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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11 恥
- 2016.04.14 키워드 연성 정리
- 2016.02.15 나쁜피
- 2016.01.03 사혁세건 재록본에 수록될 단편들
- 2015.11.13 水沒
- 2015.10.25 背敎
혼자 두면 장판 뜯어서 직접 차린 개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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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 애가 출근을 하지 않았을 때, 그 애의 방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던 기억이 났다. 방문 어귀를 서성인 지 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티모시는 나를 자신의 방으로 들였다. 후끈후끈하기까지 달아오른 찜통같은 방에서, 새까맣게 그을린 침대에 앉아있던 티모시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절뚝거리며 방문을 닫았다. 가벼운 파열음에 그 애와 내가 격리된다. 나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괴었고, 티모시는 다시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침대 위에 앉는다. 이것은 대화를 위한 준비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것은 대화라기보단 고별식에 가까웠다. 만들어주었던 보조기구는 방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했고, 티모시가 절뚝거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나의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에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대화로 상대방을 알아가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 애와 나는 서로 그럴 단계의 관계도 아니었다. 나는 그 애를 알기 위해 대화를 할 생각이 없었고, 그 애는 그런 나를 잘 알고 있었다. 티모시는 항상 내게 무엇인가 말하려 우물쭈물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나는 그러려니 했다. 누구든지 도움을 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말하자면, 이제 더 이상 걷지 않을 그 애의 장례식에 내가 참석하는 이유는 보조기구를 만들어준 사람으로서의 책임도 아니었고, 연합의 일원으로서의 책임도 아니었다. 그저 레이튼 펠프스라는 개인의 알량한 동정심에 기반한, 어찌보면 연민이라 볼 수 있는 종류의 감정 때문이었다.
그 애의 무덤에는 보조기구가 함께 묻혔다. 티모시의 능력을 감안하여 불에 강한 금속으로 만든 것이 무색하게, 아주 새까맣도록 타 있었다고 했다. 그 애는 (비록 본인은 부정했지만서도) 항상 자기 자신을 깎아먹기 위해 능력을 썼기 때문에, 보조기구를 만들어준 이유에는 별 것이 없었다. 그저 그 애가 눈에 띄게 절뚝거리는 것이 보기 불편했고, 그것만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었으며, 나는 자기 자신을 깎아먹는 종류의 인간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패인이 될 줄 생각조차 못 했다.
티모시의 장례식은 그 애가 발견된 지 일주일만에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그가 안타리우스에 다시 끌려갔지만 살아 돌아올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는 점에서 지하연합의 일원들은 비통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안타리우스의 구원회 단장으로 알려진 시드니 크리스토퍼 젤러즈니와 연합의 아지트 사이에서 발견된 티모시는 비틀렸던 다리가 더더욱 비틀리고, 온 몸의 털이 고불고불하게 타 있었으며, 원한에 찬, 아니면 분노가 원인일 수 있는 잔혹한 폭행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감출 수 없는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연합의 모든 이들이 숙연했다. 나는 새빨간 흙에 파묻힌 그 애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애의 방을 향했다. 후끈후끈하기까지 달아오른 찜통같은 방에서, 새까맣게 그을린 침대에 앉아있는 티모시를 생각하며.
그러니까, 어느 날, 그 애가 출근하지 않았던 날이었다. 나는 그 애의 방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방문 어귀를 서성인 지 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티모시는 나를 자신의 방으로 들였다. 후끈후끈하기까지 달아오른 찜통같은 방에서, 새까맣게 그을린 침대에 앉아있던 티모시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절뚝거리며 방문을 닫았다. 가벼운 파열음과 함께 그 애와 내가 함께 격리되자, 나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괴었고, 티모시는 다시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침대 위에 앉았다. 이것은 대화를 위한 준비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것은 대화라기보단 고별식에 가까웠다. 만들어주었던 보조기구가 방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하고, 티모시는 절뚝거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나는 티모시를 최대한 눈에 담으려 애썼다. 머리카락이 조금 차분했던, 소년과 청년 사이의 미성숙. 언젠가는 그 애가 나보다 일찍 떠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켜야 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소심해지고, 날카로워지며, 날붙이만큼이나 연약해지기 때문에. 어쩌면 그 애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는 점이 일종의 변환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간에 티모시는 지켜내려했고, 또한 지켜냈으며, 지켜내는 것에 대한 댓가로 자신의 남은 시간을 통째로 털어넣었으니.
그러니까, 어느 날, 그 애가 출근하지 않았던 날이었다. 나는 그 애의 방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방문 어귀를 서성인 지 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티모시의 방문을 열 수 있었다. 언제나 찜통처럼 익어있던 공기는 차갑게 식은 채로, 새까맣게 그을린 침대에 앉아있던 티모시는 없는 채로. 나는 절뚝거리며 방문을 닫기 위해 이동하는 티모시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가벼운 파열음과 함께 그 애와 내가 함께 격리되도록 문을 닫았다. 나는 내가 항상 앉던 의자에 앉아 턱을 괴었고, 다시 절뚝이는 걸음으로 침대 위에 앉는 티모시를 상상했다. 이것은 대화를 위한 준비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것은 대화라기보단 고별식에 가까웠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만들어주었던 보조기구는 방 한구석이 아닌 붉은 흙 속에 파묻혀있었고, 티모시는 더이상 절뚝거릴 수 있지 않았으며, 나는 더 이상 티모시의 얼굴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 조금 차분했던, 소년과 청년 사이의 미성숙.
아마 나는, 그 애가 죽기 전까지 나는 죽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리하여 그 애는 내가 죽기 전에 먼저 떠났다. 나는 영원히 그 애가 죽기 전에 죽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내게 남은 것은 추락이다. 어쩌면 산산조각이 날 수는 있을 것이라는 사소한 기대를 가진 채로, 그리고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이 난 것만은 남는다던 어느 이야기가 진정한 나의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티모시의 방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러자 이제 있지도 않은 사람이 내 귓가에 속삭였던 어느 날의 고백이 온 몸을 들쑤셨다. 습한 여름, 덥고 끈적끈적한 공기, 숨통이 막히는 시야, 그리고 어느새 뜨뜻하게 달아오른 귓볼 너머로,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내뱉던 나약한 목소리가 내 속에서 끓었다. 저는 우리가 항상 함께 고통스러울 거라는 걸 믿어요, 진심으로요. 모든 게 달라지더라도 변하지 않는 게 하나쯤은 있겠지만, 저는 절름발이고, 당신은 그저 매일 아픈, 절름발이를 걷게 한 수리공인 것처럼, 결국 그게 우리의 것은 아닐 거잖아요……. 그러니까 밀어내지 말아주세요, 더 울지도 못 할 사람을 울리지 말아주세요…….
나를 나락으로 밀어 넣은 그 순간에 희망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던. XXX. 나의 최초, 나의 최후, 나의 최종아. 나는 천장을 올려다본다. 어두컴컴한 천장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로맨스의 종말이었다. 또다시 환상이 속삭인다. 박살이 난 이것만이 어쩌면, 너의 이번 생애 두 번 다시,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진정한 사랑일 수 있었노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 아니어도 언젠가 서로 사랑할 수 있었음을.
아, 릴리우오칼라니.
망국같던 나의 사랑.
나는 그 애의 무덤을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전지적 독자시점 배포전 '미식협' 부스 망7 에 가져가는
중혁독자 소설본 '거꾸로 매달린 남자' 사양입니다
사양 ▶ 중혁독자|A5|표지에 금박| 28P|3000원
시놉시스 ▶ 세상이 멸망한 뒤, 원할 때 죽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중혁과 중혁의 배에 탄 독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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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혁이 세건을 데려온 것은 세건이 다섯 살 났을 적의 일이었다. 그 무렵의 사혁은 어느 이름 모를 박수무당이기도 했고, 어느 성실한 소상공인이기도 했으며, 누군가의 아는 사람, 누군가의 친인척, 누군가의 원수,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지인이기도 했다. 그런 사혁이 어느 날 길을 걷다 어느 도깨비 길에서 어느 무엇인가 보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자꾸만 눈에 밟히기에 냉큼 그것을 주워 왔는데, 데려오고 싶어 데려온 그것이 사람인지 귀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이건 귀신이건 간에 새까만 정수리에, 둥글둥글한 머리통에, 젖내가 아직 채 가시지도 않은 모양새를 하고서, 얘, 얘, 핏덩아, 핏덩아 하고 불러도 반응 없는 어린 아이를 보고 나니 사혁은 저 안에 기어코 무엇인가 들락날락하고 있겠구나 하고 눈치를 챘다. 귀 한 쪽이 들리지 않고 말을 이해하는 법도 배우지 못 한 요 핏덩이가 훤히 천문이 열린 모양새를 하고서도 죽지 않았으니 운이 좋으면 얼마 가지 않아 죽을 것이오, 운이 나빠 이미 죽어 있는 것이라면 제대로 죽지 못 해 구천을 떠돌 것이며, 저를 주워 달라고 나를 끌어당겼으니 아마 조금 더 살다 갈 때 가더라도 곱게 가지는 못 하겠지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느냐고, 사혁은 그 핏덩이에 인간 세 자에 마를 건 자를 붙여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여섯 살에 이갈이를 시작한 세건이다. 너는 본의 아니더라도 이 개좆같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니 성은 한이라고 해라, 라고 하여 한 씨 성의 세건이라는 이름이 붙은 세건은 사혁 나름대로의 성의를 먹으며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건은 한 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말도 늦게 텄다. 다만 귀가 반만 막힌 채로 입이 트여서인지 듣는 것도 무엇인가 말하는 것도 썩 내켜하지 않았는데, 사혁은 그런 세건을 내버려둔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사는 것이 반만 사람인 세건에게는 최선일 것이라고, 그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사혁은 생각하고 세건을 방치한다.
