리, 그리고 무척이나 서러워 삼키지 못 한 나의 울음소리만이 길게 울려 퍼졌다.
그 이후로 나는 A와 거리를 두었다. 나는 점심시간이 되면 누구보다도 먼저 교실을 나가게 되었다. B와는 점점 멀어져 어느새 복도에서 마주치더라도 눈짓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나 B 둘 중 어느 쪽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애초에 B는 A가 아니면 나와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A마저도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법 비참했다. 그것을 깨닫게 된 나는 비상계단에서의 그 때보다도 더 서럽게 울었다. 처음부터 B와 A는 내가 끼어들 수 없는 무리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너무 뒤늦게 깨달아서, 너무나도 아픈 탓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 둘은 특별한 사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려고 노력해도 바보같이 착각을 한 내가 너무 한심해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만 자꾸 차올랐다. B의 윤기나던 머리카락, B가 내려주던 A의 구겨진 교복치마, 흔한 땟자국 하나도 없이 뽀얗기만 하던 깨끗한 반양말. 남들과는 다르게 자기네만의 세상을 살아가던 그 둘을 나는 동경하고 있었다.
내가 A를 외면하기 시작한 그 때부터 A의 교복이 더러워지는 날이 생겨났다. A는 가끔씩 냄새나는 구정물을 뒤집어썼고 매일같이 분필가루가 묻은 칠판지우개로 등을 얻어맞았다. 깨끗하게 세탁한 체육복 상의가 쓰레기장에서 발견되는 일도, 체육이 끝나면 교복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때도 있었다. B는 A의 교복 뒤에 새하얗게 분필 자국이 묻은 날에는 분필만큼이나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우리 반을 찾아와 나를 불렀다.
나는 A와 B를 피해 다녔다. 그러나 수업시작 종과 함께 교실에 들어서면 반 아이들의 다양한 눈초리가 내게 쏟아졌다. 쟤도 A랑 한 패 아니냐. A랑 이전에 같이 다니지 않았나. 한때는 잘 놀더니 이제는 무시하네. A랑 친구하긴 또 싫은가 보네. 온갖 경멸과 멸시와 혐오와 비웃음이 내 머리로 쏟아졌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참을 수 없는 것은 A의 변함없는 무기질한 눈빛이었다. 나는 이지메의 방관자가 되었다.
이지메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 것 정도는 반에서 겉도는 나조차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A의 교복은 더 자주 찢어졌고, 세라복 칼라의 빨간 스카프가 무색하도록 하얀 손등 위로 피가 흐르는 날도 점점 늘어났다. A의 치마가 찢어지는 날에는 교실 뒤편에서 A를 놀리고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A를 향한 반 아이들의 응징은 점점 더 차오르기만 했다. 때로는 교실 가득 묵직하게 가라앉기도 했다. 찝찝하고 눅눅하고 조금 신경질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를 괴롭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해져만 갔다.
나는 A가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는 것을 매일같이 지켜봤다. A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가끔 내 숨을 벅차게 했고, 허벅지 안쪽을 간지럽히기도 했다. 모두의 마음속에 가라앉아있던 증오심과 질투심이 내 안의 끔찍한 성욕을 부추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잠을 자다 오밤중에 깨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깨어나는 날에는 꼭 A를 떠올리며 자위를 하다가 다시 잠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A와 B는 일주일이 넘도록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A의 책상이 비워진 우리 반은 잠깐이나마 균형을 찾았다. 그러나 그 균형이 무색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 사이에선 듣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추잡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강간, 윤간, 돌림빵, 집단섹스.
소문은 점점 더 심각해져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A가 이지메를 그만 두라고 부탁하는 대신 자처해서 몸을 대줬다는 데까지 변질되었다. 나는 그 소문을 듣는 날이면 어김없이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A가 등교거부를 그만둔 것은 방학을 이주일 앞 둔 날이었다. B도 A와 함께 학교에 나왔다. A의 커다란 눈가에는 살색 테이프가 붙어 있었고 보기 좋게 통통하던 볼살은 바싹 빠져 광대뼈가 드러나 있었다. 분홍색의 동그랗던 무릎과 팔꿈치에 네모난 거즈를 붙인 채로, A는 교복치마 밑에 체육복 바지를 받쳐 입고 있었다.
A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은 경이로웠다. A의 새하얀 실내화가 삐걱대는 마룻바닥을 밟아 누르자 말로 표현 못 할 끔찍한 침묵이 학교 전체를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A는 내 옆자리, 매직으로 잔뜩 돼지라고 낙서된 자신의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헛구역질을 하며 저리 가라고 소리를 지르자 A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그러나 조금 어색해진 웃음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미안해, 이 주만 참아줘. 이지메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B는 일 교시가 끝나자 책상을 끌고 우리 반에 찾아왔다. B의 긴 생머리는 어느새 어깨 위로 짧게 잘려 있었다. B가 내 책상과 의자를 밖으로 밀어내며 내게 소리쳤다. 선생님하고 이야기했으니까 너 우리 반 가. 우리 반 가라고. 귀 안 들려? 너 귀머거리야? 벙어리야? 왜 대답을 안 해, 너 우리 반으로 가라고! 내가 여기 앉는다고! 나는 내게 쏟아지는 B의 증오를 느꼈지만 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B의 날카로운 비명은 칼처럼 내 몸통을 후벼 파고 들어왔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을 대신해서 벌을 받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고, B는 수업 종이 치자 다시 책상을 질질 끌며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쇠파이프가 바닥에 긁히는 듣기 싫은 소리가 계속해서 내 귓가에 맴돌았다.
일주일 정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B는 매 시간마다 우리 반에 찾아왔다. 그리고 A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내게 소리를 질렀다. 너 우리 반으로 가. 나는 입을 다물었고, A도 입을 다물었다. B는 목이 말라 기침을 하면서도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끌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쉬는 시간마다 내 책상을 밖에 내팽개치려 했다. 눈가를 새빨갛게 달군 B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울음은 터뜨리지 않았다.
B는 서러워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비참했다.
A에게 붙어있던 밴드와 거즈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A의 뺨에 흐릿하게 남아있던 피멍의 흔적들은 어느새 많이 사라져 있었다. A는 점심시간이 되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A의 의자에는 B가 가져온 귀여운 디자인의 푹신푹신한 방석이 하나 놓였다.
내 눈에는 A가 앉아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것을 더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리도 아니었다. A는 나쁜 의미로 우리 학교의 마릴린 먼로가 되어 있었다. 쟤가 그, 아 쟤가 바로, 저 애가 그렇다며, 정말? 더러워. 그런 A를 꼬박꼬박 찾아와 챙기는 것은 B였다. B는 매일같이 도시락을 두 개 들고 우리 반에 찾아왔고, 점심시간까지도 남아있는 몇몇의 아이들을 찢어 죽일 것처럼 이를 악물며 노려봤다. A는 B가 찾아오고 나서야 배가 고프다며 칭얼거렸는데 그러면 B는 얌전히 도시락을 열어 풀고 A에게 수저를 쥐어주었다. 나는 책상에 엎어진 채 A의 애교어린 투정과 B의 따가운 눈초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자는 척을 했다.
A는 상처가 완전히 낫고 나서도 잘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같던 A는 마치 바위라도 된 것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가만히 나무인 양 제자리에 박혀있는 A의 모습에서 나는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키우지도 못 할 들짐승을 붙들어 우리에 가둬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A는 그 일 이후 가끔 발목까지 흘러내리는 양말을 신고 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새하얀 반양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A는 일부러 발목이 늘어진 양말을 신고 오는 것 같았다. B는 A가 그런 양말을 신고 올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허리를 숙였고, 본인의 속바지가 보이든 말든 언제 어디에서나 A의 양말을 올려주었다.
A는 허리를 굽히거나 제자리에 쪼그려 앉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게 된 것처럼 보였다. A는 절대로 허리를 숙이거나 의자가 아닌 곳에 앉지 않았다. 오죽하면 신발마저 B가 신겨주어서, 나는 무릎을 꿇어 A의 신발을 챙겨 주는 모습의 B를 자주 목격하였다. B가 A의 발등을 한 손으로 감싸 신발에 넣어주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내가 그런 상념들을 금방 잊을 수 있게 될 때쯤에 졸업식이 다가왔다.
나는 졸업식 도중 강당을 빠져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강당에 붙어있는 화장실에 가는 것이 맞는 일이겠지만 나는 무언가를 확인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본관 2층 화장실로 향하는 비상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 얼마 전 느꼈던 익숙한 예감이 나를 덮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주번을 맡았었던 어느 새빨간 가을날의 불길함, 비상구 앞에 선 나를 조금 망설이게 만들었던 오싹한 소름, 창문을 통해 바라봤던 서늘하게 새파란 하늘의 섬찟함. 그러나 나는 하나하나 조용히 계단을 밟았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있었다.
상처로만 남았던 비상출입구의 쇠문을 잡아당기자, 한껏 펼쳐진 복도가 보였다. 나는 왼편으로 꺾어 들어가 어두컴컴한 구석의 여자 화장실로 향했다. 무언가를 훔치러 가는 것처럼,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처럼, 도둑질을 하는 것처럼, 나는 까치발을 한 채 화장실로 들어가 숨을 죽였다. 오른쪽의 칸 하나가 문이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B, 나 괜찮아."
A였다.
"소독은 했어?"
B도 함께 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손이 떨려오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떨려오는 손을 진정하는 대신 숨소리를 죽이는 것에 더 집중했다.
"나 처녀도 아니고……."
"소독은 했냐고."
"별로 안 아팠고."
"의사가 뭐래? 괜찮대?"
"그냥 걔가 나 좋다고 하니까……."
"진짜 좋아하는 사람한텐 안 그래!"
B는 울고 있었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한텐 안 그래 이 멍청아! 진짜 사랑하는 사람한텐 안 그래 이 병신아! 내가 너한테 그런 적 한 번이라도 있어? 내가 너 싫다 할 때 한 번이라도 그런 적 있어? 네가 아프다 힘들다 안 하고 싶다 이럴 때 내가 너한테 뭐라도 억지로 한 적 있어? 걔가 사람이면 안 그래, 걔가 인간이면 안 그래!"
"나도 알아 B."
"고소라도, 신고라도 하지 그랬어. 차라리 나한테 패 달라고 하지 그랬어! 왜 입 다물고 있는 건데 왜 가만히 있는 건데! 네가 병신이야? 네가 호구야? 귀 먹었어? 못 듣는 것도 아니고 왜 여태까지 옆에서 그 지랄하는 거 빤히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건 또 뭔데?"
"불쌍해서 그랬어."
"그런 개새끼가 뭐가! 그런 씹새끼가 뭐가! 그런 씹어 먹어도 모자랄 년이 뭐가 어디가 어떻게!"
"내가 안 대주면 B도 괴롭힌다 했으니까……."
"네가 뭐라고 네가 그러는데! 내가 뭐라고 네가 그러는데! 나는 뭐 못 참을 거 같아? 너도 참는 거 왜 내가 못 참는데? 너는 왜 내가 못 참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나는 뭐 사람 아니야? 네 눈엔 내가 사람도 아니냐? 너보다도 내가 더 잘 참어, 너보다도 내가 더 잘 버텨! 적어도 난 입 닥치고 가만히는 안 있어!"
"B라서, 걔가 B 강간한다 그래서 그랬어."
"병신, 머저리, 호구야, 바보야, 등신아, 멍청아……."
B가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A가 벽에 기대어 있었는 듯, 고무깔창이 바닥에 미끄러지며 문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도 들렸다. 화장지가 둘둘 풀리는 소리와 함께 휴지걸이가 가볍게 흔들렸다. B는 그리도 서럽고 힘들고 괴로웠던 모든 것들을 A에게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숨도 쉬지 못 한 채 칸막이 앞에 서서 화장실의 조그마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화장실 안으로 달려오고 있었지만 화장실은 여전히 새벽처럼 어두컴컴했다. 양달과 응달, 계단과 계단, 날 힘들게 만들었던 어느 늦가을 새빨간 단풍. 지나간 시간들이 무색하도록 완연한 봄이 새까만 화장실의 정중앙을 갈랐다.