사혁이 세건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그를 키웠냐면, 사실은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사혁은 세건에게 깨끗하고 넓지만 아무 것도 없는 방을 주었다. 새하얀 벽지였고, 짙은 회색의 바닥이다. 오 년에 한 번 들를까 말까 하던 사준만이 사혁이 괴이한 것을 주웠다는 소식을 듣고 세건의 방을 인간의 가구로 채워주었는데, 그런 사준마저도 자주 오는 것이 아니었으니 세건이 보는 것은 하얀 벽과, 회색의 바닥과, 알록달록한 유아용의 가구들과, 사혁의 얼굴, 그리고 올 때마다 끊임없이 떠들다 가는 사준의 입모양뿐이다.
사준은 주기적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떠났다. 보통 아무 것도 없는 방에 인간을 넣어두면 미쳐서 죽느니만 못 한 것이 된다, 라고 사준이 이야기하자 사혁은 대답한다. 언제부터 네가 나를 사람 기준으로 생각했니? 사혁은 사준이 저에게 말을 걸 때마다 굳이 대답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지만 이내 잊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쨌거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사준에게 사혁이 그러하듯 사혁에게도 사준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사혁에게 배우는 것이 없었어도 세건은 꾸준히 사람답게 자랐다. 세건의 몸에 있어 자라지 못 한 채 남아있는 유일한 것은 혀와 성대뿐이었다. 세건의 손가락이 벼처럼 길고 촘촘해지는 중에도 세건은 사람의 말을 내지 못 했다. 반 토막 난 귀머거리의 숙명인지 사람으로 자라지 못 하는 사람의 숙명인지, 세건은 제 방에 사혁이 들어와도 아, 아 하는 소리로밖에 반기질 못 했지만, 어쨌거나 제 세상에 사혁이 들어오는 것을 반겼다.
사혁은 세건이 사람이 되기 시작한 날을 생각해본다. 어느 날 여기에 여섯 살 먹은 모양의 세건이 있었다. 그는 제 잇몸에서 자라나고 있는 티끌만한 간니를 바라보고 있는데, 새까맣고 둥글둥글한 머리통에 통통하고 짧은 종아리로 하얗고 정사각형인 깨끗한 욕실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사혁이 세건의 이빨을 검사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크고 넙적한 거울에 비치는 세건의 뒤로 하얗게 토막이 나 있는 화장실 벽이 보인다.
사혁은 세건이 세면대의 거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허락한다. 사혁은 세건이 세상을 바라보면 세건의 입술 가장자리가 찢어질 때까지 세건의 입을 탐색한다. 그러면 세건은 여태까지 봐왔던 것들 중에 가장 크고 순결한 공간의 정중앙에서 자신의 검고 빨간 입을 동물처럼 벌리는 것이다. 어린 세건은 자신의 가장 순결한 성지에서 속이 새빨간 제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벌린 채로 사혁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사혁은 세건의 젖니가 고르게 빠지고 있는지 그의 얼굴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세건은 젖내가 줄줄 나는 얼굴로 까만 입 속의 하얀 이를 드러낸 모습을 하고 사혁을 바라봤다. 검고 작은 구멍이 나 있는 어린 잇몸의 어느 자리에 뽀얗고 매끈매끈한 간니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세건은 거울을 볼 수 있게 되자마자 까치발로 서서는 자신의 입에서 자라나고 있는 하얀 뿌리의 정수리를 제일 처음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혁은 간니가 돋아나고 있는 세건의 입술 속을 거울 너머로 바라본다. 그리고 물었다. 뭐가 나거나, 자라거나, 뚫거나, 보이고 있니? 세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아, 아. 세건은 제 잇몸에서 새로 돋아나는 작은 뼈를 신기해하고 있다.
사혁은 세건의 종아리가 까치발을 하고서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이면 그를 들어 올려서 욕실 밖으로 내보냈다. 어쨌거나 하얗고 각진 공간 속에 어린 세건 대신 거울 앞에 서게 된 사혁은 세건이 얼굴을 비추었던 것에 자신도 다시 한 번 비춰본다. 입을 벌려 송곳니를 확인해보자 다 큰 성인의 얼굴 속에 괴물의 색깔이 떠오른다.
사혁은 거울에 비치는 자기 자신의 이빨을 바라보며 세건에게 해 줄 말을 다시 한 번 골라본다. 얘, 세건아. 어린 것들은 원래 이갈이를 한단다. 얘, 세건아, 어린 것들은 원래 이빨이 빠진단다. 얘, 세건아, 어린 것들은 원래 뼈가 자라난단다. 얘, 세건아, 어린 것들은 원래 제자리에 있는 것들을 밀어내며 자라는 거란다. 어쨌거나 욕실 바로 앞에서는 송곳니가 하나 없는 세건이 사혁을 기다리고, 이 정사각형의 욕실은 사혁과 세건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간 중 제일 하얗고 깨끗하고 청순하고 순결한 곳이고 : 결국 사혁은 애꿎은 자신의 이빨만 살살 흔들어보다가, 기어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빨이 하나 없는 세건은 사혁을 향해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혁이 웃는 세건의 손을 잡고 넓은 공간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곳에 세건을 놓는다.
사혁은 세건이 이갈이를 시작한 때부터 매일매일 세건의 치아를 검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세건이 얼마나 자랐는지 알 수 있는 척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혁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육이자 일상적인 학대이기도 했다. 사혁은 세건의 뼈마디가 제법 단단해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건의 입을 벌렸고, 세건은 사혁의 앞에서 연달아 입을 벌렸다 닫으며, 이빨이 고르게 맞닿아 자라고 있다는 것을 증명받는 것처럼, 입술의 가장자리가 찢어질 때까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가, 다시 벌렸다. 그렇게 세건이 사혁의 앞에서 입을 벌리는 순간에 세건의 입은 입이 아니라 아가리가 되었고, 촘촘한 이빨이 가로로 자라는 깊은 구멍이 되었고,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기어가야 하는 날카로운 관문이 되었고,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 잘라내야만 하는 할례의 일부가 되었다. 세건은 이제 자신의 가장 깊숙한 일부를 사혁에게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눈을 감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혁은 시시각각으로 성장하는 세건을 보며 세건은 자기 자신처럼 특정 형태의 뚜렷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건은 자랄지언정 모습이 많이 바뀌지는 않았고, 저처럼 사람이었다가 귀신이었다가 이도저도 아니었다가 괴물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사혁은 저가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형태도 모습도 없는 것으로 태어나 자라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채로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며 살아왔기 떄문에, 세건과 같은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형태가 정해져 있고, 얼굴뼈가 조금 자랄지언정 몸이 물처럼 흘러 변하지는 않는, 인간같은 그런 것.
사혁은 원하고자 하면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었고 세상 그 어떤 무엇으로도 존재할 수 있어왔기 때문에 자신의 생과 모습에 특별한 미련이 없었다. 그래서 어느 한 옛날에,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에, 조금 배워먹었던 도술로 짜가 무당 짓을 할 수도 남을 조금 등쳐먹는 사기꾼 짓을 할 수도 가끔은 인간같은 얼굴을 하고 사람을 잡아먹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혁은 인정하기로 했다. 세건이 특정한 모양새가 있는 모양으로 자란 모양이니 이제 세건을 제 공간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때부터 사혁은 세건에게 염색을 해주었다. 그리고 세건에게 염색을 해주는 이유를 이야기한다. 천문이 훤히 열려있던 네 머리통이, 지금도 조금은 열려있지만서도, 고것이, 둥글둥글하고 새까매서 굴리면 공처럼 굴러갈 것 같던 머리통이 사람 모양새가 되어 가기에, 귀신도 사람도 아니게 어정쩡했던 게 사람 모습을 띄는 것이 기특한 마음에 내 해주는 것이다.