나는 내 세계와 다른 세계의 틈새로 그어진 햇빛의 경계 속에 바로섰다. 새 계절의 지탄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어떠한 변명을 거쳐도 네가 A를 강간한 건 달라지지 않는다고. 어수룩한 네 사랑이 청순하고 추잡하여 같잖은 네 욕망을 걸러내지 못 했다고. 타인에게 네 성기가 흉터로 남은 모습을 본 심정이 어떠냐고. 어둠 한가운데 휑하게 꿰뚫린 한 뼘 남짓한 질책의 공간은 먼지와 꽃가루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나의 폐가 내 산소의 거름망이라는 것을 알듯이 나의 사랑이 내 욕망의 거름망이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완결이 난 미성년을 축하하는 설익은 봄. 그 안에서 나는 A의 목 늘어진 반양말처럼, 눈이 시리도록 새파래서 창백하던 가을 하늘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알려 하지 않았던 내 징그러운 사춘기와 비로소 마주했다.
나는 빛이 비추는 화장실 바닥에 조용히 엎드렸다. 물에 젖은 타일은 축축했지만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느새 어깨 너머로 길어진 내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고 묵직하게 늘어진다. 눈앞이 뿌옇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칸 밑 조그마한 틈새로 드러나는 두 켤레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고무패킹, 동그란 앞코. 어두운 화장실 안에서도 하얀 두 실내화는 분필처럼 뽀얗게 빛났다.
"B. 울지 마."
"안 울어……."
"미안해 다음부턴 안 그럴게."
"다음부턴 절대 안 그럴 거라고 해."
"다음부턴 절대 안 그럴게."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게 해"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게 할게."
"흑……."
"울지마, B.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울지마, B. 잘못했어."
"그 새끼 내가 죽일 거야. 그 새끼 내가 죽여 버릴 거야."
"……."
"이따가 같이 병원 가. 내 앞에서 진찰받아."
"응. 알았어."
"내가 약 사 줄 테니까 그걸로 꼬박꼬박 소독해."
"응. 알았어."
"내가 맨날맨날 다리 벌려서 검사할거야. 상처 남아있나 검사할거야."
"응. 알았어."
"어허엉……."
"울지 마, B. 자꾸 울면 머리아파."
"흐어엉……."
"B, 안아줘."
"으흐엉……."
"B, 키스해줘."
"흑, 윽, 흡……."
"다 나으면 섹스하자."
"응, 응……."
나는 하얀 실내화가 하얀 실내화 사이로 끼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두 켤레의 신발이 한 켤레의 신발처럼 겹쳐져 하나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화장실을 울리던 두 목소리가 한 종류의 소리로 달라붙는 것을 들으면서, 그토록 더럽고 찬란하던 내 사랑이 마침내 끝이 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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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린 : 안녕, 리림. ...어어, 나도 리림이지만. 음.
서린 : 네가 얼마만에 태어난 리림인지 알고 있어? 고든이나 우리 어머니나 또는 네 운명이나. 생후 22개월의 라이칸스로프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엔 또 너무 귀찮은데. 어차피 내 기억을 가져가게 된다면 다 알게 되는 거기도 하고...
서린 : 그래도 심심하니 이야기해볼까! 네 이름이...오, ---구나. 이름을 알았으면 통성명을 해야지, 나는 서린이야.
(아붑, 부부부, 부부 하는 어린 아이의 옹알이가 들린다)
서린 : 역시 아직 말을 못 하는걸까? 하긴, 내가 애를 키워봤어야 알지...
서린 : ---, ---, ---... 어감이 비슷하네, 우리 형이랑. 너는 외동이구나? 형도 없고 동생도 없고 쌍둥이도 아니고, 외롭겠다.
(서린은 아기와 노는 도중에도 가끔 고개를 돌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고급스러운 수트에 주름이 가는 것도 신경쓰지 않는 서린은 아기를 안고 만지고 만지는 손길에 서스럼이 없다.)
(아기는 서린이 안아주자 잠시 진정했다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서린은 인상을 찌푸리고 작게 외친다.)
베이런 : 우리는 서린의 의식과 마음을 이해했지만, 이해를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였어요.
베이런 : 서린은 살고 싶어 했죠. 그건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어려운 과제를 앞두고도 서린은 차분하게 모든 걸 해결하고, 또 적절한 방법으로 흡혈귀들을 지배했죠. 서린은, 좋은 왕이었어요. 낙천적이고, 부드럽고, 그러나 결코 부러지지 않는, 진정으로 살고 싶어하는 왕.
(베이런이 뒤를 돌자 서린은 아기를 내려놓는다. 제자리에 똑바로 서 있는 아기, 키가 조금 컸다.)
(베이런이 넥타이를 풀자 서린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서린은 그 자리에서 비녀를 빼고 긴 머리를 짧게 쳐버린다. 바닥에 흩어지는 서린의 머리카락.)
서린 : 성장이 끝났어도 머리카락은 기는구나.
(베이런은 주머니에서 붉은 넥타이를 꺼내 맨다. 역시나 촌스럽다.)
베이런 : 서린이 왕이 된 지 50년 만에 비스트가 죽었어요.
(베이런은 비통하게 읊조린다.)
베이런 : 서린이 왕이 된 지, 정확히 50년 만이었죠.
(서린은 가만히 서있고, 베이런은 고개를 숙인다. 서린의 뒤로 아이가 책을 가져와 읽는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지 않는 서린.)
아이 : 옛날옛날 한 옛날에......
(서린은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런 서린에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 전래동화책을 읽는 아이. 서린의 곁에 베이런이 다가온다.)
서린 : 아이러니해요, 베이런. 세건 형이 죽었는데, 그런 세건 형이 죽기 사흘 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는 게. 예지라는 건 무섭네요.
(베이런은 허리를 굽히고 서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야기한다.)
베이런 : 테트라 아낙스의 무게지.
서린 : 그래요, 테트라 아낙스의 무게. 안다는 건 끔찍해요. 알고 있는데, 알고 있어서 더 끔찍해. 테트라 아낙스는 신이 아니라는 것, 테트라 아낙스의 무게라는 것...
베이런 : 서린, 너는 할 수 있는 걸 모두 했어. 이건 그저...
(베이런은 머뭇거린다. 동화를 읽는 아이의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아이 : 마녀는 말했습니다. 오, 공주님! 저는 당신이 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베이런 :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진마들이 비스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어요.