들렸는지 들리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사혁에게 그런 것은 삶만큼이나 중요하지 않다. 세건은 염색을 하는 내내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머리카락을 거쳐 흘러나오는 탁한 물빛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세건이 새까만 머리카락을 기어이 사혁에게 빼앗겼을 때, 그렇게 세건은 사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최초의 존재가 되었다.
세건이 열두 살이 되는 날에는 사혁이 박수를 쳐 주었다. 이갈이가 모두 끝낸 세건이 유치를 영구치로 모두 갈아치운 날이었다. 얘 세건아, 너도 이제 사람이란다. 사람은 이빨이 모두 나야 사람이지. 세건은 사혁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아, 아. 하고 이야기한다. 사혁이 세건에게 대답한다. 어, 그래, 너도 이제 사람이란다. 너도 이제 사람이야. 사람은 보통 팔십 년에서 백 년 정도를 살지. 기쁘냐? 그러나 여전히 세건은 사혁의 앞에서 사람의 말을 하지 않고, 사혁은 세건이 사람이 다 되었는데도 세건의 아가리를 벌리고, 마치 소중한 것처럼 세건의 입 안을 꼼꼼하게 닦는다.
어느 날은, 그러니까 아마 세건이 열다섯이 되었을 즈음일 것이다. 그 날 사혁은 세건의 아가리를 벌린 채 문득 이렇게 물었다. 너는 내가 뭘로 보이니? 그러자 세건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꾹 다물려다가 실패하고 만다. 사혁이 세건의 어금니를 만지고 있었고, 세건의 아가리에 사혁의 손가락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혁은 세건이 사람의 말을 하지 못 한다는 것을 가끔씩 잊어버렸지만 대답을 원한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건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금방 잊었다. 세건 또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다. 사혁은 대답을 듣는 대신 촘촘하고 고르게 나 있던 세건의 어금니를 하나하나 만져보고, 옴폭 파인 홈을 손톱으로 긁어보았다. 이가 아프지는 않디? 세건은 고개를 젓는다. 용케 충치도 없는 것이, 그 놈 참 이빨 하나는 잘 났구나. 사혁은 세건의 윗니와 아랫니를 모두 꼼꼼하게 살핀 다음 손가락을 뺀다. 세건은 입과 정신을 함께 다물었다.
세건은 사혁으로부터 자위하는 법을 배웠다. 사혁의 길고 마른 손이 세건의 아랫배를 훑으면 세건은 바싹 마른 혀와 입 안을 침으로 축였다. 사혁은 세건을 제 품에 앉히고, 설익은 성기를 문질러주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얘, 세건아. 어린 것들은 원래 이갈이를 한단다. 사혁의 말은 세건의 속과 정신 끄트머리를 함께 간질이는 무언가가 되어 있다. 얘 세건아, 젖을 먹고 자란 뼈가 빠지고 그 자리에 간니라는 것이 나면, 바로 그 때가 뼈라는 것이 다 자라는 때다.
사혁은 어느새 크고 길어진 세건의 발가락이 움츠렸다가, 다시 뻗었다가, 또 움츠리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본다. 저 발가락이 내 엄지발톱만도 못 했던 때가 있었는데. 평생 찬 숨만 내쉬며 사는 줄로 알았던 것이. 이제 사람행세를 할 줄도 알아서, 마치 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제자리에서 꿈틀거리며 저항을 하고 있다.
사혁이 세건의 풋내 나는 뺨에 제 볼을 비빈다. 그리고 사혁은 세건에게 저가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읊어주었다. 세건아, 뼈가 다 자라는 그 때가 바로 어른이 되는 때고, 사람이 죽는 때고,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되는 때다, 너도 이제 금방 울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올 텐데……. 세건은 한 쪽 귀가 멀어있는 상태였고, 그보다도 더 먼저 말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지 못 했기 때문에, 대체로 사혁의 말을 절반은 알아듣지 못 했지만, 어쨌거나 세건은 사혁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사혁이 세건을 문다. 세건은 아, 아,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짐승소리를 낸다. 세건이 허공을 향해 무언가 붙잡는 시늉을 하다가 결국 뼈를 깎아 만든 것처럼 차갑고 딱딱한 손등에 손바닥을 올린다. 세건은 흐으으, 흐으으, 사람도 짐승도 귀신도 아닌 말을 하다가 왈칵, 울음과 함께 사정했는데, 맨다리를 벌벌 떨며 입을 벌리고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는 세건을 보는 사혁은 우리 세건이 이빨 많이 컸네, 하고 웃어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평소의 사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건은 열일곱 살이 됐다. 恥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사혁의 집은 십이 년 째 뼈처럼 하얬다. 세건을 데려오자마자 사혁이 칠한 새하얀 정사각형의 집이다. 사혁은 사람도 귀신도 아닌 것을 들여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바로 그 때부터 제 집을 하얗게 꾸미기 시작했다. 별 꼴이라며 사준이 혀를 찬 지도 벌써 십 년이 지나고, 세건의 방을 사람과 같이 채워주던 사준은 더 이상 사혁의 집을 찾지 않는다. 세건 또한 자신의 방 속에 새롭게 채워지는 그 어떤 사물들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세건이 하는 것은 그 하얀 집 속의 그 하얀 방 속의 그 하얀 세상 속의 제 정신의식도덕관념 속에 가만히 들어 앉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세건이 자신의 언어를 차곡차곡 쌓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건이 말을 하지 않는 까닭은, 세건이 귀머거리여서도, 세건이 말을 늦게 텄기 때문도 아니었다. 세건은 다만 자신의 도덕과 정신과 의식을 굳이 언어라는 것으로 채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는 상태로 자라서, 이제 세건은 저가 사람인지 귀신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하고, 얘, 세건아, 젖을 먹고 자란 뼈가 빠지면, 하는 사혁의 목소리가 들리걸랑, 사혁이 말을 하는 그 시간 동안 세건은 하얗고 촘촘하고 유일한 사람의 이빨이 되어 제 세상 속 바닥에 아주 깊숙하게 침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혁은 그런 세건을 앞에 두고 이러쿵저러쿵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세건아, 이 집은 내가 직접 고른 거다. 나는 깨끗한 집이 좋아. 어떤 집이 싫냐면, 나는 선지 냄새가 나는 집이 싫다. 피 냄새라는 것이, 내가 또 그걸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이 집에서 풀풀 풍길 만한 그런 것은 또 아니거든. 내가 그래서 애 낳는 여자를 싫어하는 것도 그런 거다. 동생이라는 게 태어날 때, 그런 게 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생이라는 것이 태어날 때, 온 집안에 선지 냄새가 가득 해가지고는, 피 냄새가, 양수 비린내라는 것이 온 집안에 훅하고 풍기는데, 내가 그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 아, 사람이 먹고 싶다, 하고 생각을 했어. 나는 그 때부터 꾸준히 그래왔어.
사혁은 이제 거리낌없이 세건에게 자기 자신을 열어 보인다. 세건아, 나는 사실 사람이 아니란다.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게 살 수는 없는 거다. 물론 언젠가 너도 죽고, 나도 죽겠지만, 언젠가 죽는다고 해도 그게 굳이 사람이나 짐승이나 동물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나는 죽더라도 곧 다시 살아날 거 고, 물론 사람이라면 그러지 않겠지.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아니겄다, 하고 생각한다. 세건아, 나는 가끔, 네가 죽기 전에 내가 죽어서, 내가 너한테 그리 했던 것처럼 네가 나를 키우는 생각을 해. 그럼 나는 몹시 행복해진단다.
세건은 자신에게 제 속을 드러내는 사혁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입을 크게 벌린다. 깊고 검은 아가리를 열어 하얗고 고른 간니를 보여주었다가 입을 다시 다무는 세건은 이제 사혁의 앞에서 그저 이빨이 된 채 자신의 세계를 지켜보고 있다.
사혁은 세건의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울퉁불퉁하고 딱딱한 어금니 끝자리에 사랑니가 나고 있다. 성년이다.