서린 : 당연하죠, 세건 형은 멋진 사람이었으니까. 세건 형은...
(조명이 모두 꺼진다. 잠시 암전.)
서린 : 세건 형이니까.
(커튼이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간다. 하얗게 바뀐 무대.)
(하얗게 바뀐 무대 위에는 서 있는 서린과, 서린을 똑 닮은 남자 하나가 앉아 있다. 판초 우의를 두른 채 앉아 있는 남자는 새까만 시체를 하나 끌어 안고 있다. 남자의 무릎 위에 시체의 초록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다.)
서린 : 이사카.
이사카 : 롯시니.
(바람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린다. 이사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서린은 자리에 앉지 않는다. 수트를 입은 서린과 우의를 두른 이사카의 복장이 대조된다.)
이사카 : 나는 알고 있었어.
서린 : 형...
이사카 : 50년이면 오래 버텼지. 억지로 온갖 비술이 쑤셔박혀진 이 테러리스트나, 민간인처럼 살면서 억지로 수명줄을 길게 뽑아낸 나나.
(거친 말과는 다르게 시체를 쓰다듬는 이사카의 손짓은 조심스럽다. 서린이 손을 뻗고 다가오려 하자 이사카가 소리친다.)
이사카 : 오 분!
(이사카는 고개를 숙인다.)
이사카 : 죽을 때 죽더라도 네 앞에서 죽고 싶지 않아, 롯시니. 아니, 테트라 아낙스.
서린 : ...
이사카 : 너는 내가 너에게 가진 이 감정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겠지. 너나 나나, 결국은 체스판의 말이었지만 그래서 너는 더 살고 싶어 했어. 인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몰랐던 때에도, 그리고 테트라 아낙스가 되고 난 후에도.
서린 : ...
이사카 : 그리고 네가 살고 싶어 하는, 네가 삶에 대해 열망하고 있던 그만큼.
이사카 : 나는 죽고 싶었다.
(서린은 입술을 깨문다. 이사카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다.)
이사카 : 나는 너를 증오할 수 없어. 그 증오가 나를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고 해도, 나는 너를 비스트처럼 증오할 수 없어! 나는, 나는 이제 더이상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아...삶이란, 삶이라는 건, 살아간다는 건...
(서린은 울음을 터뜨리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이사카가 기침을 하는 순간 바닥에 핏덩어리가 떨어진다. 무대조명이 빨갛게 번지다가 꺼진다.)
(다시 켜진 조명. 여전히 무대 위에 핏덩어리가 떨어져있다. 이사카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한세건의 시체와 핏덩어리 하나만이 남았다. 무대 위에 홀로 남아있는 베이런. 은색 넥타이를 맸다.)
베이런 : 서린은 그 후 삼 일 동안 예지를 닫았어요. 잠들지도 않았죠. 물도, 음식도, 피도,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어요. 그저 서린은 인화해두었던 사진들만을 가만히 지켜보았죠.
(베이런은 품 속에서 사진 여러 장을 꺼낸다.)
베이런 : ...
(베이런은 한 장을 뺀 나머지 사진들을 다시 품 속으로 집어넣는다.)
베이런 : 서린의 여동생은 비스트가 죽기 10년 전에 이미 죽었어요. 서린은 그걸 막을 수 없었죠.
(베이런은 손에 쥐고 있던 사진을 찢어 떨어뜨렸다.)
베이런 :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어요. 그건 어쩔 수 없었던 거죠. 딱 거기까지가 그녀의 수명이었으니까.
(베이런은 품 속의 사진들을 꺼내 하나씩 모두 찢었다.)
베이런 : 아버지, 여동생......그리고 비스트와 이사카.
(베이런은 찢어진 사진조각들을 오른발로 치운다.)
베이런 : 비스트와 이사카는 서린에게도 각별했어요. 비스트는 서린이 군림하는 이유였고, 이사카는 그런 비스트가 그토록......
(쿵! 허고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진 서린이 비춰진다.)
베이런 : .......한 존재였으니까요.
(베이런은 쓰러진 서린을 침대 위로 옮긴다. 부지런히 침대 맡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가 무언가를 적어두는 베이런과, 누워서 잠을 자는 서린의 옆에 다섯 살쯤 된 것처럼 보이는 아이가 타이어 그네를 타고 있다. 누군가 밀어주지 않아도 혼자 그네를 잘 타고 있는 아이.)
서린 : ...
베이런 : 아, 깼어? 충격이 컸나보군.
서린 : 베이런.
베이런 : 그래.
서린 : ......이사카에 대해 봐 줘요.
(눈을 감는 베이런. 서린은 협탁 위에 올려져있는 비녀를 바라본다. 긴 머리의 서린.)
베이런 : ...
서린 : ...
베이런 : ...
서린 : ...바보같아.
(서린은 양 팔로 얼굴을 가렸다. 희미하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소매도 베개도 젖지 않는다.)
서린 : 끝까지...끝까지 그런 짓을 하고 갔어요...
베이런 : 서린.
서린 : 저는...이제 세건 형의 시체도, 이사카의 시체도 평생 볼 수 없어...천 년이라도, 만 년이라도...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을 잇는 서린. 괴로워보인다.)
서린 : 모두 내게 잔인해요. 엄마도, 아빠도, 영은이도, 세건 형도, 이사카마저도...다들 너무 잔인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다른 사람 다 그랬어도, 세건 형하고 이사카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베이런 : ...
서린 : 나는 그 둘이 그렇게 살았어도 아무 짓도 안 했어, 저는 정말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착하고 얌전한 서린으로 있었어요, 그 두 사람에게는, 그 둘에게는, 형들에게는...
베이런 : ...
서린 : 베이런, 저 어떡해요. 저 이제 어떡해요. 나는, 나는 이제 시간이 무서워. 시간이 이렇게나 무서운데, 그래도 살아가고 싶은 내가 시간보다 더 무서워...
(울먹이는 서린의 목소리 뒤로 타이어 그네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림. 아이의 웃는 소리와, 타이어 그네 소리가 교차되어 들리다가 암전. 그러나 타이어 그네 소리는 3초정도 더 들려온다.)