세건이 열여덟 살이 되는 날이었다. 사혁은 자신이 세건의 이름을 붙여준 그 날을 세건의 생일로 정했다. 어느 사 월에, 그러나 세건은 계절의 이름을 알지 못 했지만, 사 월이 시작되는 날에, 사혁은 그 날 세건이 태어났다고 정했다. 그리고 열세 번째로 돌아온 세건의 생일에, 세건이 성년이 되는 날에, 사혁은 죽기로 한다.
세건이 십이 년 동안 배워온 세상 속에는 죽는다는 것이 그저 관념으로만 존재했다. 사람은 언젠가 죽고 짐승도 언젠가 죽는다고 하였지만 세건의 세상 속에는 이빨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그래서 세건은 죽음이라는 것을 몰랐다. 다만 세건이 욕실에 들렀을 때, 하얗고 정사각형으로 지어진 집에서 하얗게 정사각형으로 지어진 집 속의 하얗고 정사각형으로 지어진 욕실에 담겨진 사혁은 산 채로 토막이 나 있었다. 비명도 없이 몸통이 조각조각 나 있는 사혁은 얌전히 욕조에 담겨져 있었는데, 세건은 욕조에 담겨진 사혁을 보고, 그러니까 욕조에 토막이 쳐진 채 어느 정도 자기 위치에 놓여 있기만 한 사혁을 보고, 죽는다는 것을, 그러니까 살아있는 것은 그것이 사람이나 동물이나 짐승이나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건은 이제 자신의 세계와 정신과 의식과 도덕이 부러져있다는 사실을 안다.
목을 매달거나, 배를 가르거나, 약을 먹거나, 무언가를 뒤집어쓰거나, 혹은 뛰어내리는 것, 몸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 이 중 그 어떤 행위도 해당되지 않았지만 세건은 무엇이든 토막나면 죽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그러니까,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한 단어이다. 사준이 이야기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사혁이 알려주었던 그 어떤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죽음의 한 종류이고, 그래서 사혁은 지금 자살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으며, 이 일련의 과정이 끝나고 나면 세건은 사혁의 앞에서 제 恥를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세건은 가만히 사혁을 바라보았다. 사혁도 세건을 바라보고 있다. 세건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세계가 자신보다도 낮은 곳에 위치해있는 것을 지켜본다.
세건은 사혁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쓰다듬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혁의 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사혁이 거칠게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세건이 허리를 숙이자 사혁과 시선이 맞닿는다. 세건은 사혁을 통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하게 눈에 새기고, 사혁은 저를 통해 죽음을 배우는 세건을 똑똑하게 눈에 새기고 있다. 그러자 사혁이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를 한다. 세, 건, 아. 세건은 처음으로 사람처럼 대답해본다. 응. 사혁이 웃는다. 사람, 다, 됐구나. 세건은 또 사람처럼 대답해본다. 응.
쉬, 하고 숨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사혁은 욕조 속의 어둡고 깊은 곳에 다시 돌아오지 못 할 만큼 잠겼다. 그리고 세건은 바닥으로 아주 가라앉는 자신의 세계를 보며, 난생 처음 알게 된 색채를 바라만 본다. 저것이 죽음이다. 그러나 거짓이라 재생이고, 사혁은 곧 다시 돌아올 것이다.
세건은 욕조의 가장자리에 손을 얹고 사혁이었던 무취무미의 시뻘건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사혁이 담겨 있는 곳에 고개를 푹, 하고 담가보았다. 사혁의 시체 속은 뜨뜻하고, 숨을 쉴 수 없었다.
세건은 죽어있는 사혁을 내버려둔 채 얼굴을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사흘 정도를 굶었다. 사흘 동안 화장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용변이 보고 싶지 않았고, 사혁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있는지 두려웠으며, 먹는 것이 없으니 나오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건은 아직도 숨을 쉴 수 없었던 사혁의 시체 속을 생각한다(세건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지만 시체라고 표현하기로 한다)새빨갛고, 까맣고, 마치 끓인 물처럼 뜨뜻하고, 끈적끈적했다. 어쨌거나 사혁은 죽었다. 그러나 금방 다시 돌아올 것이다.
세건이 굶기 시작한지 나흘 만에 사준이 사혁의 집에 들렀다. 어떤 소식을 듣고 찾아왔는지 몰라도 사준은 양 손에 무엇인가를 잔뜩 들고 있었다. 대부분이 딱딱하고, 길고, 먹을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사준은 어린 아이였던 세건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는지 지독한 냄새가 나는 집 안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 세건을 보며 세상에, 빨리도 컸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세건은 인사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다)
세건은 사준이 무엇인가 하기 위해 사혁의 집에 들렀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준은 세건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다가 거, 우리 형이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천문 열린 놈을 참 곱고 징그럽게도 키워놨구나, 하고 마치 저가 사혁인 것처럼, 익숙한 말투로 자신의 형과 세건을 평가했다. 얘, 세건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형은 사실 사람이 아니란다(세건은 알고 있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우리 형은 사실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그냥 너처럼 천문 열린 怪異라서 죽으면 돌아오고 죽으면 돌아오고 한단다(세건은 자신이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이번이 딱 세 번째고, 올해가 딱 백 년 째다. 뭐, 너도, 익숙해졌겠지만, 맡아도 맡아도 이 거지같은 냄새는 참 고약하지 않던?
사준은 욕실로 들어가 보았다가 금방 다시 나왔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한다. 그래도 이번은 참 거하게도 죽었다(여태까진 그래도 죽을 때만은 사람 모습이었는데, 왜 갑자기 저런 꼬라지로 죽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네) 이번처럼 냄새가 난 적도 처음이다(이번처럼 아예 물처럼 죽은 적도 처음이고) 그래도 금방 돌아올 거야(집 안에 양수냄새가 가득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세건은 사혁이 자살을 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건은 사혁 이외의 사람 앞에서 입을 벌려본 적도, 사혁 이외의 사람에게 말을 걸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말을 못 할 만도 하지, 귀도 안 들리고 말도 덜 트인 것을. 다 천문이 열려 있어서 그렇다, 네 몸 속에 이것저것 오락가락 왔다 갔다 해서 그래. 보통 그런 것들은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죽는데, 너는 우리 형을 만난 게 그저 천운이었던 거다.
어쨌거나 사준은 다시 욕실에 빨려가듯 들어갔고,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세건은 흔들리는 걸음으로 욕실로 다가선다. 하얗게 정사각형으로 지어진 집 속을 세건이 휘청거리며 헤매다 욕실 앞에, 처음으로 새 이빨이 나는 것을 확인했던 그 옛날 어린 나이의 자신처럼 욕실 앞에 선다. 욕실 속에서 무언가 씻어내는 소리가 들리고(세건은 그것을 살이라고 생각했다)단단한 어떤 것을 자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세건은 그것을 뼈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사혁을 기다렸다.
사준은 금방 나왔다. 그리고 세건이 욕실 안을 훔쳐볼 새도 없이 세건을 들어 침대에 눕히고는 깊게 재운 뒤 자리를 떴다.
그리하여 세건은 지금 어린 사혁을 데리고 있다. 사혁은 사준이 떠난 지 이틀 만에 세건의 몸통 절반만한 크기의 모습으로 욕조에서 기어 나왔다. 어린 사혁은 머리가 짧고, 피부가 하얗다. 딱딱하고 차가웠던 손가락이 말랑말랑하고 짧아졌다. 미성숙한 모습의 사혁은 세건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말도 할 수 있었고, 소리도 잘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세건은 욕조에서 기어 나온 이 어린 사혁을 위해 말을 길게 하는 법을 불가피하게 어린 사혁으로부터 배워야 했다.
사혁은 다시 태어나고 나서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세건 또한 사혁과 같이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아무 것도 먹지 않았지만 세건은 배고픔도, 갈증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세건은 사준의 말을 겨우 이해했다. 우리 형은 사실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그냥 너처럼 천문 열린 怪異라서 죽으면 돌아오고 죽으면 돌아오고 한단다. 세건 또한 사혁처럼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그저 정수리에 훤히 천문이 열린 怪異, 인간도 귀신도 아닌 것이라, 사혁은 자신에게 인간 세 자에 마를 건 자라는 사람의 것이 아닌 이름을 붙여준 것이 분명하다. 세건은 사혁이 자신을 거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혁이 자신의 입 안을 마치 소중한 것처럼 검사하고, 닦아주고, 관리해주었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 사혁은 세건의 존재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세건이 살아가는 세계 자체가 되었다.
이제 어린 사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건을 향해 말한다. 얘, 세건아. 나는 선지냄새가 싫다고 했었지. 세건은 긍정한다. 사혁은 확실히 그렇게 말했다. 어린 사혁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세건을 향해 말한다. 얘, 세건아. 나 좀 안아주련. 그러면 세건은 어린 사혁을 끌어안고 몸을 일으킨다. 어린 사혁은 세건에게 속삭인다.
얘, 세건아. 어린 것들은 원래 이갈이를 한단다.
세건이 고개를 끄덕인다.
얘, 세건아, 어린 것들은 원래 이빨이 빠진단다.
세건이 고개를 끄덕인다.
얘, 세건아, 어린 것들은 원래 뼈가 자라난단다.
세건이 고개를 끄덕인다.
얘, 세건아, 어린 것들은 원래 제자리에 있는 것들을 밀어내며 자라는 거란다.
세건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린 사혁은 흡족해했다. 세건의 품에 안겨 세건의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어린 사혁이 세건을 바라보며 아가리를 벌렸다 다문다. 세건은 어린 사혁의 검고 빨간 입 속에 촘촘하게 나 있는 새하얀 젖니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 이빨이다. 사람의 것이 아닌 이빨이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세건의 세계가 닫힌다.
*사혁이 한세건의 치아를 매일 검사해주는 부분은 순백님 썰에서 허락받고 따왔습니다.
(짧은 머리를 한 남자. 키가 크고 말랐다. 양 눈은 그림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무대 왼쪽에는 짧은 모양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한 가운데에는 작은 나무의자가 두 개 놓여져 있다. 의사 역할을 맡은 배우가 계단 가장자리에 올라 서 있다. 가벼운 옷차림과 슬리퍼, 하얀 의사가운. 그러나 직업의식이 투철한지는 않은지 곧 바른 자세 대신 껄렁껄렁한 모습으로 의사가운 주머니에 오른손을 집어 넣는다. 작은 조명이 그가 기대어 서 있는 계단을 비춘다. 계단의 끝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남자 : 소년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설명을 하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하고자 합니다.
남자 : 내가 어느 남자아이를 맡게 된 일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곧장 오해하는 부분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드리고 싶군요. 내가 그 소년처럼 조실부모했다던가,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내 유일한 피붙이라는 사실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굉장히 민감하고 불편한 이야기인 줄을 미리 알고 있습니다만은 혹 이 이후를 위하여 미리 이야기해두고 싶습니다. 그 소년을 맡을 때에, 나는 그 소년과 교감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공통점도 내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자, 왼쪽 계단 끄트머리에 앉아 품에서 수첩을 하나 꺼내든다.)
남자 : 그 소년은 형무소로 들어가기 전에 내 병원에 먼저 맡겨졌습니다. 나는 여기에 그 소년을 치료하며 내가 느낀 감정들을 기록했습니다. 저는 정신과 의사이고, 제 또래의 사람들보다 조금 어려보인다는 것 외에는 남들 눈에 특별할 것이 없었죠. 결단코, 맹세하건대, 저는 그 소년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 아무런 사심이 없었고 또 지금도 없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의사, 계단에 앉아 수첩을 하나 꺼내들고 적는 시늉을 한다. 잘 나오지 않는 볼펜. 여러 번 직직 긋고 나서야 제대로 된 필기를 시작한다. 남자, 알 수 없는 필기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의사 : 모월 일 일, 안녕. 이름이 뭐야. 네가 이 병원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기억하니? 아무런 말도 반응도 없다. 열 여덟 살. 다섯 마리 말과 한 남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찔러 죽임. 안녕, 이름이 뭐야, 네가 이 병원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기억하니? 라는 세 마디 말을 던진 것 외에 아무런 소득 없음.
의사 : 모월 사 일, 안녕, 오늘 기분이 어때. 병원 치고는 방이 괜찮지? 우리 못 본 사흘 동안 잠은 잘 잤니? 역시 아무런 말도 반응도 없다. (의사, 빠르게 덧붙인다. 소년의신상정보이름은한세건나이는열여덟살중학교에다니던도중일가족강도에게몰살친척집에맡겨졌지만유산분배문제로인한불화로인해가출이라고적혀있음,적혀있음,적혀있음.) 가출을 했다가 그 다음부터 어디에 머물렀니? 네가 붙잡힌 곳이, 어느 마굿간이라고 들었는데 맞니?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아무런 소득 없음. 모월 육 일, 모월 팔 일, 모월 십 일, 모월 십이 일, 모월 십사 일, 아무런 소득 없음, 아무런 소득 없음, 아무런 소득 없음, 아무런 소득 없음, 아무런 소득 없음.
(의사, 수첩을 소리내어 닫는다. 착! 하고 수첩이 닫히는 소리가 울린다. 의사는 아무런 말없이 관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무대 중앙으로 나아간다. 터벅터벅, 하고 구두가 나무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좌측 계단 끝에서 의사와 비슷한 체구의 한 남자가 걸어나온다. 두 사람이 나란히 두 의자에 앉았지만 조명은 의사만을 비춘다. 가늘고 긴 눈의 의사. 머리가 검다. 의사 옆의 남자가 다리를 꼬면 의사는 관객을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의사 : 나는 이미 내가 치료해야 할 소년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섯 마리의 말과 한 남자를 찌른 것이 바로 소년의 죄였지요.
(의사가 입을 다문다. 의사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꼬았던 다리를 푼다. 왼쪽 계단 뒤에서 환자복을 입은 소년이 천천히 걸어나온다. 조명이 꺼지고 발소리만 들린다. 발소리가 울려퍼지면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 자리에 환자복을 입은 소년이 앉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의자의 등받이에 양 손을 얹는다. 조명이 다시 의사를 비춘다. 소년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의사와 의자의 등받이에 올려진 남자의 손만이 조명에 비친다.)
의사 : 소년의 성장배경을 알아내는 것은 굉장히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소년의 친척들은 병원에 찾아오지도 않았고, 또 소년은 입을 열지 않았지요. 경찰은 소년의 성장배경에는 큰 관심이 없었어요. 경찰에게 중요한 건 이 소년의 이름과 범죄행각, 현재 살고 있는 곳 뿐이었죠. 그러나 소년이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저는 소년에게서 큰 실마리 하나를 찾을 수 있게 되었지요. (의사, 수첩을 펼치고 수접에 고개를 박는다.) 그러니까, 그 소년은, 그러니까,
남자 : 매일같이.
의사 : 악몽을 꿨습니다. 아마 말에 관련된 악몽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년은, 제 추측이지만, 아마 항상 이렇게 잠꼬대를 해왔던 것 같았습니다. 소년의 잠꼬대는 굉장히, 아주 굉장히, 깊고 낮게 울렸지요. 소년은 약과 주사기운에 취해 깊은 잠에 빠지면, 항상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잠에 취한 목소리로…….
(조명이 의자의 등받이를 비춘다. 의자의 등받이를 잡고 있는 남자의 말 머리 모양의 가면이 보인다.)
의사, 남자 : 에쿠-우스.
(남자와 의사, 고개를 들고 조명, 꺼진다. 잠깐의 소요와 함께 조명이 다시 의사를 향한다.)
의사 : 잠깐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게는 형이 하나 있고, 아버지가 둘 있었죠. 어머니는 셋이 있었지만 동생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인간이었고 어머니도 인간이었는데, 형만이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필기하는 소리, 의사의 움직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잠깐의 침묵.)
의사 : 단순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인 것이 아닙니다. 형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친형이었지만, 저는 저의 친형인 그에게서 인간적인 모습 그 어떠한 것도 느낄 수가 없었죠. 아버지는 항상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년 : 그 놈은 악마야.
의사 : 어느 날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조실부모했지만, 아버지가 제게 했던 말들은 기억하고 있었죠. 하지만 과연 이것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일이 맞는 걸까요? 태어나고 그 이후 삼 년 동안 부모가 했던 이야기들을 모두 기억하는 것이 과연 평범하고 일반적인 일이었을까요. 말하자면, 저는 커가면서 인간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지 깊게 고민해오고 또 성찰했습니다. 그 놈은 악마야. 과연 이 말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버지는 무슨 뜻을 가지고 제게 제 형이 악마라고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아니, 과연 그 말을 정말 저의 아버지가 한 것이 맞을까요?
(조명, 꺼진다. 잠깐의 소요와 함께 조명이 소년을 비춘다. 의자의 등받이를 잡고 있는 남자의 손과 소년의 얼굴이 보인다. 하얗게 질려 있는 소년의 얼굴.)
의사 : 그래서 형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복잡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 형이 죽었다고? 하는 의문 말이지요. 그리고 심지어 자연사, 병사, 사고사도 아니고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의문과 곧이어 굉장한, 정말 굉장한 환희를 느꼈습니다. 그 형이, 마치 악마와도 같았던 저의 형도 생명체였다는 것을 확인받은 것이었으니까요.