(조명이 켜지자 22개월쯤 된 아기를 긴 머리의 서린이 안고 있다. 서툴러보이는 폼이지만 아기는 용케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 있다. 서린은 어설픈 손길로 아이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서린 : 차, 착하지...? 울지 말자...? 울면 엄마가 깨니까...?
(넥타이를 매지 않은 베이런이 아기를 대신 받아든다. 베이런이 아기를 토닥이며 아기침대에 눕히러 가자, 서린이 앞을 바라본다. 긴 머리의 서린에게 스포트라이트.)
서린 : 시간이 무서운 건 잠시였어요.
(스포트라이트가 꺼졌다 켜진다. 짧은 갈색 머리의 서린.)
서린 : 시간에 대해서는 곧 무뎌졌죠. 하지만.
(스포트라이트가 꺼졌다 켜진다. 조금 긴 암갈색 머리의 서린.)
서린 : 시간에 무뎌지는 제 무딘 성정에는 무뎌질 수 없었어요.
(스포트라이트가 꺼졌다 켜진다. 날개뼈까지 오는 검은 머리의 서린.)
서린 : 제가 죽기 전까지 저는 제가 아끼는 두 사람의 죽음조차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아니, 아마 죽고 나서도 영영 알 수 없겠죠. 하지만
서린 : 저는 그 고통에도 점점 무뎌졌어요. 시간이란, 이 얼마나 끔찍하고 친절한지.
(스포트라이트가 꺼졌다 켜진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의 서린. 서린은 긴 머리를 틀어올려 비녀를 꽂는다.)
서린 : 구백 오십 년. 테트라 아낙스로 살아온 구백 오십 년 동안, 저는 차근차근 깎여나갔어요.
(비녀를 꽂은 서린이 허탈하게 웃는다.)
서린 : 빨랐죠, 릴리쓰의 예상보다.
(암전. 베이런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베이런 : 비스트가 죽은 지 구백 오십 년 후, 새 리림이 태어났어요. 점점 정신이 깎여나가고 있는 테트라 아낙스인 서린을 쓰러뜨리고, 새로이 완전해질 흡혈귀의 왕이.
(켜지지 않는 조명. 무대 위로 누군가 걸어나온다. 딱딱한 구두소리. 툭툭 수트를 터는 소리. 이내 아기용 장난감인 딸랑이 소리가 들리고, 아기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무대 위에 홀로 있는 갓난아기. 아기에게 스포트라이트. 나레이션이 들린다.)
베이런 : 우린 수 차례 리림을 죽이려고 시도했어요.
서린 : 테트라 아낙스는 저를 좋아했죠.
베이런 : 서린 이전에, 고든이 자주 했던 일이었으니까요. 익숙했어요, 리림살해.
(아기가 뒤척인다)
서린 : 알았지만 제지하지 않았어요.
베이런 : 서린은 모르는 척 했죠. 그러나 서린이 모르는 척 하는 만큼, 우리도 서린을 모르는 척 했죠.
서린 : 저는 실제로도 관심이 없었어요. 리림이나, 릴리쓰나. 그런 것들. 모두 의미 없게 되었으니까.
(뒤집기를 시도하는 아기.)
베이런 : 하지만 우리들은 리림을 죽이지 못 했어요.
서린 :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어요.
베이런 : 점점 자라나는 새 리림과 , 리림의 얼굴 위로 겹쳐지는 우리들의 왕.
서린 : 저는 저의 후계자가 될 리림을 보호했어요. 그들 몰래, 독단적으로.
(아기가 뒤집기를 성공하자, 환호와 박수소리가 들린다.)
베이런 : 그리고 우린 그때서야 깨달았죠. 역사상 가장 짧은 임기를 가질 흡혈귀의 왕, 월야의 지배자.
베이런 : 서린의 깊숙한 곳, 그의 자살충동을.
(암전)
(조명이 켜진다. 비어있는 서린의 침대와, 서린의 침대 옆에서 타이어 그네를 타고 있는 아이. 제법 큰 아이는 혼자 발을 구르며 그네를 타고 있다. 그런 아이의 뒤로 다가오는 짧은 검은 머리의 서린. 아이의 등을 몰래 밀어준다.)
아이 : 어?
서린 : 하하하!
아이 : 씨이, 깜짝 놀랐잖아!
서린 : 씨이? 형한테 씨이?
아이 : 떨어질 뻔 했단 말이야!
서린 : 떨어지면 형이 잡아주면 되지!
아이 : 형은 무슨 운동선수야? 앞으로 넘어지는데 그걸 어떻게 형이 잡아!
서린 : 형은 가능해. 이 형아는 전지전능하거든? 서린 형님~ 하고 부르면, 이 형이 뭐든지 다 이루어줄게.
아이 : 안 믿거든? 거짓말 좀 그만 할래?
서린 : 어어, 진짜라니까? 왜 형 말을 못 믿어 읏차!
아이 : 어, 어, 어, 형 너무 높아!
(떨어지는 아이를 받아드는 서린. 구김없이 웃는다. 양쪽 눈 색깔이 달라서 놀랄 법 한데도 아이는 서린의 붉은 눈을 피하지 않는다. 나레이션.)
서린 : 릴리쓰고 리림이고, 그런 건 이제 저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어요. 제가 사랑했던 사람들, 제가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랑하고 미워했던 두 사람이 릴리쓰였고, 리림이었으니까. 그런 게 이제와서 무슨 의미인가 싶어졌어요.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어요. 그저 제가 바라는 건, 이 아이가 15년, 아니 10년, 그것도 아니면 5년...가까운 미래에 제게 줄 깊은 잠이, 제발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이었으면 하는 거죠.
(아이가 서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고개를 흔들며 아이의 손길에서 벗어난 서린이 웃으며 아이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비쥬와 같은 소리가 촉, 촉 울려퍼진다.)
아이 : 형, 어디 가?
서린 : 아니, 어디 안 가.
아이 : 근데 오늘 왜 그래?
서린 : 어디 안 가는데, 할 일이 있어서 이제 잘 못 올 것 같거든.
아이 : 그래? 무슨 할 일?
서린 : 음... 형이랑 친한 다른 형들이랑 같이 살기로 했는데, 집 구하는 게 좀 어려워서.
아이 : 형 돈 많잖아
서린 : 돈으로는~ 구할 수 없는~ 그런 거라서요~
(서린은 아이를 고쳐 안고 아이의 얼굴에 뺨을 비빈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서로 비벼지고 ,이내 서린은 아이를 내려 놓는다. 타이어 그네를 뒤로 하고 바닥에 내러 선 아이가 서린을 올려다보자 서린은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아이와 시선을 맞춘다.)
아이 : 그럼 형 언제 와?
서린 : 한...십 년 뒤?
아이 : 십 년 씩이나?
서린 : 형이 할 일이 많으니까, 오래 살아야 할 집이니까 꼼꼼하게 봐야겠지?
아이 : 으응...
서린 : 형이 인심썼다, 5년!
아이 : 5년?
서린 : 형이 5년 뒤에 여기 올께. 형이 먼저 ---에게 안 찾아오면, 네가 5년 뒤에 형한테 먼저 찾아와야 돼?
아이 : 응!
서린 : 우리 ---는 착하기도 하지.
서린 : 형이 꼭 먼저 여기 올게.
서린 : 형이 먼저 안 오면...
서린 : 네가 꼭 형 찾아줘야 해?
서린 : 5년이야, 알았지?
서린 : 5년이야...
서린 : 5년...
서린 : ...
서린 : ...
(암전)
(커튼이 올라가자 비어있는 아기침대가 보인다. 아기침대 밑에 중학교 과정 교과서와 볼펜, 테이프 등이 쏟아져있다. 비어있는 아기침대를 향해 딸랑이를 집어들고 흔드는 서린의 짧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서린의 옆에서 베이런이 걸어나온다. 서린은 딸랑이를 내려놓고 교과서와 테이프 볼펜 등을 줍기 시작한다. 베이런이 그런 서린을 가만히 바라보다 앞을 향한다. 베이런의 검은 정장, 검은 넥타이.)
베이런 : 정확히 5년이었어요.
(조명이 꺼졌다가 베이런에게 스포트라이트. 긴 머리카락의 서린이 아기침대 옆에 쓰러져있다.)
베이런 : 그 약속을 한 정확히 바로 5년 뒤에 서린은 자살했어요. 새 리림의 앞, 자신의 후계자 앞에서, 그에게 모든 지식과 기억을 건네주기 위해.
(베이런은 서린의 시체를 돌아본다. 서린이 잘랐던 머리카락들처럼 흐트러져있는 긴 머리카락.)
베이런 : 과정이야 어떻든, 그의 마지막은 테트라 아낙스였어요. 죽어가며 자신의 지식을 전해주는 그 집착, 그 오기... 새 리림은 자신이 테트라 아낙스가 되었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지했어요. 그런 점은 꼭 서린과 닮았었죠.
(베이런은 입술을 깨문다.)
베이런 : 그렇지만 그는, 새로운 테트라 아낙스는 비스트와 이사카의 존재에 대한 지식 자체가 없었어요. 비스트와 이사카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유일한 흡혈귀가 사라졌으니, 그 둘에 대한 이야기나 소식, 소문들은 결국 완전히 마모되고 잊혀지고 사라져가겠죠.
베이런 : ...
베이런 : 서린이, 서린은, 서린은 이런 걸 원했을까요?
베이런 : 그 둘의 삶과 죽음, 그라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삶과 죽음 자체도 잊혀지기를?
베이런 : ...
베이런 : ...
베이런 : ...
베이런 : ...
베이런 : ...
베이런 : 서린은, 구백 오십 년을 버텼어요. 그 둘에 대한 분노와,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로. 어떤 의미로, 증오는 진정으로 삶을 잇고 끊는 감정이라 하겠죠. 비스트가 그랬고, 이사카가 그랬듯이. 서린 또한 증오로 매듭을 지었어요.
베이런 : ...
베이런 : ...
베이런 : ...
베이런 : 이제 다시 가보겠습니다, ---. 아니, 테트라 아낙스. 이게 바로 당신이 태어난 이유. 그리고 당신이 태어나기 전, 천 년의 이야기예요.
(암전. 베이런이 구둣발 소리와 함께 퇴장하고 커튼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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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은 강가를 걷고 있었다. 더위가 설익은 오월이었고, 일주일만 기다리면 유월이 되는 날이었다. 이제 막 얼음이 녹아 흐르는 물은 비린내도 나지 않을 만큼 청량했다. 서현은 강가를 따라 걷다가 서린과 물장구를 함께, 롯시니가 물장구를 치는 곳에 함께 있는 이사카를 발견했다. 서현은 그들이 겨우 보일 만큼 먼 거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막 눈이 녹기 시작하는 여름에는 곰들이 먹이를 찾으러 강에 나왔다. 롯시니는 새끼가 딸린 곰이 무서워 이사카를 졸라 함께 강에 놀러 나왔다. 얼음이 녹고 강이 사는 러시아의 봄, 시베리아의 여름. 이사카는 물에 닳아 동글동글해진 돌멩이들을 발로 걷어차고 서린을 향해 뛰어갔다. 이샤! 나 물고기 잡았어! 조약돌만한 두 손을 모은 롯시니가 쥐똥만한 잡어를 양 손에 가두고 있었다. 이사카는 발걸음을 늦추며 자신의 동생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이샤! 물고기! 작아! 롯시니는 물방울이 튀도록 까르르 웃다가, 저멀리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물고기를 팽개치고 뒤뚱뒤뚱 뛰어간다. 이샤! 저기 엄마야! 이샤!
서린은 강가를 걷고 있었다. 더위가 설익은 오월이었고, 일주일만 기다리면 유월이 되는 날이었다. 이제 막 얼음이 녹아 흐르는 물은 비린내도 나지 않을 만큼 청량했다. 서린은 강가를 따라 걷다가 서현과 물장구를 함께, 이사카가 물장구를 치는 곳에 함께 있는 롯시니를 발견했다. 서린은 그들이 자신을 겨우 발견할 만큼 먼 거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막 눈이 녹기 시작하는 여름에는 곰들이 먹이를 찾으러 강에 나왔다. 이사카는 새끼가 딸린 곰을 걱정해 롯시니와 함께 강에 놀러 나왔다. 얼음이 녹고 강이 사는 러시아의 봄, 시베리아의 여름. 롯시니는 조약돌만한 두 손을 함께 모아 쥐똥만한 잡어를 양 손에 가뒀다. 이샤! 나 물고기 잡았어! 그러면 이사카는 물에 닳아 동글동글해진 돌멩이들을 발로 걷어차고 서린을 향해 뛰어왔다. 이샤! 물고기! 작아! 롯시니는 물방울이 튀도록 까르르 웃다가, 저멀리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물고기를 팽개치고 뒤뚱뒤뚱 뛰어간다. 이샤! 저기 엄마야! 이샤!