의사 : 그래서 저는, 소년을 더 깊게 파고 들어가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직후, 수소문을 하여 형을 죽인 소년을 찾아낸 것입니다. 바싹 마른 사내아이, 학대로 인해 불그죽죽하게 일어난 상처들이 온 몸 가득 남아있는 소년. 쇠꼬챙이로 형의 눈알을 파내고 그를 살해한 아이.
의사 : 소년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제게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저의 얼굴이, 눈을 제외한 그 모든 것이 형의 생김새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겠죠.
(의사, 자리에서 일어난다. 의사가 비운 의자에 말의 머리뼈 모양을 한 가면을 쓴 남자가 앉는다. 말과 같은 행동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소년이 두 다리를 의자에 올려 웅크리면 의사는 서서히 무대를 걷는다. 소년, 홀로 조명을 받는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며 소년은 소년과 의사, 일인 이역을 시작한다.)
소년 : 네가 누굴 죽였는지 기억하니?"
소년 : …….
소년 : 나는, 사실 말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야. 하물며 내 말도 아닌 남의 말 몇 마리가 죽는 것 따위 내 알 바 아니지.
소년 : …….
소년 : 그래도 네가 저지른 일에 대해 내가 묻는 이유는, 네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야.
소년 : 그 새낀 사람이 아니었어.
소년 : 그래, 인간은 아니었지.
(소년, 잠시 침묵한다. 의사는 여전히 무대를 걷는다.)
소년 : 내 얼굴을 처음 본 날 기억해?
소년 : 사월 이일.
소년 : 잘 기억하고 있네.
소년 : …….
소년 : 네 생일이었지.
(소년, 허벅지를 꼬집으며 자해한다.)
소년 : 저런.
(의사, 소년의 앞에 꿇어앉는다.)
소년 : 세건아.
소년 : …….
소년 : 네가 죽인 사람은 내 친형이야.
소년 : …….
소년 : 물론 너를 탓할 생각은 없어.
소년 : 네가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죽였을 테니까.
소년 : …….
소년 : (속삭이며)이건 비밀인데.
소년 : 사실 나도 인간은 아니란다.
소년 : …….
소년 : 나는 너를 치료하거나, 너를 낫게 하거나, 네게 무언가 병이 있다고 진찰하기 위해 너를 이 곳으로 데려온 게 아니라.
소년 : 내가 세상에서 제일 증오한 우리 형이
소년 : 너와 어떤 관계였길래 너에게 죽어주기까지 했는지 그게 궁금해서
소년 : 너를 이 곳으로 데려온 거야.
소년 : 나도 사실, 매일같이, 내 형의 눈알을 찌르고, 누르고, 터뜨리고, 후벼파는
소년 : 그런 꿈을 꿔왔거든.
(의사, 자리에서 일어난다. 소년, 의자에 올렸던 두 다리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다. 조명이 모두 꺼진다.)
(잠깐의 소요. 모든 소품이 사라지고 의자 하나만이 무대 위에 남아있는다. 소년, 제자리에서 주섬주섬 옷을 벗고 속옷 바람으로 의자에 앉는다. 의사, 무대 오른쪽 구석에서 질문을 시작한다. 조명은 소년을 향한다. 상처가 마구 나 있는 몸. 의사는 친절한 목소리로 질문을 시작한다. 무표정한 소년의 얼굴.)
의사 : 말을 좋아하니?
소년 : 별로.
의사 : 그럼 마굿간에서는 왜 살았던 거야?
소년 : 그가 거기 있었어.
의사 : 누구?
소년 : (신경질적으로)알잖아!
의사 : 그래, 그렇다고 하자.
소년 : …….
의사 : 말을 좋아하니?
소년 : 안 좋아해.
의사 : 그럼, 마굿간에서 언제부터 살게 됐니?
소년 : 2년 전.
의사 : 그 때도 그가 마굿간에 있었니?
소년 : 응.
의사 : 그를 처음 만났던 건 어디에서야?
소년 : 마굿간에, 옆에, 들판에서.
소년 : 그는 뭘 하고 있었어.
의사 : 무엇을?
소년 : …….
의사 : 말해봐. 무엇을?
소년 : (조용히)강간.
의사 : 누구를?
소년 : 어떤 여자를.
의사 : …….
소년 : 그리고 바로 또 나를 강간했어.
의사 : 아팠겠구나.
소년 : 아프진 않았어.
의사 : 괴로웠니?
소년 : 괴롭지도 않았어.
의사 : 그래……. 그가 너를 강간하는 동안 네게 무슨 말이라도 했니?
소년 : 세건아.
의사 : 세건아.
소년 : 드디어 만났구나.
의사 : 드디어 만났구나.
소년 : 내 사랑.
의사 : 내 사랑.
의사 : …….
의사 : 그는 마굿간에 살고 있었니?
소년 : 응.
의사 : 그는 말을 관리하는 관리인이었니?
소년 : 아니.
의사 : 관리인은 따로 있었니?
소년 : 응.
의사 : 관리인은 지금 어디 있어?
소년 : 죽었어.
의사 : 왜?
소년 : 들판에서 강간당했던 여자가 그 사람이었어.
의사 : 그래. 그에게 강간당하고, 너는 마굿간으로 끌려간 거구나.
소년 : 아니, 끌려간 게 아니야.
의사 : 그러면?
소년 : 내가 내 발로 그를 쫓아갔어.
의사 : 왜?
소년 : 그래야만 할 것 같았어.
(잠시의 침묵.)
의사 : 잠시 쉬었다 할래?
소년 : 아니.
의사 : (고개를 끄덕이고) 마저 이야기하자.
의사 : 마굿간에서 이 년 동안 무슨 일을 했지?
소년 : 말을 관리했어.
의사 : 그 여자 대신 네가 말을 관리하게 된 거구나.
소년 : 그래.
의사 : 그가 몇 번이나 너를 찾아왔니?
소년 : 일주일에 한 번.
의사 : 그가 찾아올 때마다 그에게 강간당했니?
소년 : 아니.
의사 : 그러면?
소년 : 의식, 의식을 했어.
의사 : 의식이라……. 어떤 의식 말이지?
소년 : 말의 피를 마셨어.
의사 : 누구의?
소년 : 몰라. 어떤 이름 모를 사람의 말. 암컷일 때도 있고, 수컷일 때도 있었어. 하나같이 살아있었어.
의사 :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를 때렸니?
소년 : 응
의사 : 괴로웠니?
소년 : 응
의사 : 어떤 점이?
소년 : 그가 나를 때린다는 점이.
의사 :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자. 마굿간에 있는 말들은, 모두 그의 소유였니?
소년 : 아니.
의사 : 그러면?
소년 : 그 사람은 말들을 싫어했어. 그냥 동물을 싫어했었어. 틈만 나면 말을 죽이고, 그 자리에 새로운 말을 데려왔지.
소년 : 아니,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말을 죽여서 내게 먹이고, 그 자리에 새로운 말을 데려왔어. 나는 새로운 말들이 들어오면 말들을 묶어두고, 씻겨주고, 먹이를 줬어. 아침저녁으로.
의사 : 하루에 두 번씩?
소년 : 응
의사 : 그랬구나.
소년 : 그는, 자기가 만났던 사람 중에 자기가 죽이지 않은 사람은 나 뿐이라고 했어.
소년 : 그는 항상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했어.
소년 : 새 말들이 들어오면 나는 말들을 씻기고, 묶어뒀어.
소년 : 가장 건강한 말들은 항상 주말에 죽었어.
소년 : 나는 매일 주말 한 마리씩 말들을 죽여야 했어. 목을 따고, 그 피를 받아서, 그가 보는 앞에서 그걸 마셨어.
소년 : 그럼 그가 나를 칭찬해줬어.
소년 : 착하다.
소년 : 세건아.
소년 : 그렇게 내가 피를 잘 마시면 나를 칭찬해주고, 나를 강간해줬어.
(소년, 몸을 웅크린다.)
소년 : 나는 이 년 동안 매일같이 주말을 기다렸어.
소년 : 나는 그에게 내가 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
소년 : 그에게 칭찬받고 싶었고, 그에게 강간당하고 싶었어.
소년 : 미쳐버릴 것만 같았어.
소년 :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아무도 나를 알지 못 하는데, 그만 나를 알고 있었어.
소년 : 토요일이 되면 나는 그가 오기를 기다렸고, 그 날 밤 어떤 말의 모가지에 칼을 쑤셔 박을지 고민해야만 했어.
소년 : 비리고 뜨겁고 역겨운 피를 마시면 그가 나를 칭찬해줬어.