세건은 강가를 걷고 있었다. 더위가 설익은 오월이었고, 일주일만 기다리면 유월이 되는 날이었다. 이제 막 얼음이 녹아 흐르는 물은 비린내도 나지 않을 만큼 청량했다. 세건은 강가를 따라 걷다가 어린 서린과 함께 있는 어린 이사카를 발견했다. 세건은 그들이 총의 사정거리에 겨우 들어올 만큼 먼 거리에서 조용히 앉아쏴 자세를 취했다.
이제 막 눈이 녹기 시작하는 여름에는 곰들이 먹이를 찾으러 강에 나온다. 그러나 0세대 라이칸스로프 두 마리가 두려운 까닭인지 주변에 곰은 커녕 여우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얼음이 녹고 강이 사는 러시아의 봄, 시베리아의 여름. 어린 이사카는 물에 닳아 동글동글해진 돌멩이들을 발로 걷어차고 서린을 향해 뛰어갔다. 참방참방 흩어지는 물방울 사이로, 이샤! 나 물고기 잡았어! 조약돌만한 두 손을 모아 움켜쥔 서린은 쥐똥만한 잡어를 양 손에 가두고 있었다. 어린 이사카는 물에 잔뜩 젖은 바짓단을 툭툭 털어대며 자신의 동생을 향해 가까이 다가간다. 이샤! 물고기! 작아! 어린 서린은 손아귀에서 물방울이 튀도록 까르르 웃다가, 저멀리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물고기를 팽개치고 뒤뚱뒤뚱 뛰어간다. 이샤! 저기 엄마야! 이샤! 세건은 스코프를 통해 이사카를 바라보았다. 어린 이사카는 넘어질듯 흔들거리는 서린의 걸음걸이를 지켜보다가 저격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으나 저격수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 날은 그 애들이 강가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현은 그 날도 강가를 걷고 있었다. 이사카와 롯시니를 만나지 못 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제 막 얼음이 녹아 흐르는 물은 비린내도 나지 않을 만큼 청량했다.
서현은 강가를 따라 걷다가 서린과 물장구를 함께, 롯시니가 물장구를 치는 곳에 함께 있는 이사카를 발견해야 했으나 역시나 강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서현은 그들이 뛰어놀았던, 커다랗고 넙적한 바위가 있는 곳에 주저앉아 이사카와 롯시니를 기다렸지만 해가 질 때까지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땅거미가 거뭇거뭇 내릴 즈음에 서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세건을 발견했다.
"이봐, 한세건."
아, 이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서현은 자신 속의 또다른 자신이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세건을 향해 말한 것을 느꼈다. 그러자 세건은 입을 뻐끔거리고 대답했다. 뭐야, 왜 또. 세건은 자신 속의 또다른 자신이, 자신이 총을 겨눈 채인 서현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느꼈다. 세건이 어느 누군가의 의지로 뻐끔거리는 순간, 세건은 서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턱 위가 모두 날아가버린 서현은 비틀거리다가 자리에서 쓰러졌고, 후우, 태양이 다시 떠오르고 정오가 되었다.
그 다음날 서현은 강가를 걷지 않았다. 대신 서현은 눈을 뜨자마자 시야가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온 몸을 감쌌던 강가의 축축한 물기가 급하게 달아오르고, 눈이 녹은 촘촘한 침엽수림에 불이 붙었다. 서현은 황급히 세건의 팔뚝을 낚아챘다. 세건이 다소 불만스러운 손짓으로 서현을 밀어낸다. 세건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것이 서현에게까지 느껴졌다. 서현은 세건을 불렀다. 한세건, 세건, 세건아.
"우리, 아! 우리 여름되면."
지금이 여름이야. 세건이 이불을 밀어내며 마저 움직였다. 아, 뜨거워, 아, 너무 좋아, 아, 따뜻해, 아, 아. 서현은 세건의 어깨에 코를 박았다.그리고 입술을 살갗에 비벼대며 세건이 뿜어대는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뜨겁고, 눅눅하고, 축축하고, 끈적하게 가라앉은 물기. 세건의 살에서 물비린내가 풍긴다.
세건이 거친 숨을 내쉬다가 서현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서현은 다소 울음기어린 목소리로, 세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앞뒤없는 말을 주워섬기고 있었다. 응, 지금, 여름이야, 으응, 여름이야, 흐, 여름, 아, 여름. 어떡해, 너무 좋아. 오늘이 몇 월인지 기억도 안 날만큼 너무 좋아. 서현은 머리 끝까지 들어차는 감각에 밀려 눈을 감았다. 새까맣게 내려앉은 땅거미와, 흐릿하게 일렁이는 하얀 달과, 새빨간 눈의, 이가 뾰족한, 통통한 손바닥에 티끌만한 물고기를 가둔, 아, 롯시니가, 서린이.
그 옛날 시베리아의 봄. 내 동생이 건져올린 그 한 줌의 냄새. 한세건에게서 한여름의 냄새가 났다.
월야 전력 60분 - 책
나는 밀수업자였고, 세건은 말을 하지 못 했다. 내가 코카인을 내밀면 세건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을 뿐이다. 누가 염색해주었는지 목덜미까지 얼룩덜룩하게 초록물이 들어서는, 말도 하지 못 하는 그 이가 반편이인지 벙어리인지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 했다. 나는 그와 같은 선실을 썼기에 꼬박꼬박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세건이 반편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그저 풍랑이 몰아칠 적 갑판을 하얗게 두드리는 파도에 머무르는 그 눈빛을 보고서야 아, 반편이는 반편이인데 정신이 없고 몸만 있어 반편이구나 싶었을 뿐이다.