소년 : 그럼 나는 그게 너무 기뻤어.
소년 : 기쁘고, 황홀했어.
소년 : 그게 정상이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는데, 벗어날 수가 없었어.
소년 : 매일 주말 말을 죽이고, 말을 먹었으면서, 날이 밝으면 마굿간 근처의 땅을 파다가 말의 무덤을 만들어줬어.
소년 : 깊게 묻지 않으면 시체 썩는 냄새가 고약하게 났어.
소년 : 나는 일주일 내내 깊게 땅을 팠고, 일주일의 끝이 되면 말을 먹고, 다시 또 새로운 주가 찾아오면 말을 묻고, 땅을 팠어.
소년 : 나는 점점 더 멀리 말의 무덤들을 만들었어.
소년 : 그가 새로운 말들을 데려올 때마다 나는 더 많은 무덤을 만들어야 했어.
의사 : 매일같이 악몽을 꾸는 모양이던데, 무슨 꿈인지 설명해줄 수 있니?
소년 : 내가 악몽을 꾼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의사 : 몰래 엿들은 건 아니야. 네가 항상 큰 소리로 외쳤지.
소년 : 에쿠--우스.
의사 : 하고.
소년 : …….
의사 : 알고 있구나 너도. 네 잠버릇을.
의사 : 그게 어떤 뜻인지 알려줄 수 있니?
소년 : …….
소년 : 그가 알려준 주문이야.
소년 : 내가 피를 마실 때마다 내게 말했어.
의사 : 어떤 주문이지?
소년 : 프린스.
소년 : (홀린듯이) 프린스, 프랑스를 낳았다. 프랑스 프랑스크를 낳고, 프랑스크 플랑커스를 낳고, 프랑커스 스팡커스를 낳고, 스팡커스 스펑커스 대왕을 낳아, 대왕은 예순살까지 살았도다. 레그우스 네크우스를 낳고, 네크우스 힘의 왕인 플에크우스를 낳았고, 플레크우스 칭클 챵클을…….
의사 : 그가 그렇게 이야기 했다고?
소년 : (홀린듯이)응.
소년 : (홀린듯이)그리고 나를 때렸어.
소년 : (홀린듯이)피를 들고 있는 나를 때렸어.
소년 : (홀린듯이)그러면 나는 그에게 얻어맞으면서 피를 마셨어.
소년 : (홀린듯이)비리고, 뜨거워. 구역질이 나.
소년 : 내가 피를 모두 마시면 그는 나를 끌어안고 이렇게 이야기해줬어.
소년 : (속삭이듯이)나의 오직 하나뿐인 에쿠우스.
사혁세건 재록본에 수록될 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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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곤, 그거 알아요? 원래 너무 어린 애들이 죽으면, 그런 건 요절이라고 하지도 않아요. 죽었다, 가버렸다, 떠났다, 돌아갔다, 기타등등 뭐, 그런 말들. 그런 말로도 제대로 표현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생각해봐요. 요절이라는 게, 이런 말이 알고 보면 참 재밌어요. 단편적으로 예를 들자면, 음, 최소한 몇 년을 살아야 요절로 인정을 받냐, 뭐 이런 의문 같은 것들? 사람이 죽는다는 것, 사람이 떠난다는 것, 사람이 죽었다, 갔다, 돌아갔다, 귀천, 뭐 이런 말들, 자주 쓰잖아요? 누구누구가 요절했다 혹은 누구누구가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해버렸다, 약간 관용구처럼. 요절한 작가, 음악가, 건축가,사업가, 발명가, 미술가, 예술가, 시인, 가수, 무용가, 운동선수, 꼭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도요. 같은 마을 사는 누가 요절했다던가, 그런 것, 그런 경우, 많지 않을까요.
잘 안 와 닿아요? 사실 잘 안 가 닿을 것 같은데, 특히 아르곤한테는. 아르곤은 몇 살에 한 번 죽었는데요? 그러니까, 인간이었을 때. 아, 이 말 약간 전생체험같아. 인간이었을 때, 인간이었을 때. 뭐, 아르곤도 본 투 비 뱀프 로열 블러드, 이런 건 아니잖아요, 석세서니까. 몇 살에 얼어죽었어요? 얼어죽었었다고 했잖아. 아, 이야기 하기 싫어요? 왜요? 아낙스 때문에? 지금은 내가 아낙슨데 뭐. 아, 이해는 가요. 그런 거죠? 구-남-친-같은. 하하.
어쨌든, 이렇게 자주 쓰이고 이야기 나오는 요절이라는 거, 그러면 사람이 도대체 몇 살에 죽어야 그게 요절로 인정을 받는 걸까요? 너무 어려도 안 되고, 너무 늙어도 안 되고.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죽었을 때 그걸 요절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또 예순이나 일흔 먹은 남자가 죽었을 때 그걸 요절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구요. 어떻게 보면 참 까다로워요. 요절이라는 말. 사전적 정의로는 젊은 나이에 죽음. 아마 실제로도 젊은 나이에 죽음. 젊다와 어리다는 사실 다른 말이니까요. 젊다, 젊다의 기준이 뭘까요, 어리다는 기준은 또 뭐고요. 사실 어리다, 젊다, 이런 개념은 아마 인류가 성장을 시작했을 때부터, 아마 꼭 인류가 아니어도, 태고적부터 존재해왔을 개념일텐데. 제가 요즘 들어 하는 생각이 이거에요. 사람과 함께 존재해온 것들 중에 사람이, 그러니까 사람 입장이죠. 사람 입장에서 이해하기 쉬운 건 하나도 없어요.
아,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요, 오늘은 한국을 봤어요. 아시죠, 제 고향. 고향이라고 말하기에도 어색하군요. 기억이 흐릿해요. 한국이요, 거기서 살았을 때, 거기서 살고 있었을 때, 행복하기만 했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 때의 기억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역시 여기 제 머리 속에, 뭐가 하나 들어있기 때문이에요. 여과기나 필터 같은, 그 비슷한 것? 평범한 사람들은 다들 그러더라구요. 추억보정이라고. 재미있지 않아요? 기억이 흐려지면 흐려질수록 아름답게 기억된다니, 살기 참 편한 기능이에요. 아마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저한테는 특히 그래요. 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래되지 않아도 제 기억과 추억이 흐려지지 않아도 제 인식 속에서 아름답게 남는다는 거겠죠. 이게 바로 릴리쓰의 장치고, 릴리쓰의 함정이고, 릴리쓰의 선물이고. 사실, 아, 막말로, 보통 사람들에게는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산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은 아니잖아요. 힘든데 어떻게 행복해. 아무리 행복이 상대적이라고 해도. 근데 전 행복하다고 느꼈었거든요. 제가 생각하고 그린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고, 행복이 있고. 이제 와선 제가 생각해왔던 그런 것들이 모두 릴리쓰가 만든 장치였나 싶지만, 그래서 가끔 슬퍼지지만서도.
어쨌든 오늘은 한국을 대충 한 번 훑어봤는데,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 섹스는 됐어요. 엊그제도 했고, 어제도 했고, 오늘은 좀 쉽시다 뼈 삭아요. (흡혈귀도 뼈가 삭던가?) 속으로 생각해도 다 들리거든요? 저 테트라 아낙스거든요?
어쨌든, 어떤 여자가 한 말인데, 예뻤어요 그 여자. 그래서 잊혀지지가 않나봐요 내 이상형이라. (얼굴이 제 이상형이었어요. 진짜 예뻤다니까요. 게다가 연상이야!) 스펙을 읊어볼게요. 이십 팔 세, 서울, 강서구에, 키는 백 육십 칠에, 혼자 살고 연봉이, 알았어, 알았어요. 농담이에요. 질투하는 거에요? ……고마워요.
그 여자가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다가, 앞으로도 누워있을 예정이었거든요,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하는 생각이 딱 이거에요. 나는 요절한 천재가 되고 싶었어. 예뻐서 그랬을까, 아니면 내 이상형이라 그랬을까, 그것도 아니면 내일 자살할 운명이라 그랬을까. 저 문장이 계속 마음에 콱,하고 박혀서 안 빠지더라구요. 나는 요절한 천재가 되고 싶었어, 나는 요절한 천재가 되고 싶었어. 그래서 자살을 하는 걸까. 내일, 어……, 지금 한국은 열 두 시 지났나요? 아, 지났네. 그러니까 한국 시간으로 오전 두 시 쯤에 투신을 해서, 죽어요. 왜 이런 이야기를 했냐면, 지금이, 바로, 한국 시간으로, 새벽, 한 시, 오십, 팔, 구. 말을 하는 도중에 보게 되겠네요. 점심으로 스시를 먹는 게 아니었는데. 속에서 생선 비린내가 올라와요.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냐면, 아르곤, 제가 이 자리에 앉은 건 제 의지잖아요? 그래도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저는 말이죠, 저는 단 한 번도 요절하는 천재가 되고 싶다던가, 요절을 하고 싶다던가, 이런 생각들은 단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냥 오래, 행복하게, 편안하게, 돈을 많이 버는, 비웃지 말아요. 그냥, 그런 삶을 살고 싶었어요.