해경을 피해 꼬박 돌고 돈 일주일 중에 나흘 정도가 풍랑이 쳤다. 풍랑이 몰아쳤던 첫 날, 나는 세건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었다. 세건은 말을 하지 않았고, 내가 내민 싸구려 다이어리조차 받아들지 않았는데, 둘쨋날인가 내지를 북 찢어 한구석에 무언가를 썼다. How old are you? 혹시나 싶어 러시아 이름과 한국 이름을 모두 알려준 나는 무안해졌다.
그리고 셋째날, 역시 풍랑이 쳤던 날이었다. 세건은 피투성이가 되어 선실 안으로 던져졌다. 파랗게 피멍이 든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던 나는 입술의 딱지를 쥐어뜯던 세건에게 그의 몫이 될 통행료를 쥐여주었다. 정신이 죽어도 몸은 살 수 있지만, 몸통이 죽으면 아무 것도 안 남아. 나는 몸만 남은 반편이를 그렇게 얼렀다. 가서 이거 주고 와. 그리고 이즈비니쩨, 하고 말하고 와. 세건은 돈을 내러 나가서는 그 날 밤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그의 이불까지 덮고서는 깊은 꿈을 꿨다.
세건이 일그러진 이지로도 흠잡을 데 없이 통행료를 내고 돌아왔다는 것은 바로 다다음 날 알 수 있었다. 그 날 저녁, 비는 그쳤지만 선실은 여전히 격동하고 있었고, 나는 밀항선에 들어앉아 멀미도 질병도 아닐 터인 울렁거림을 하루종일 호소했었다.
침대에 누운 내가 앓는 소리를 내자, 주변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던 세건이 거리낌없이 내게 입을 맞춰왔다. 건조하고 빳빳한 입술이었는데, 전쟁터 특유의 화약냄새가 세건에게서 났다. 세건은 엔진만큼이나 뜨거운 혀로 나를 훑었다 금세 빠져나갔고, 나는 바다를 송곳으로 긁는 듯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세건을 강간했다.
그래서 정의하자면, 나의 기억은 한 권의 책이다. 나는 세건을 강간한 뒤 내 항문을 씻어내며 먼 옛날 그 언젠가 내가 이와 유사한 일을 겪었던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내가 강간한 세건은 내가 강간하기도 전에 이미 내게 강간당해있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세건의 머리맡에 놓여져있던 책의 첫 번째 단원을 펼쳤다. 그 곳에서 나는 잔악무도한 레드마피아였고, 세건은 내게 신념의 별을 새겨주었던 문신사였다. 내가 세건을 강간하고 이 년이 지났을 때, 세건의 집은 항쟁에 휘말려 건물 채로 무너져내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 기절한 세건을 보았다. 그의 오른발엔 엄지발가락을 이어붙여 꿰맨 듯한 흉터가 있었다. 나는 잔해에 깔려 곤죽이 된 세건의 시체에 엄지발가락이 없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두 번째 단원은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나는 직장인이었고, 세건은 대학생이었다. 아파트 같은 라인 바로 옆 집에 살아 우리는 오며가며 인사를 자주 나눴다. 나는 가끔 월차를 내 세건과 데이트를 했고, 세건은 맥주를 들고 나의 집에 찾아와 나와 밤새 섹스를 했다. 그를 강간할 때 저절로 눈이 가던 턱 밑의 흉터가 이제야 눈에 띈다. 세건의 부모는 사업을 하느라 보증을 서는 일이 잦았는데, 세건이 대학교 3학년이 되던 바로 그 해에 집이 파산했다. 턱의 흔적을 보아하니 채권자들에게 쫓겨 행방불명 되었던 세건은 어딘가에서 목을 매었나 보다.
세 번째 단원은 전쟁터가 배경이었다. 나와 그는 같은 반군부대에 속해있던 일종의 게릴라성 전우였는데, 세건은 수류탄을 투척하는 것을 싫어해서 자주 위기에 빠지곤 했다. 그러면 나는 세건의 몫인 수류탄까지 나의 것과 함께 던지고 그를 엄폐물 뒤에서 끌어냈다. 기나긴 전쟁의 끄트머리, 우리로서는 끄트머리였지만 아마 전체적으로는 중간의 어드메쯤 되었을 때, 우리 부대에서 우리 둘을 빼고 드디어 모두가 죽어버렸다. 나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적들의 군홧발 소리를 듣다가, 텅 빈 참호 속에서 세건에게 깊게 키스하고 권총으로 그를 쏴 죽인 뒤 자살했다. 세건의 이지가 어설픈 까닭은 아마 이때문일 것이다.
나는 쉭쉭 숨을 내쉬는 세건의 머리맡에 앉아 책을 팔랑팔랑 넘겼다. 레드마피아, 직장인, 군인 그 외에도 수많은 직업과 삶을 살아온 나와 세건의 시간이 그 곳에 기록되어 있었다. 개중 몇 가지는 무척 평화롭거나 행복하거나 그저 그런 삶들이었지만 과정이 무난할 지언정 모두 결말은 좋지 않았다. 세건은 사람이나 자연, 가끔 스스로에게 살해당하기 일쑤였고 나는 그런 세건을 살해하거나 살해당하도록 방치하는 입장이었다.
나는 책의 중간쯤을 펼쳐 밀수업자인 나의 삶을 읽어보았다. 내 삶이 적힌 기록들을 읽은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책에는 족히 이백 개는 되는 수많은 직업들의 내가 적혀 있었다. 이 책이 채워지다 말았다는 것은 내가 죽고 나서도 나는 또다시 태어나 세건과 만나고 그를 죽일 거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리고 세건은 앞으로도 차오르다 만 이지와, 수많은 살해의 흔적과, 그보다도 얼기설기 기워진 정신으로 억겁의 시간을 살아가겠지. 나는 책의 맨 끝을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아마 이 책을 만들면서 적었을 메모가 남아있었다. 죽여, 다시 태어나게. 어떠한 서명도 흔적도 없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최초의 내가 남긴 전언이고, 나는 그 당시와 이후의 생명 모두를 깎아 세건의 삶을 되살렸다는 것을. 이 수많은 기록들은 그의 업보이다. 그리고 이 수많은 살인들의 한구석에 내 이름이 적혀있는 까닭은, 아마도 나 또한 그의 업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절한 세건을 안아들었다. 그리고 그의 몸을 갑판 밖으로 내던졌다. 한숨이 나왔다.
몽마썰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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