……. 이런 삶은 사실 단 한 번도 꿈 꿔본 적이 없고 또 꿈 꿀 필요도 없고. 저는 그래요. 이런 거 바랄 생각도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제 기준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그런 삶이 어땠냐면 이렇게 비현실적이고 그런 것보다는 공인중개사하면서, 부동산 좀 만지면서, 현금이나 좀 만지면서, 복비는 용돈으로 쓰고 돈많은 연상 누나를 하나 잡아서 등따시게 먹고 자고. 한 삼십 퍼센트 정도는 이룬 것 같죠? 부동산은 아니지만 현금은 좀 만지고, 공인중개사는 아니지만 회장 대리에, 돈도 없고 누나도 아니지만 연상 하나 잡아서. 하하.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제가 왜 죽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왜 하필 나인가. 또 다른 시점으로는, 과연 내가 스스로의 의지로 죽는 것인가 이런 이야기가 있겠네요. 궁금하지 않아요? 전 궁금한데. 저 원래 희생 같은 말 싫어해요, 저는 행복해지더라도 함께 행복해지는 게 좋아서. 희생은 손해보는 거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왜 하필 나인가. 왜 내가 죽어야 하는 걸까. 이 말 싫어하는 거 알아요. 저 같아도 그럴 테니까. 자꾸 죽는다 죽는다, 요절한다 요절한다 그런 얘기 들어서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래도 험한 말은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사실이니까. 음,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그래요. 저 같은 삶을 뭐라고 부르던가요. 예언자? 흡혈귀의 왕? 도서관? 슈퍼 컴퓨터? 데이터 서버? 적어도 도서관, 슈퍼 컴퓨터, 데이터 서버가 지금의 저보다는 수명이 더 길테니 모두 틀렸군요.
왜 하필 나인가, 왜 내가 죽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아르곤은 어떻게 생각해요? 아르곤 생각 들으려고 묻는 거 아니에요. 그냥 정리하는 거에요. 역시, 그게 바로 정답이기 때문이겠죠. 그러니까 아르곤은 그냥, 어, 아르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저는 곧 떠날 사람이고, 그 시기가 언제가 되던 간에, 아마 당신은 원하지 않겠지만, 어차피 저는 당신이 원하더라도 아르곤의 여기(톡톡) 여기에 남아 있지 않을 거에요.
좆같아요? 하하, 그래요,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그러니까 무섭지 않냐고 묻지 마세요. 사실 저도 무서워요. 그런데 원래 무서워 해야 하는 게 맞는 거에요. 원래 정답은 무서운 거에요. 모든 정답이 그렇듯이. 그런데 제가 이 무서운 말을 왜 굳이 입밖으로 꺼내 말하냐면, 어차피 당신밖에 듣지 못 할 말이니까 하는 거에요. 좀 더 적나라하고 거칠고 원시적으로 말해볼까요? 저, 금방 죽어요. 저는 이제 죽을 거에요. 역사상 가장 짧은 임기를 가진 왕,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을 왕이 될 거구요, 아무도 저를 기억하지 못 하고 저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세상이 올 거에요. 이건 예언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아마 어떻게든, 어떻게 해서든 저는 죽게 되겠죠. 그러니까 만약 제가, 당신 요절할 애인 말이에요, 내가 죽게 된다면 아르곤은, 내가 요절했다고 불러줘요.
그러고보면 흡혈귀 왕국도 참 슬퍼요? 이 놈의 왕조, 2대까지밖에 못 가다니. 영원을 산다면서, 아이러니하게, 이렇게 돈이 많은데 제대로 돈지랄도 못 해보고. 그래서 말이에요 아르곤. 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인에게 향수를 하나 맡겼거든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향일 거고, 그걸 뿌릴 사람도 세상에서 단 한 사람 뿐일 거에요. 왜냐하면 당신 전용이니까. 저 향수 이름도 지어놨어요. 제 빛나는 감성과 언어구사력으로, 아주 아름답고 뛰어나게. 돈 엄청 많이 들었으니까 뿌릴 때마다 마음껏 신경쓰세요. 아 참, 유명한 재봉사에게 정장도 하나 맡겼어요, 당신 전용으로. 입으면 정말 예쁠 거에요. 뭐, 멋있을 수도 있겠고. 드레스를 맡긴 건 아니고, 그냥 무난하게, 공식석상에서 입을 만한 그런 양복이에요. 그런 옷 싫어하는 거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제가 죽기 전에 한 번 쯤은 입어줬으면 좋겠네요. 옷이 오면 한 번 입어봐요. 아마 딱 맞을 거에요. 그 옷 입고, 제가 사준 향수도 뿌리고, 저랑 한 번 데이트가요. 그리고 제 샴푸랑 린스 훔쳐쓰는 것도 적당히 하고요. 다 티 난다니까? 전용으로 수제작하는 제품들인데, 아르곤한테서 제 냄새 풀풀 난다고 생각해봐요. 테트라 아낙스의 히트맨에게서 테트라 아낙스의 냄새가 난다, 이러면 좀 포르노 영화 같지 않아요? 물론 제 입장에서야 꼴리고 좋은데 나도 입장이라는 게 있잖아, 입장이라는 게.
어쨌든 저도 이거 돈지랄인 거 아는데, 그래도 이런 돈지랄,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구요. 비행기나 음식이나 그런 것들보다 좀 더 직접적이고 확실하지 않아요? 너랑 나랑 사귄다 하고 완전히 도장 꽝꽝 박는 거. 그러니까 어린 날의 치기라고 생각해줘요. 어차피 향수야 갖다버리면 그만이고, 안 뿌려도 그만일 테지만, 아르곤은 안 그럴 거라는 것 알아요. 쉿, 그리고 이건 아르곤에게만 말해주는 건데, 여차 싶으면 경매같은 곳에 갖다 팔아도 괜찮아요, 돈 많이 받아요. 하지만 아마 가져다 팔더라도 아르곤 외에 그 향수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거야. 장담해요. 보증해요. 나를 믿어요.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니까.
맞다, 아르곤. 가기 전에 이건 알아둬요. 제가 지은 당신 향수 이름이 뭐냐면요…….
독한 양주 탓이었는지 세건은 다시 일주일을 앓았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사혁은 세건을 위해 가장 높은 온도로 보일러를 켜주었다. 발바닥 가죽이 몽땅 타버리도록 뜨겁게 보일러를 틀어놓고서도 세건은 달구어진 방바닥보다도 뜨거운 열몸살을 앓는다. 사혁은 몸살을 앓는 세건에게 물었다. 그렇게 아프면 어디 병원에서라두 앓아눕는 게 어떠냐. 그러자 세건은 부어오른 목구멍을 가라앉히기 위해 사탕을 한가득 입에 문 꼴로, 사혁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앓다 죽어도 네 앞에서 죽을라고, 내 인생 조져놨으니 나 뒤지더라도 뒤지는 꼴까진 보고 가야 하지 않겠냐 개새끼야. 사혁은 세건이 몸살이 아니라 간절기를 앓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혁은 식은 땀을 흘리며 창백하게 질려있는 세건의 하얀 등을 바라보고, 불이 꺼져있는 자취방 천장을 한 번 바라보고, 눅눅하게 숨이 죽은 세건의 이불을 한 번 바라보고, 저기 저 쪽 어둡게 불이 꺼진 현관의 츄파춥스 깡통을 한 번 바라보고, 마치 뜨겁고 검게 보일 것만 같이 달아오른 숨을 내쉬며 찰나의 죽음을 유영하고 있는 세건을 다시 바라본다. 나는 네가 아니면 갈 곳이 없어, 나는 아프니까 살살 다뤄줘. 사혁은 자신을 찾아오기 전, 세건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다시 한 번 추측을 해 본다. 아마 끔찍한 일이었겠지. 다신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거다. 기반과 상식과 도덕과 애정을 모두 무너뜨리는 일이었을 거다. 사혁이 간절기를 앓는 세건의 얼굴에서 정신의 현을 고르다 못 해 삶을 연주하기를 포기한 세건을 바라본다. 세건의 뼈가 하얗고 고요하다. 성지였다.